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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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 투사들과 함께 백두산에 다녀오신지 꼭 반년이 지나갔다.

이날 류다른 고요가 깃든 당중앙위원회 뜨락에는 온종일 무거운 진눈까비가 내렸다. 이해에는 정월초하루부터 주먹같은 햇눈이 푸슬푸슬 내리기 시작했는데 열흘쯤 지나서는 맥이 진해버렸는지, 아니면 아직도 멀리 있는 봄의 입김을 먼저 쐬운것인지 송이도 퍽 작아지고 축축한 물기까지 흠씬 배였다. 눈이 내리는 하늘에 이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무렵 정문보초소쪽에서 진눈까비를 푹 뒤집어쓴 승용차 한대가 급속으로 미끄러져들어오더니 현관앞에서 급정거를 하였다. 그 서슬에 정문에서부터 현관까지 두줄기바퀴자리가 쫙 패였다. 운전사좌석쪽의 문이 벌컥 열리였다. 차문을 후려닫는 소리가 울리더니 김정일동지께서 현관계단을 향해 급히 달려올라오시였다.

어디서 오시는 길인지 외투도 없이 검회색의 닫긴깃양복만 입으시였는데 어깨우에 추덕추덕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맨손으로 털어던지며 현관채양밑으로 급히 올라서신다. 그 찰나 현관문 한쪽이 지끗 열리면서 보위색군복외투에 소성 세알을 단 상고머리 하나가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마중나온 상고머리가 최현의 부관임을 알아보시자 늘 하시던 인사말조차 간략해버리고 다급히 물으시였다.

《최현동지가 어떻게 되였다구요?》

《저… 회의도중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만… 방금 군의국장동지가 보위성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 아바이는 마지막까지 회의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걸 수령님께서 꾸짖다싶이 해서 떠밀어보내셨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뜨거운 숨을 훅 내쉬시였다. 축축한 눈판을 핥으며 불어온 싸늘한 바람이 이따금 현관채양밑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오히려 양복저고리의 웃단추 두개를 더 열어놓으시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소? 내 점심전에 급한 일이 있어 기록영화촬영소에 나가면서 중간휴식때마다 최현동지의 혈압도 재보고 약도 드리라고 담당간호원한테 그만큼 신신당부했는데…》

《오후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두 아바이의 건강상태는 그만하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최광동지가 리철봉이라는 유자녀에게 무슨 감투를 씌워 제대시켰다는 토론을 듣다가 그렇게 되였다고 합니다. …》

《리-철-봉?》

부관의 입에서 튀여나온 낯익은 이름자를 한자한자 곱씹으시는 그이의 존안에 한가닥 섬광이 연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득한 추억…

해방산기슭의 저택에 놓여있던 오또기, 깜찍한 눈이 꼭 박힌 머리를 툭 치면 갸우뚱거리는 몸통에서 차락차락 울리던 짤락돈소리…

《어머니, 오또기속에 있던 돈이 없어졌어요.》

《없어진게 아니라 어머니가 꼭 쓸데가 있어서 먼저 써버렸구나.》

《그래요? 야, 50전씩이나 모았댔는데…》

《그런데 그 돈은 다 어디서 났니?》

《명화큰어머니랑 우리 집에 왔던 투사어머니들이 과자사먹으라고 준 돈두 있구 내가 다 쓴 공책을 수매해서 모은것두 있구… 야참, 조금만 더 모으면…》

《조금 더 모아선 뭘하자구 했댔니?》

《그건… 비밀이예요.》

김정일동지께서는 리철봉이라는 이름과 함께 불쑥 떠올랐던 가슴쓰린 추억을 털어버리시고 풀어놓았던 옷단추를 다시 채우며 3층 한끝의 회의실창문을 올려다보시였다. 17시가 채 못되였지만 하늘이 흐릿해서인지 벌써 불이 켜졌다.

《회의는 어떻게 되여가고있소?》

죄라도 지은듯이 어깨를 움츠리고있던 부관은 그제서야 허리를 곧추 펴며 대답하였다.

《이제는 거의 끝나가는것 같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시다가 돌아서시였다.

《그런데 동무는 왜 아직 여기에 있소? 최현동지를 따라가지 않고?》

《저…》

부관은 두손을 썩썩 맞부비며 머뭇거리다가 밀랍처럼 해쓱한 얼굴을 쑥 쳐들었다.

《부장동지는 담가에 누워 차에 오르면서 저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야 성식아, 너라도 여기 남아라. 내대신 수령님곁에 뻗치고있다가 청년장군께서 오시면 바싹 따라댕겨라. 알아들었니? 내 대신이다, 응?

스물대여섯살밖에 나보이지 않는 젊은 부관이 아바이의 억양과 어투까지 본따가지고 《대신》이라는 말을 곱씹는 바람에 그이께서는 자신앞에 두손을 맞잡고 어줍게 선것이 허리꼿꼿한 상위가 아니라 어깨가 구부정하고 귀밑머리가 희끗거리는 백전로장 최현의 모습인것만 같아 눈굽이 찌릇해나시였다.

아바이두 참. … 병원으로 실려가면서까지 그런 말을 하다니. …

회의실창문쪽에서 좌르르 박수소리가 터졌다.

