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회)
서 장
백두산우뢰
(4)
그이께서는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인민군대안에서 나타나고있는 일부 지휘관들의 군벌관료주의적인 관행들을 예리하게 주시하여오시였고 그때마다 격해지는 마음을 가까스로 눌러오시였다.
민족보위상의 경우만 하여도 그가 비록 어려서 산림대를 따라다니기는 하였으나 일찌기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혁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다. 산림대시절의 거칠고 조폭한 성미로 하여 여러차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총명한 두뇌와 무관다운 기질을 중히 여겨 나라의 무력을 총괄하는 높은 직위를 뚝 떼맡기시였다. 물론 어버이수령님께서
그의 행태를 전혀 모르고계시는것은 아니였다. 누구보다 잘 알고계시였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깊이 알고계시였다.
몇해전에 인민군당위원회 검열위원장을 하던 리봉수동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김창봉이 그의 령전에 조문도 가지 않고 어느
호수가에서 낚시질을 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너무도 억이 막혀 한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시였다.
리봉수는 김창봉의 옛 상관으로서 빨찌산시절 그를 등에 업다싶이하고 다닌 로병이였으며 오랜 기간 후방밀영병원의 원장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전우들을
사경에서 구원해준 성실한 일군이였다. 그런 관계는 다 불문에 붙인다 해도 민족보위상이라는 사람이 인민군당위원회 검열위원장의
장의식에 조문조차 가지 않고 낚시터에서 건들거리다니?!
투사들모두가 격분하였고 인간의 도리도 모르는 그런자를 당장 철직시켜버리자고 제기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창봉을 집무실에 조용히 불러 엄하게 비판하시고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동지적인 충고를 주시였다. 본인도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였고
수령님앞에서 잘못을 빌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민족보위성 책임일군들의 조상학이 있었다.
이 조상학을 지도하던 김창봉이 오백룡을 세계지도앞에 세워놓고 노르망디와 꾸르스크를 짚어보라고 하였는데 《곰》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성미가
울뚝한 로투사가 그런 모욕을 참을리 없었다. 어제날의 지휘관앞에서 외국군사대학의 류학학력을 뽐내보려는 그의 교만에 분기가 치솟은 투사는 손에
들었던 지시봉을 뚝 꺾어던지며 《우리는 꾸르스크나 노르망디를 모르고도 일본놈들을 쳤고 조국해방전쟁에서도 이겼다!》고 벼락같이 웨치고는 그길로 수령님을
찾아왔다. 바로 그 자리에 김정일동지께서도 함께 계시였다.
오백룡이 돌덩이같은 주먹으로 군복앞가슴을 꽝꽝 두드리며 《수령님! 저를 왜 대학공부시켜주시지 않았습니까?!》하고
울분을 터뜨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백룡이, 미안하오. 해방후에도 그래, 전쟁때도 그래 어려울 때마다 동무를 곁에 끼고
내놓지 못한 내 잘못이 크오.》하고 갈린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 너무도 괴로와하시자 오백룡은 눈물을 가득 머금고 《수령님, 제가 왜
수령님의 그 믿음을 모르겠습니까. 나는 대학졸업증이 없어도 수령님슬하에서 싸워온걸 더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하도 격분하다보니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그때 김정일동지께서는 당장이라도 민족보위상을 찾아가 당신이 백두산물을 먹은 투사가
옳은가, 당장 오백룡동지앞에 무릎꿇고 용서를 빌라고 추상같이 단죄하고싶으시였다. 그러나 그날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화로
민족보위상을 찾아 혁명선배들을 조롱하고 교만하게 행동한 그의 잘못을 차근차근 일깨워주시였다. 그이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께서 얼마나 세찬 격분과 분노를 자제하고계시는가를 력력히 느끼시였다.
그러면서 수령님의 하해같은 도량에 대하여 다시한번 절감하시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도 《민생단》루명을 쓴 어떤 유격대원에게 총탄이 만장약된 권총을 주어 적후에 파견하셨던 수령님이시다.
그가 제발로 돌아왔을 때는 다시, 또다시 세번이나 적후에 보내셨고 세번 다 돌아왔을 때에는 보라, 이 사람이 적편에 넘어가려고 했다면 벌써
도망쳤을것이다. 당신들 말대로 이 사람이 사령관을 어째보려고 했다면 내가 만장탄된 권총을 주었을 때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동무는 적들에게 잡혀죽을수도 있는 사지판에 고스란히 갔다왔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민생단》이겠는가고 보증하시였다.
혁명전우들에 대한 우리 수령님의 믿음은 이처럼 목숨까지 내건 진짜배기믿음이였다. 그것은 일찌기 동지를 위해 죽을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동지를 얻을수 있다는 김형직선생님의 유언에서 뿌리내렸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갈수 있는
만주벌판에서 끝까지 자신을 따라온 열혈의 동지들과 생사를 같이하며 수령님의 가슴속에 좌우명으로
굳어진 믿음의 철학이였다.
