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서 장

백두산우뢰

(2)

 

김정일동지께서는 논두렁같이 두두룩하게 솟아오른 길에 먼저 올라서서 김철호와 김명화, 도인민위원장과 도당책임비서를 차례로 손잡아 끌어올리고나서야 방금전에 하던 말씀을 계속 이으시였다.

《…아마 종파분자들의 여독이 여기까지 흘러들었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그때 여기 량강도의 일부 책임일군들은 우리가 방학기간을 리용해서 백두산혁명전적지답사를 왔다고 하니 어린 학생들이 한창 배울 나이에 묘향산이나 금강산같은데 갈것이지 이런 산골에는 무슨 구경거리가 있어서 찾아왔는가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도당에 앉아있었으니 혁명전적지를 보존관리하는 사업이야 더 말해 뭘하겠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저마끔 깊은 생각에 잠긴 일군들을 한동안 바라보시다가 힘있는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새벽에 여기로 떠나면서도 이야기했지만 량강도안의 모든 사업은 혁명전적지들을 더 잘 꾸리고 보존관리하며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널리 선전하기 위한 사업에 집중되여야 합니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도당책임비서동지나 인민위원장아바이는 이 백두산일대를 손금보듯 해야 합니다.》

두 일군이 그이의 말씀을 되새겨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있는데 오른쪽풀덤불속에서 갑자기 와사삭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육중한 산짐승이 잡관목을 헤치고 돌진하는듯한 소리였다.

일군들은 바싹 긴장해지고 산생활에 어지간히 미립이 텄다는 녀투사들도 김정일동지의 가까이로 화닥닥 다가서며 당황한 눈길로 덤불쪽을 훑어보았다.

가늘게 두눈을 쪼프린 도인민위원장이 《무두봉에 범이 있다더니 혹시…》하고 말끝을 가무리자 책임비서(당시)는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는듯 그를 흘겨보면서도 김정일동지께서 쥐고계시는 지팽이에 온 정신이 쏠리였다.

정작 범이 나타난다고 하면 당장 손에 쥘만한것은 그 지팽이 하나뿐이고 귀하신분을 한몸으로 막아나서야 할 사람들이래야 예순고개의 녀인들과 강대처럼 바싹 마른 인민위원장뿐이다. 나이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도당책임비서는 어떻게 하나 그것을 제 손에 탈아쥐고 맞받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굴뚝같은 마음을 도슬러보았댔자 그이께서는 종시 지팽이를 넘겨주실 작정이 아니시였다. 어찌보면 호랑이와 겨루어볼만한 기운과 담력도 그이밖에 있을것 같지 않았다.

도당책임비서는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주먹땀만 흘리게 되였다.

한편 김정일동지께서는 난데없는 기척에 바싹 귀를 기울이시다가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시였다. 아무리 사납고 용맹한 범도 목표물에 접근할 때는 보통 조심하지 않는 법이라 우선 저렇게 덤벙거리며 돌진할수가 없다.

기껏 메돼지가 아니면 큼직한 노루가 뛰여드는것이라고 짐작하셨는데 키높이 자란 새초가 무대막처럼 젖혀지더니 뜻밖에도 하얀 장령복을 목단추까지 꼭 채워입은 단단한 체구가 튀여나왔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놀랍기도 하고 무등 반갑기도 하여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마중하여나가시였다.

《무두봉의 범구경을 하는가 했더니 리오송동지였구만요!》

그이께 매달리다싶이 하고 속이 한줌만해있던 김철호도 새초밭에서 땅크처럼 굴러나오는 리오송을 향해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아니, 덕흥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어요?》

리오송이 부사령관으로 사업하고있는 47군단이 덕흥에 주둔하고있어 김철호는 그를 만날 때마다 늘 덕흥사람이라고 부른다. 리오송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김정일동지께 인사부터 올리고 김철호쪽에 눈길을 돌리였다.

《말도 마십시오. 최현동지가 로친걱정을 어떻게나 하는지 어제밤 우리 부대에 전화가 두번이나 왔댔수다.》

김철호는 리오송의 퉁명스러운 말을 듣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감싸쥐며 사내들처럼 걸싸게 웃어제꼈다.

《그 령감이 그런 전화를 다 할줄 알면! 바른대로 말하라요, 우리가 여기 오는걸 어떻게 알았어요?》

턱밑에 고인 땀을 손등으로 뻑 씻고난 리오송은 철호의 뎅그래진 눈을 시물시물 웃으며 마주보았다.

《최현동지가 로친걱정을 했다는건 해본 소리고… 하지만 나한테 전화가 온건 사실입니다. 청년장군이 백두산쪽으로 가니 오송이 네가 직접 호위를 조직하구 길안내두 해드려라. 빨찌산출신들중에선 네가 백두산에서 그중 가까운 부대에 있길래 부탁하는 말이다. 아, 이러면서 뭐, 이건 부탁이기두 하구 명령이기두 하다나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멀지 않은 곳에서 애티나는 중위와 수염터가 꺼먼 상사 한명 그리고 날파람있어보이는 군인 두엇이 자동보총을 메고 다가왔다. 리오송이 달고온 호위병들이 분명하였다. 땀에 흠뻑 젖은 군복어깨에는 해묵은 이깔나무이파리들이 듬성듬성 달라붙었다. 아까부터 이런 무인지경에서 정말로 산짐승이라도 맞다들리면 어쩌나 하고 은근한 걱정을 하고있던 두 일군은 어깨에 총까지 멘 군인들이 나타나자 대번에 활기를 띠였다. 김철호의 심정도 그들과 다를바 없었으나 부러 언짢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리오송을 나무랐다.

