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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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름방학에 미순이는 고향에 갔다. 언제나 정답고 따뜻한 감정과 애틋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고향으로 1년만에 다시 와보는 미순이는 기차에서 내리자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걸어서 암적마을에 이르렀다.
한해동안에 고향은 적지 않게 달라졌다. 뜨락또르운전수들이 토지정리를 하여 커진 논배미마다에는 누런 벼들이 꽉 들어찼다.
림촌에서 시작하여 암적마을뒤까지 뻗어내려온 야산에 이전에는 풀들이 무성하고 옛무덤들이 있었으며 개인농시절에 부쳐먹던 뙈기밭들이 드문드문 널려있었다.
지금은 큰밭으로 개간되여 팔뚝같은 강냉이이삭들이 척 매달려 설레이였다. 농촌기계화의 초병들인 뜨락또르운전수들이 미순이가 공부하는 동안 많은 일을 해놓았다.
미순이는 고향마을에서도 천리마시대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미순이는 남자답게 듬직하고 마음이 넓은 후리후리한 최동익이며 해물해물 잘 웃던 귀엽게 생긴 창원이가 눈에 선히 떠올랐다.
지금 그들은 어떻게 하고있을가. 동익동무는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운전수, 진짜 일군이야!
동익이와 같이 조합에서 보낸 반년가까운 나날에는 추억할 이야기가 많았다. 동익은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일잘하는 진실한 청년으로 존경이 가고 마치 누이동생처럼 따르게 되는 오빠같았으나 멀리 떨어져있으면 이상하게 따뜻한 정으로 추억되는 그런 청년이였다.
추억속에 상상되는 그의 모습은 실물보다 훨씬 더 의젓하고 더 잘생기고 더 인정미 흐르는 모습이였다.
학교에 가있는 동안 미순의 눈앞에 떠오르는 모습은 바로 그 리상적으로 상상되는 동익의 모습이였다. 상상보다 현실이 언제나 우세한 법이여서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상상은 흐릿해져갔고 눈앞에 들이닥치는 현실적인것에 관심이 커지기마련이다.
집에 도착한 미순이는 딸이 왔다고 밭에서 일하다가 들어온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저녁에야 하루일을 끝내고 들어왔다.
외동딸을 일년만에 보는 부모들의 기쁨이 방안에 넘치였다.
미순이는 이모네가 보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옷가지들과 수건, 신발, 양말들을 전하였다. 이모가 백화점에서 산것들이였다.
아버지가 들어오기 전 오후에 본촌에 가서 관리
그리고 어머니가 지진 찰강냉이지짐과 두부를 넣은 명태탕을 먹으며 늦도록 시간을 보냈다. 미순이의 손풍금을 능숙하게 타는 솜씨에 동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던 이전의 미순이로 잠간 돌아가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때뿐이였다. 누구는 시집가고, 누구는 어떻고 어느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으며 올해 농사작황은 어떻다는 고향소식외에 더 할말이 없었다.
평양에 대해 묻는 말에는 이야기할것이 너무 벅차서 오히려 적게 대답했다. 부벽루의 아름다움이며 련광정과 평양종에 깃든 력사이야기를
고향처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미순이가 천리마
미순이는 리현협동조합의 작업반선동원 리신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혜영이가 있다면 훨씬 고향처녀들과의 상봉이 즐거웠을것이다.
《혜영이는 왜 보이지 않니?》하는 물음에 향옥이가 《그 애는 뜨락또르운전수양성소에 가있어.》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동익이한테서 운전기술을 배우다가 뜨락또르를 굴려먹고 동네를 뛰쳐나가 운전수양성소에 간 일화를 이야기했다.
《진짜 혜영이다운 행동을 했어. 혜영이는 발전할거야.》
미순이는 그 자리에 없는 혜영이가 더욱 그리웠다. 미순이는 자기와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서 점점 따분해졌다.
뜨락또르운전수들의 합숙에는 조합이 휴식을 하던 날 저녁 일찌기 찾아갔었다.
운전수들은 그새 가무스름하던 미순의 얼굴이 희맑아지고 군턱이 지기까지 한 변모된 모습과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세련된 말씨에 놀라면서 처녀를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달라지지 않은것은 활달한 성격이였다.
합숙에는 동익이와 그리고 덕준아바이와 같이 고압뽐프를 가지러 가다가
동익이의 어글어글한 눈이 미순이를 향해 있었다.
두사람이 눈길이 부딪쳤다. 동시에 두사람 다 크게 놀랐다.
동익은 《미순이가 이렇게 달라졌는가!》하는 놀라움이였고 미순이는 《이 동무가 과연 동익인가!》하는 놀라움이였다.
상상속에 뛰여들군 했던 동익이가 아니였던것이다, 현실에 있는 동익은 기계기름이 배고 볕에 탄 거무스름한 얼굴이 더 컴컴해진듯 했으며 머리카락이 헝클어져있었다. 하얀 남방샤쯔는 그 얼굴과 손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쩐지 아수하였고 동정이 갔다.
