(제 137 회)

종 장

우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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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보!

정말 꿈만같은 일이예요. 우리는 지금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고있어요.

차창밖으로 반기듯 달려오는 단풍든 가로수들과 멀리 과수원에서 빨갛게 무르익어 빛나는 사과알들과 고개를 묵직이 숙이고 굼니는 벼이삭들을 내다보느라니 저절로 눈굽이 시여지고 눈물이 솟구쳐올라 견딜수가 없군요. 저의 옆에는 지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타고있어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묘향산지구를 현지지도하시다가 우리 가족이 조국방문중이라는것을 아시고 아름다운 묘향산을 구경시키자면서 친히 부르셨대요. 몇해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신을 추억하시다가 우리 유가족들이 어떻게 살고있는가 알아보시였대요. 수령님께서는 2년전인 1983년 7월에 제가 쏘련관광단의 성원으로 왔댔다는것을 아시고는 그때 잘 돌봐주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면서 이번에는 자신의 명의로 초청하되 안동수영웅의 서거일을 계기로 가족들을 다 데리고나오게 하자고 일군들에게 말씀하시였대요.

이렇게 되여 제가 자식들을 데리고 그해 7월 4일 조국에 도착했는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저희들의 체류일정을 알아보시면서 성대한 연회도 차려주게 하시고 여러가지 뜻깊은 참관사업도 조직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어요. 그러시고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쁜 일이 제기되여 우리를 만나주실수 없게 된것을 못내 아쉬워하시면서 다음번에 조국에 오게 되면 자신께서 꼭 만나주시겠다고, 그때 온 일가가 다 같이 조국을 방문하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였대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그때 일을 잊지 않으시고 이번에 온 일가가 또다시 조국을 방문하도록 해주시고 오늘은 이렇게 몸가까이 부르신거예요.

난 묘향산이 점점 가까와올수록 가슴이 막 울렁거려 견딜수가 없었어요.

이제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오면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올릴가. 내려오는 말에 어려운 때의 밥 한그릇값을 일생을 두고 갚는다고 했는데 그처럼 어려운 때에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늘같은 그 은혜를 이 머리칼을 잘라 신을 삼아드린들 어찌 다 보답할수 있겠어요.

당신이 전사한지 40년이 되여오도록 잊지 않으시고 떠나간 전사를 못내 그리시며 유가족들을 돌보아주신 수령님,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그 강산이 네번씩 변하도록 세월이 흘러 전쟁의 상처도 씻은듯 사라지고 혈붙이들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속상처도 다 아물었건만 수령님께서만은 사랑하는 전사를 잃은 아픔을 이때껏 안으시고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역땅의 우리들까지 그처럼 따뜻이 보살펴주시지 않았어요. 그 사랑이 우리 아들은 박사로, 딸들은 기자로, 기사로 어엿이 자라날수 있었던것이 아니겠어요. 산설고 물설은 타향에서도 수령님품이 있어 양기를 잃지 않고 끌끌하게 자랐으니 그 자식들을 거느리고 어버이수령님을 뵈오러 가는 저의 가슴이 어찌 뜨거움에 젖지 않겠어요.

당신이 그처럼 온넋을 다해 우러러 따르던분,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신분, 우리 일가를 구원해주시고 크나큰 사랑으로 이렇게 어엿이 내세워주신분을 이제 뵙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은 막 터질것만 같았어요. 지난 수십년간 그이를 그리며 크나큰 사랑을 받아안을 때마다 동녘하늘 우러러 터치던 그 감사의 인사를 모두 모아 이번에 다 드리고싶건만 어떤 인사말을 드려야 그 고마움을 다 담을지 안타까왔어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여 일군의 안내를 받으며 어느한 방에 들어서던 우리들은 너무도 놀라운 현실앞에 모두 그 자리에 서버리고말았어요.

글쎄 어버이수령님께서 봄빛같은 미소를 만면에 환히 지으시며 휴계실에까지 나와 기다리시는것이 아니겠어요.

아, 그렇게도 뵙고싶던분.

전 그만 자신을 잊고말았어요. 꼭 친정아버지를 뵈옵는것만같아 어려움도 잊고 《수령님!》 하고 웨치며 어푸러질듯 달려갔어요. 그처럼 고르고골랐던 인사말도 못드리고 그저 그이의 품에 안겨 울기만 했어요. 글쎄 이런 못난이가 어디에 있겠어요. 머리가 반백이 되여가지고도 철없이…

그제야 난 펄쩍 정신이 들어 준비해가지고 갔던 꽃바구니를 드리였어요.

어버이수령님, 수령님께서는 조국을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저의 남편에게 공민의 최고영예인 공화국영웅칭호를 안겨주시고 저희들에게는 40년이 되여오는 오늘까지 매달 생활보조금을 보내주시며 크나큰 사랑과 배려를 안겨주시였습니다.

그 은정속에 훌륭하게 자란 자식들을 수령님앞에 내세우고싶어 이제껏 미루어오다나니 오늘에야 왔습니다. 수령님, 저희들의 큰절을 받아주십시오.》

저는 목이 메여 겨우 이렇게 말씀드리며 자식들과 함께 큰절을 드리였어요. 정말 이렇게 백번천번 감사의 절을 드리고 이 목숨을 다 바친다 한들 그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를 다하랴만 수령님께서는 갈린 음성으로 됐다고 하시며 굳이 만류하시였어요. 그러시면서 《안동수는 싸움도 잘하고 일도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웅이 되였습니다. 안동수는 죽으면서 우리에게 가족을 부탁하였습니다. 안동수영웅의 아들딸들을 우리가 도와주는것은 응당한 일입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어요.