《에그나, 그런 엄명을 받았으면 좀 빨리 올것이지. …》

《그러길래 이 리오송의 별명이 원래 지각대장이 아닙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너부죽하고 둥실한 얼굴에 능글능글한 웃음을 피워올리는 리오송을 정겹게 바라보시였다.

언제인가 어머님으로부터 리오송의 그 류다른 별칭에 깃든 사연을 듣던 기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시였다.

소년중대시절 리오송은 다른것은 몰라도 늄주전자와 법랑고뿌만은 늘 자기가 가지고다니다가 행군의 쉴참이면 수령님께 꼭 물을 끓여서 올리였다고 한다. 불의의 정황이 눈섭끝에서 떨어지던 유격대시절이라 행군도중 물이 다 끓을 때까지 휴식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모엿구령이 내리면 남들이 다 행전을 조이고 대렬에 설 때까지도 리오송은 우등불우에 걸어놓은 주전자곁에서 바재이다가 구대원들이 거듭 재촉을 해서야 채 끓지 못한 물을 쏟아버리고 아쉬운 얼굴로 구대원들을 따라서군 하였다.

그런 일이 몇번 반복되여 《지각대장》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였는데 해방이 되여서도 그 별칭은 리오송의 꽁무니에 늘 붙어다녔다. 빨찌산출신들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리다보니 장가를 들 때도 《지각대장》, 첫아이를 낳았을 때도 《지각대장》이 될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부름속에는 어제날의 소년중대 전사에 대한 투사들의 엇구수한 애정이 깃들어있었고 본인도 그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호랑이로 소문난 최현의 비위를 거슬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규군이 창건된지 한해가 지난 1949년도에 리오송이 어느한 통신구분대의 지휘관으로 배치받았을 때였다.

해방직후에 베잠뱅이바람으로 보안간부훈련소에 들어왔던 어수룩한 청년들까지도 중대장이며 련대참모며 하는 직무에 올라서던 때라 투사들속에서는 뒤늦게야 통신구분대장이 된 리오송을 두고 자연히 《지각대장》소리가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그 소리가 어떻게 38°선경비대에까지 흘러갔는지 어느날인가 민족보위성에 회의로 올라왔던 최현이 한밤중에 옛 전우들을 보위성숙소마당으로 불러냈다.

《오늘부터 리오송이보구 지각대장이니 뭐니 하는 싱거운 말들을 하지 말아야겠소.》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은 최현의 꾸중에 모두들 입이 얼어붙었지만 익살스럽기로 소문난 김자린이 《그거야 롱담인데…》 하고 변명삼아 한마디 했다가 범의 코수염을 건드려놓은 격이 되고말았다.

《우린 모두 롱질할 자격들이 없소!》

최현은 도끼로 찍듯이 김자린의 변명을 잘라버렸다. 평시에 말이 없고 과묵한 최현이였지만 그날은 몹시 흥분하여 일장 훈시를 하였다.

동무들, 생각해보라. 리오송이 늦게야 구분대지휘관이 된것이 나이탓인가, 아니면 그 동무의 준비정도탓인가. 장군님께서는 해방후에 리오송이도 동무들과 꼭같이 보안간부훈련소에 보내자고 하셨다. 그런데 훈련소에는 가지 않고 장군님의 운전사가 되겠다고 떼질을 했다. 이거야 동무들도 다 알지 않는가. 그때 우리 빨찌산출신들속에 차물계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조만식이가 있던 평안남도에서 뽑아보낸 사람을 운전사로 앉혀놓았댔지. 그때 리오송이가 사령관동지의 신변이 걱정되여 그런 어거지를 썼다. 그후에도 몇번이나 장군님께서 리오송이에게 새로운 직무를 주자고 하셨지만 그는 사령관동지곁을 못떠나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뻗치기를 했다. 이번에도 장군님께서 전쟁이 눈앞에 닥쳐왔는데 운전대가 중요한것이 아니라고 엄하게 꾸중을 하셔서야 차에서 내렸다고 한다. 오늘 병원에 입원해있는 김정숙동지에게 면회를 갔다가 들으니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리오송이를 보내놓으시고 며칠동안 잠도 못드셨다고 한다. 리오송이 해방직후에 운전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대대장이나 련대장이 되고도 남았겠는데 자신때문에 이제 겨우 중대장이 되였다고 몇번이나 뇌이셨다고 한다. 동무들, 그런 리오송이를 우리가 《지각대장》이라고 부르는걸 아시면 장군님께서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는가. 리오송이야말로 《지각대장》이 아니라 장군님을 모시고 받드는데서 우리모두가 따라서야 할 《선봉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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