그러나 미순이는 인차
《동무들, 안녕하십니까.
왜 그렇게 쳐다보기만 해요. 내가 미순인줄 몰라요.》
그는 웃으며 무릎을 눕히고 앉았다.
《아니, 동무가 정말 미순이요?》
재식이가 이렇게 희한해하며 묻자 미순이는 이전처럼 까르르 웃었다.
한동안이 지나 서로 서먹서먹하던 감정이 없어지자 활달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미순이가 창원이는 왜 보이지 않는가고 물었다. 재식이가 몹쓸놈이라느니 농촌기술혁명의 도피자라느니 하고 욕했다.
하지만 동익이가 《아직 어리고 단련이 되지 못해 젖을 더 먹으려 엄마한테 갔겠지. 이제 좀더 크면 다시 올게요.》하고 롱을 섞어가며 두둔했다. 역시 동익은 속이 넓은 청년이였다.
동익을 다시 쳐다보는 미순이는 그와 눈길이 마주친 첫순간에 느꼈던 놀라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미순이는 운전수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동익이에 대해 생각했고 지어 평양의 철수라고 하는 지식인청년과 대비해 보기도 했다.
사실 동익은 조금도 달라진것이 없었으며 예전그대로였다. 다른 운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것은 그들을 보는 미순이의 눈이였다. 그런데 그 달라진 눈에 비낀 뜨락또르운전수들과 고향사람들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미순이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우리 농촌사람들은 언제면 일이 끝난 저녁이나 일요일에 좋은 외출복을 입고 극장이나 영화관에 다니며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대동강유보도 같은데서 춤을 추며 즐기게 될가?
미순이는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운전수들과 헤여졌으나 속으로는 울적한 심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빨리 평양으로 돌아가고싶었다.
미순이는 혜영이도 없고 이야기할 상대도 없어 이전처럼 정을 느끼지 못하는 암적마을에 더 있고싶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와 뜻밖의 심각한 대화가 있은 후에 더욱 조급해졌다.
어느날 저녁 아버지는 시간을 내여 딸과 마주앉았다. 담배를 뻐끔뻐끔 빨며 한동안이 지나자 아버지가 이렇게 물었다.
《미순아, 동네사람들이 모두 네가 때를 쭉 벗었다고 하면서 부러워하더라. 네가 평양에서 지내며 많이 달라진건 사실이다.
나도 네 어머니도 기뻐한다. 딸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그래, 그렇다고 해서 네가 눈이 높아지고 생각이 달라져가지고 마을사람들을 우습게 보는건 아니겠지? 농사일을 천시하는건 아니겠지?》
영준반장은 딸이 고향사람들을 잊지 않고 존경하도록 미리 신칙하는것이지 실지로 그렇게 변질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연한 향수내를 풍기며 해말쑥해진 딸을 보면서 그 어떤 불안감을 느끼고있었던것이다. 미순이는 웃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 이 딸을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해요.
나는 농사군인 아버지의 딸이고 농촌마을인 암적의 딸이예요.》
《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불쑥 물었다.
《너 뜨락또르운전수 동익이를 어떻게 보느냐?》
미순이는 호호 웃었다.
《어떻게 보긴요. 일잘하고 듬직한 청년이지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담배를 한모금 깊이 빨고 다시 묻는다.
《음, 그럼 네 마음에 든단 말이지?》
《그럼요. 동익동무는 믿음직한 오빠 같애요.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해요?》
마침내 미순이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심중해져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어험! 하고 마른기침을 하고나서 말했다.
《뭐 어물거릴것두 없지. 네가 방학왔던김에 그 사람과 언약을 맺었으면 해서 그런다. 나는 동익이가 마음에 든다.
그런 사위가 집에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니?
지금 마을의 딸가진 집들에서는 다 동익이를 사위삼으려 하고 체네들도 많이 따르는것 같더라.
네가 학교 가있는 동안 어느 체네가 동익이를 후려내면 랑패가 아니냐. 그래서 미리 언약을 맺자는거다.》
영준반장은 김덕준이가 자기 딸을 동익이한테 주려 한다는 말이 돌기때문에 이렇게 다급히 언약문제를 내놓았다.
미순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있다가 아버지가 재촉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한번도 없어요. 나는 공부를 해야 해요. 그 생각뿐이야요.
동익동무도 저를 다르게 대하지 않아요. 그 얘긴 그만 하자요.》
뜻밖의 문제에 부닥쳐 얼굴이 빨갛게 되고 가슴이 울렁이였으나 미순이는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강경하게 대답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여서 당황했으나 자기에게 전혀 당치않는 일로 여기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튿날 미순이는 방학을 다 놀지 않고 평양으로 올라가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