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 회)
제 2 편
전쟁은 힘과 힘의 대결이다
제 3 장
2
(4)
안동수는 입술을 꾹 깨문채 묵묵히 그의 뒤모습을 쳐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긋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가슴속에도 커다란 연덩이가 들어앉은듯 무직해졌다.
저 참모장이 쏘도전쟁때 범했다는 과오가 가슴 한끝을 자꾸만 허비고든다.
정말 저 철교로 한강을 도하한다는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사단장이 과연 모험을 한단 말인가.
안동수는 큰숨을 깊이 들이켰다.
불쑥 아침에 송억만을 만났던 일이 떠오른다. 한강을 도하하지 못해 안타까와하던 그 모습이 별로 눈동자를 지져대는것같다.
신심에 넘쳐 강을 헤염쳐 건너가 거루배를 끌어오겠다던 정찰중대 일섭이네들도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그때 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받았던 감정이 또다시 불끈 솟구쳐올랐다.
그렇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명령받은 시간에 이 강을 건너야 할 길밖에 다른 길은 있을수 없다. 사단장은 옳게 결심했다. 그런데 내가 왜 자꾸 주저하군하는가. 참모장의 그 완강한 반대의견을 들었기때문에?… 그가 경험이 많은 실무가라고 해서?…
누구인가 얼굴에 모닥불을 콱 들씌운것처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아직 사단장동지를 닮자면 멀었구나.
안동수는 입술을 피나게 깨물며 두주먹을 움켜쥐였다. 씨엉씨엉 룡산역쪽으로 향했다.
룡산역을 비롯한 철교부근은 철교복구에 떨쳐나온 사람들로 와글와글 끓고있었다.
땅크발동기소리, 포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해주는 속에서 군인들과 서울시민들이 모래가마니며 모래마대며 침목들을 메고지고 뛰여다니고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공병들이 경사진 철교에 침목을 촘촘히 박고있었다.
어기영치기영 목도질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쓰는 소리, 모래가마니를 멜빵으로 져나르는 사람들의 높은 숨소리, 침목을 멘 사람들이 바삐 드달리는 발자국소리, 군대들, 사민들, 청년들, 처녀들, 학생들…
문득 이들속에 그 림남식이와 그의 삼촌도 들어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안동수는 불시에 가슴이 훈훈해지는것을 느꼈다.
강기슭에서는 땅크 열두대가 와릉와르릉 오르내리며 적진에 쾅쾅 포사격을 들이대고있었다. 적들이 이쪽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하려는것이였다.
안동수는 침목을 나르는 사람들속에 끼여들었다. 침목을 한대 어깨에 메니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안동수는 철교의 침목을 밟으며 강복판으로 향했다. 발밑에서는 검푸른 강물이 흘러가면서 어지럼증을 불러왔다. 자칫하면 강물에 떨어질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용케도 철교우를 뛰여다닌다. 보통때라면 이런 어둠속에서 철교우에 나설 엄두도 못내였을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분발시켰는가. 그것은 자기의 행복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자각일것이다. 의지일것이다.
철교가 끊어져내린 곳에까지 나가 공병들에게 침목을 넘겨준 안동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강건너편 적진쪽을 쏘아보았다. 우리의 포탄들이 맹렬히 튀며 화광을 펑끗펑끗 일으키는 적진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동수는 큰숨을 몰아쉬며 강기슭으로 향했다.
룡산역쪽에 이르니 류경수는 화차에 땅크싣는것을 지휘하고있었다. 호각을 불고 빨간 신호기를 휘두르며 연신 소리쳤다.
《자, 337호 맨앞으로 뽑으시오. 다음 312호…》
와릉와릉 땅크들이 상가대를 거쳐 화차우에 올라가 웅크리고앉았다.
《저 화차로 땅크를 싣고 철교 끊어진 곳까지 나가자는거요. 그러면 한꺼번에 다섯대를 뽑을수 있소. 철교가 끊어진 곳에서는 땅크가 제발로 내려가야지. 어떻소?》
안동수가 가까이 다가가자 류경수가 손수건을 꺼내여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거친 소리로 물었다.
안동수는 와릉와릉거리며 화차우에 올라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312호땅크를 쳐다보았다.
《적들은 우리가 철교로 도하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것입니다. 나도 처음엔 떨떨했댔는데… 정말 멋있는 작전같습니다.》
류경수가 여전히 땅크들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중얼거렸다.
《참모장동무가 신심을 못가진단 말이요. 부사단장동문 제꺽 리해하는데…》
《참모장동문 최대한 안전하게 도하하자는것이겠지요.》
안동수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한마디 하자 류경수가 흘깃 고개를 돌렸다.
《부사단장동무도 이걸 모험이라고 생각합니까?》
안동수는 잠시 대답을 안하고 화차우에 올라앉는 317호땅크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혼자소리처럼 말을 이었다.
《방금전까지도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댔는데… 와보니 신심이 생깁니다.…》
《그래요?》
《난 쏘련에 있을 때 교예를 구경한적이 있습니다. 제일 인상깊은것이 줄타기와 모터찌클을 타고 하는 재주였습니다.
2월달에 모터찌클련대에 가서 모터찌클을 타다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나도 한번 재주를 피워보았지요. 숱한 사람들이 보는줄도 모르구… 내 생각엔 꾀 할것같아 그래보았는데 웬걸… 허양 나가넘어지는 통에 큰 망신만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마트면 큰일이 날번 했지요.
하지만 그 교예사보고는 모험을 한다고 하지 않을거란 말입니다. 줄타기도 같지요. 줄타기나 모터찌클을 타고 그 위험한 동작들을 수행하지만 거기에 숙련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이 모험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같은 생둥이들은 모험이구 생명까지 잃을수 있지만…》
류경수는 생각깊은 눈길로 이윽토록 안동수를 쳐다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우리 땅크병들이… 저런 경사지는 극복 못해보지 않았습니까?》
안동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연구는 많이 했습니다. 저 337호 한계천동무도 리론적으로는… 알고있을것입니다. 문제는 배짱과 담력인데… 그걸 키워주는건 바로 우리 지휘관들 몫이지요.》
류경수사단장은 와락 안동수의 손을 잡았다.
《역시 부사단장동문 배짱이 맞습니다.》
안동수는 그제야 가슴이 후련해짐을 느끼며 빙긋이 웃었다.
《나야 동생이 아닙니까?》
《하하하.》
류경수는 주먹으로 안동수의 어깨를 탁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직은 날이 밝지 않은 어슬어슬한 새벽이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류경수는 30련대장을 불러 이렇게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