회의가 끝났음을 느끼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손목시계를 얼핏 들여다보고나서 최현의 부관에게 말씀하시였다.

《동문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보시오.》

부관의 등을 떠밀어보내신 그이께서는 급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시였다. 최현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질 지경으로 분격했으니 그 토론을 함께 들으셨을 수령님의 심중은 또 얼마나 아프고 쓰리시였겠는가.

김정일동지께서는 지긋한 동통이 마쳐오는듯싶은 가슴을 진정하시느라 2층복도 한중간에 멈춰서시였다가 잠시후에야 수령님의 집무실앞에 이르시였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수령님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기신듯 창턱에 놓인 화분앞에 주전자를 들고 서계시였다.

사기주전자의 물이 다 떨어진것인지, 아니면 화분에 물을 주던것을 잊어버리셨는지 수령님께서 들고계시는 주전자의 뾰족한 주둥이에서는 물방울 하나가 위태롭게 맺혀 떨어질듯말듯 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설이 지난 후로 별스레 수척해지신 수령님의 존안을 차마 마주 뵈올수가 없어 시선을 푹 떨구시였다.

1969년…

이제 3년만 지나면 어느덧 탄생 60돐을 맞으시는 수령님이시다.

일곱해전에 수술을 받으신 후로는 조금만 한자리에 앉아계시여도 허리에 두주먹을 고이는것이 습관처럼 굳어지신 수령님께서 그런 불편한 몸으로 근 열흘동안이나 인민군당 제4기 제4차전원회의 확대회의를 지도하시느라 무리하신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회의뒤끝에 어차피 내리지 않으면 안될 심각한 결정들이 수령님의 심신을 괴롭히고있을것이다.

수령님께서는 연한 흙빛의 토기화분에 소담하게 자란 제라니움꽃을 유심히 들여다보시다가 꽃대의 밑줄기쪽에 손을 가져가시였다. 노랗게 황이 들어 고실고실 말라붙은 떡잎을 주무르시는 수령님의 손이 알릴듯말듯 가볍게 떨리였다.

《꽃을 가꾸려면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필요없는 떡잎은 뜯어내기도 해야지. 그런데 이건 떡잎이 아니라 사람이거던.》

김정일동지께서는 화분이 놓인 창가로 천천히 다가서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제서야 자신의 방에 아까부터 김정일동지께서 들어와계셨다는것을 의식하신듯 근엄한 안색으로 돌아서시였다.

《이 화분에 비유해 말할것 같으면 품을 들여 잔손질을 해야 할 원예사들이 제구실을 못했소. 총정치국에 숱한 일군들이 앉아있으면서 김창봉이같은 군벌관료주의자가 나타나도록 왜 바른소리 한마디 못했나? 상급이 돼서 어쩔수 없었는가? 털어놓고말해서 투쟁하자고 했다면 직급이 모자랐겠소? 교훈은 군대안에 아무리 당조직이 있고 총정치국이 시퍼렇게 간판을 걸고 앉아있어도 그게 다 제구실을 못하고 무맥하면 군벌관료주의와 같은 잡초가 머릴 쳐들수 있다는거요. 늘 말하지만 기구가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하는거지.》

집무탁쪽에서 전화종소리가 가볍게 울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손끝에 잡아쥐였던 떡잎을 끝내 뜯지 못하신채 집무탁으로 다가가 종소리가 울린 송수화기를 들어올리시였다.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지 목갈린 석쉼한 소리가 도간도간 들려온다. 《최현》, 《구급대책》, 《군의들》이라는 낱말들이 들리는것으로 미루어 민족보위성병원에서 걸어온 전화인것 같았다.

《최현이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자마자 또 오겠다고 해? 됐소, 회의는 일단 끝났으니 안정을 잘하라고 하오. 마음이 안 놓인다고 한다? 허허… 뭐이 마음 못놀게 있나? 내 하두 격분해서 책상을 몇번 두드리긴 했지만 큰 문젠 없소. 20년가까이 남의 나라 땅에서 싸울 때두 별일 없었는데 지금이야 우리한테 당이 없나? 국가가 없나? 삐뚤어진건 바로잡으면 되는거지. 기껏 삐뚤어졌대야 8월종파때처럼 의식적으로 모다붙어 작당을 한것두 아니고 군대에서 제일 큰 별을 단 량반이 떽떽거리니까 대가 약한 사람들이 좀 맹종맹동하구 더러는 큰 간부가 하는 말이니까 저게 다 김일성 뜻인게다 해서 그대루 집행한건데… 무슨 반민생단투쟁때처럼 어마어마하게 생각하지 말구 푹 쉬라고 전하오. 동무 정말 이번에두 최현이를 병원에 붙들어두지 못하면 그동안 쌓인 죄목까지 다 합쳐서 아예 군의국장자리에서 떼겠소. 나한테 그런 권한이 있는걸 알지?》

방금전까지 그토록 침통해하시던 수령님께서 군의국장에게 부러 으름장을 놓으시며 스스럼없는 롱담까지 하시자 김정일동지의 가슴은 저릿하게 아파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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