적이 아닌 이상 누구나 진심으로 일깨워주고 믿음을 주면 참다운 혁명가가 된다! 믿음은 충신을 낳고 의심은 배신을 낳는다!
수령님의 이 좌우명, 한번 믿음을 준 혁명동지를 끝까지 믿고 끝까지 함께 가시려는 그 의지를 너무나 잘 알고계시기에
그이께서도 지금껏 김창봉을 위시한 군벌관료주의자들의 행태를 인내성있게 지켜보아오시였다.
그러나 얼마전 민족보위상이 《푸에블로》호사건과 관련한 적들의 도발을 짓부실 만단의 준비를 갖출 대신 온천가까이에 지은 별장에서 안일한
생활을 하다못해 21군단의 해안포들을 후방에 끌어들이라는 지시까지 내려보냈다는것을 알게 되신 그이께서는 지체없이 이
사실을 어버이수령님께 보고드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집무탁을 주먹으로 내리치시며 그것이
사실인가, 그가 그렇게까지 타락했단 말인가고 믿을수가 없으신듯 몇번이나 뇌이시였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수령님께서는 무거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김창봉이 내가 내놓은 〈일당백〉구호를 놓구 큰 나라 사람들이 웃을수 있다거니, 〈자위〉라는 말을 쓰면 군사원조를 받지 못하게 된다거니 할
때도 나는 그 사람이 아직 설익어서 그런다고 너그럽게 생각했소. 최고사령관의 승인도 받지 않고 가는 곳마다 도적별장들을
짓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몇번 불러다가 뜨끔하게 비판을 하면 고칠것이라고 믿었소. 그러나 이번 일은 용서 못하오. 제국주의자들이 국가와 인민의
생사존망을 위협하고있는데 온탕에 들이배겨 풍덩거리다니! 이건 반혁명이고 반당이야! 나를 배반하는것은 참을수 있어도 조국과 인민을 배신하는것은
용서 못해!》
그날부터 김정일동지의 가슴속에는 수령님의 그렇듯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배반한 너절한 인간추물에 대한 격분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사색이 응어리지기 시작하시였다.
배신이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반당과 반혁명이란 무엇으로부터 뿌리내리는것인가?
수령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배신은 참을수 있어도 조국과 인민에 대한 배신은 참을수 없다고
하셨지만 바로 조국과 인민에 대한 배신이야말로 수령에 대한 배은망덕으로부터 시작되는것이 아닌가?!
김정일동지께서는 김창봉과 같은 군벌관료주의자들의 변질도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수령에 대한 의리와 도덕을 저버린데서 시작되였다고 보시였다.
언제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 어느한 인민군부대를 찾으시여 민족보위상을 부르시였을 때 김창봉은 자기가 다른 부대에 조직한
시범상학을 핑게대고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총참모부관하 어느한 부대의 지휘관의 말에 의하면 양덕에 지어놓은 그의 별장에는 최신형의 외국산
의료기구들까지 갖추어놓았다고 한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종종 호위성원도 없이 공장과 농촌을 찾으시지만 김창봉은 아래단위에 내려갈 때마다 앞뒤로 호위차들을
요란하게 세우고 하루전부터 주둔구분대 군인들로 경무근무를 조직하여 도로들까지 차단한다고 한다.
수령앞에 교만한자들은 수령이 령도하는 당의 권위를 자기의 권한과 대치시키려고 하며 나아가서는
수령이 내놓은 당정책도 제멋대로 집행하거나 그 관철을 부정하게 되는것이다.
배신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고 이렇게 자라난다!
문득 지난해에 혜산시내에 새로 일떠세운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의 군상이 삼삼히 떠오르시였다.
포연서린 백포자락을 날리며 그리운 조국땅에 력사의 자욱을 찍으신 어버이수령님과 그이를
옹위하여 따라선 빨찌산대원들…
그 열혈의 대오에 희생된 사람 몇이고 돌아온 사람 몇이며 남은 사람은 몇인가. 그들이 죽고 쓰러지고 찢기고 터지며 살아남은 전우들과
후대들에게 한결같이 부탁하고간 당부는 무엇이였던가.
《수령님을 모시고 끝까지!》
몇해전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의 도안들이 올라왔을 때 그이께서는 우리 혁명의 영원한 종자와도 같은 이 웨침을 기념탑의
기본주제로 정해야 한다고 보시였다. 그러나 우리 당내에 기여든 반당수정주의자들은 이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고 음으로양으로 방해해나섰다.
이미전부터 큰 나라의 수정주의적인 궤변에 동조하여 평화바람, 날라리바람에 물젖은자들, 혁명도 계급투쟁도 다 포기해버린자들의 쏠라닥질은
오래동안 은페되여있었으나 《유일》이라는 엄정한 시금석앞에서만은 저들의 본색을 낱낱이 드러내놓고야말았다.
바로 1년전, 력사적인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에서는 더러운 정치적야심과 음모로 우리 혁명에 막대한 해독을 끼친 박금철,
김도만, 고혁과 같은 반당분자들을 단호히 숙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