수령님께서는 저희들과 자리를 같이하시면서 《나는 부인이 용하고 고맙게 생각됩니다. 방금전에 말했지만 안동수의 아들딸들을 우리 국가에서 도와주는것은 응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맡아키우는 사람이 없으면 도와줄수도 없습니다. 부인이 다른데 시집도 가지 않고 아들딸들을 다 이렇게 끌끌하게 키워낸것이 고마운것입니다.

부인이 아들딸들을 맡아 잘 키워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거지가 되였을것입니다. 내가 부인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시였어요.

전 그만 참고참아오던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어요. 당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였으면 처음 만나시는 자리에서 이 평범한 촌녀자에게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였겠어요.

당신을 잃은 후엔 아무리 생활이 어려웠어도 그리고 그 어떤 외로움속에서도 눈물을 모르던 저였어요. 하지만 이 순간만은… 참아낼수가 없었어요.

수령님께서는 자꾸만 어깨를 들먹이는 저를 이윽토록 보시다가 자식들을 둘러보시며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이런 어머니는 흔치 않다고, 이역땅에서 오랜 세월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온다는것이 헐치 않은 일이라고 하시였어요.

수령님께서는 다시 저에게 눈길을 돌리시며 앞에 놓인 자그마한 곽뚜껑을 여시였어요.

《이것은 나의 이름이 새겨진 금손목시계요. 이것은 훈장대신에 주는것이요.》

수령님께서는 환히 웃으시며 저의 손목에 직접 시계를 채워주시였어요. 세상에 사랑이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은정이면 이보다 더 뜨거운 은정이 어디에 있겠어요.

행복의 절정에서 눈물만 흘리고있는데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존함이 새겨진 금시계를 우리 아들딸들에게 다 채워주시고 사위, 며느리, 손자들에게도 귀중한 선물을 안겨주시였어요.

이때 우리 아들이 일어서서 《우리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 살고있어도 수령님께서 보살펴주시여 대학까지 나오고 당당하게 가슴펴고 살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이렇게 크나큰 사랑을 안겨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 사랑과 배려에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 격정에 넘쳐 말씀올렸어요.

그를 미덥게 바라보시던 수령님께서는 저에게 아들의 이름이 뭔가고 물으시였어요.

제가 《안 윅또르입니다.》라고 말씀올리자 수령님께서는 《윅또르라-》하시며 다시금 조용히 뇌이시였어요.

전 그만 송구스러웠어요. 수령님께서는 당신에게도 그처럼 좋은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았어요. 조선의 넋을 지니고 살라고, 조국을 지키는 투사가 되라고 말이예요. 당신은 정말 그 이름처럼 살았지요. 하지만 자식들의 이름들엔 아직도 나라잃었던, 식민지노예였던 흔적이 비껴있는것이예요.

수령님께서는 우리를 둘러보시며 조선이름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물으시였어요.

《쏘련에 가서는 윅또르라고 불러도 되지만 안동수의 아들이 조선에 와서까지 윅또르라고 하면 되겠소?》

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일어났어요. 친정아버지에게처럼 무랍없이 소청을 드렸어요.

수령님, 수령님께서 제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시면 오늘부터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저의 소청을 웃으시며 받아들이시였어요. 《그럼 이름을 하나 지읍시다.》하시고는 잠시 생각을 더듬으시다가 《우리가 오늘 묘향산에서 만났으니 안향산이라고 지읍시다. 어떻습니까?》하며 우리들의 의향을 물으시였어요.

우리는 일시에 환성을 올렸어요.

《좋습니다!》

《이름이 마음에 듭니다.》

저저마다 환성을 올리며 감사의 말씀을 올렸어요.

수령님께서는 기쁨에 겨워 어쩔줄 몰라하는 우리를 웃으시며 바라보시다가 《향산이라는 이름이 괜찮습니다. 제일 유명한 묘향산에서 만났다는 의미로 안향산이라고 부릅시다.》라고 하시였어요.

《다음해부터는 안향산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하라구. 나는 안향산이를 아들처럼 생각해.》

향산이는 너무도 감격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수령님을 우러르며 《아버지!》 하고 목메여 웨치고는 아무말도 못했지요.

수령님께서는 향산에게 앉으라고 손을 흔들어주시고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안동수영웅은 조국애가 높고 조국을 위해 한몫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강한 사람이였습니다.》라고 또다시 뜨겁게 추억하시였어요.

《언제인가 한사람이 나에게 와서 안동수가 복고주의를 퍼뜨리면서 군인들의 정신상태를 흐려놓고있다고 큰일난듯이 말한적이 있었습니다. 당장 검열을 하고 목을 잡아떼자는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검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안동수를 믿고있었기때문에 검열을 하면 그 사람도 안동수에 대해 똑똑히 알수 있게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검열을 하고보니 그는 우리의 뜻대로 군인들에 대한 교양을 잘하고있었습니다. 결국 문제시되였던 건국실은 전군적인 시범방식상학장소로 되였고 안동수동무네 려단은 전군의 본보기단위로 되였습니다.

이렇게 안동수동무는 자기 수령을 받들줄 알았고 군인들을 자기 인민, 자기 조국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사상으로 잘 교양하였습니다.

그가 좀더 살았으면 일을 많이 할수 있었는데…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습니다. 애국심이 높고 글도 잘 쓰고 군인들속에서 신망이 높았댔는데… 그가 다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마저 해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당신에 대하여 정말 많은 말씀을 하시였어요.

그래서 저도 당신이 여기 조국땅에 나와 한 일들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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