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2 장

25

 

창밖에 어둠이 깃들고 집무실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이 시간이면 집무실은 어느정도 조용하다.

책임부관으로부터 누구에게서 어떤 전화가 왔다던가, 누가 찾아왔다든가 하고 아뢰는 일도 뜸했다. 사색하기 좋은 시간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벽가의 의자에 앉으시여 한룡택을 생각하고계시였다.

해방후 쏘련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조선에서 수많은 정객들과 인사들이 그이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일성동지를 만나뵙고 통일과 민주, 애국의 뜻을 품고 떠나가기도 했으며 평양에 남아 인민정권이 펴는 정치와 새 조국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도 변함없이 일하고있다. 한룡택은 그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사업에서 내밀성이 있고 통솔력이 있다. 그리하여 규률이 없고 허풍이 많고 우유부단한 농업성을 추켜세울수 있으리라고 믿으시였다.

그이께서 전화상으로 한룡택에게 비판을 하시였지만 성안에 규률을 세우는 사업은 잘했다. 영농공정도 제기일내에 수행하도록 세차게 내밀었다.

그러나 동시에 관료주의적사업작풍이 심해졌다. 욕설, 지령, 좀처럼 떠나지 않으려 한 사무실, 사무실에서 울리는 전화소리, 누구를 추궁하는 소리…

반영자료에 의하면 한룡택은 새벽 1시나 2시경에 퇴근한다고 한다. 당시에 정해진 낮 1시부터 4시사이의 점심시간에 휴식을 충분히 한다고 해도 새날이 오는 깊은 밤에 퇴근하는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것이다.

그래도 한룡택은 과로를 이겨내며 일하고있다. 그런데 그에게 잠재해있던 사업작풍상의 결함이 행정사업을 하면서 머리를 다시 쳐드는것이 무엇때문이겠는가? 일이 잘 안되니까 욕설이 나가는것일가? 그럴수 있다. 농업성을 이끈다는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사회주의농촌경리에 대한 신심이 없고 특히는 기계화수준과 문화적락후성에 대한 허무감이 반발하여 좌경적으로 분출하는것일가? 아니면…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미전부터 현재의 농업지도체계의 불합리성이 가져온 사업상의 난관과 애로일수도 있다는것을 포착하고계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사색을 이어가시였다.

쏘련에서는 집단화이후의 총적목표를 모든 꼴호즈원들을 부유하게 만드는것, 즉 빈농도 중농도 모두 부유한 농민의 수준에 올려세우도록 하는것으로 정했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꼴호즈원들이 정직하게 일하며 농기계와 뜨락또르를 잘 리용하고 토지를 옳바로 경작하며 꼴호즈의 재산을 애호해야 한다는 과업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꼴호즈를 물질기술적으로 강화하는데 힘을 넣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가 협동경리에 대한 지도를 개선하고 농업지도기관들의 기구체계를 개편하는 문제같은것은 제기하지 않았다. 더우기 농민들의 사상개조사업은 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 아주 줴버리고말았다.

소위 농업리론가들은 물질적자극을 농촌경리발전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한룡택이 가본 쏘련꼴호즈의 형편이 그 꼴이 되였다.

일군들이 사업을 옳게 전개하자면 농업지도체계를 발전하는 현실에 맞게 따라세워야 할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집무실안을 거니시다가 송수화기를 드시였다.

《김만금부장을 찾소.… 만금동무요?

지금 나한테 오시오. 그저 오기만 하면 되오.》

인차 김만금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까이 오오.》

종이와 연필을 김만금에게 주시였다.

《여기다 농업성기구체계표를 그리시오.》

김만금은 의자에 앉아 긴 탁상우에 종이장을 펴놓고 상, 부상들, 국들, 이런식으로 선을 그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김일성동지께 완성된 기구체계표를 드리였다.

그이께서는 한동안 종이장에 그려진것을 들여다보시다가 말씀하시였다.

《내가 한룡택동무에게 농업상의 중임을 맡기면서도 말했지만 사회주의건설에서 농촌사업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사업의 하나요. 그것은 농촌의 사상, 기술, 문화의 락후성, 농민구성의 복잡성과 함께 농촌경리의 자연적, 계절적제약성과 관련되여있고 중요하게 농촌의 분산성과 관련되여있소.

농촌사업의 대상이 전국각지에 널려있는 농촌마을들이며 넓은 지역에 널려있는 전야이며 거기서 흩어져 일하고있는 농민들이요. 그러니 농업성에서 일보를 받고 지령을 떨구면 그것을 도와 군, 리에서 받아물고 집행하는 방법밖에 더 있겠소?

개인농시절이나 협동화의 초기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그 방법이 통했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농업협동조합들이 리범위로 확대된 대규모협동경리로 발전했고 기계수단들이 농촌에 들어갔소.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맞게 농업지도체계가 따라가야 하고 개편되여야 정상이 아니겠소? 이 기구를 가지고는…》

그이께서는 김만금이 그린 농업성의 기구체계표를 가리키시였다.

《어쩔수없이 관료주의, 형식주의가 나오게 된단 말이요.》

김만금은 자기들도 농업지도체계와 농업지도기관기구의 불합리성을 인식하지 못한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견해를 세울수 없었다고 말씀드리였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했든 우리 나라의 실정에 따라 군인민위원회의 농업지도기능으로부터 도, 중앙에 이르기까지 농업지도체계를 새로운 환경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는 결론을 지을수 있다고 보오.

피창린동무가 군인민위원회가 군의 농사를 책임지고 지도하는데서 난관과 제한성이 있다는것을 여러번 나한테 말했소.

우선 하부말단지도기관인 군인민위원회의 기구를 어떻게 개편하고 협동조합들을 실속있게 지도할수 있겠는가 하는것부터 연구해야 할것이요.

그래서 그것이 생활력을 나타내면 도와 농업성의 기구개편을 뒤따라 해야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지금의 조건에서도 결심하고 달라붙으면 사업에서 문건놀음과 관료주의를 적지 않게 극복할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농업성 일군들을 비판도 하고 기구체계를 개편하여 도움도 주자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끝으로 무슨 새 소식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한참 생각하던 김만금이 말씀올렸다.

《저, 농업상동무가 며칠전 원화협동조합에 나갔댔습니다.》

《원화협동조합에?!》

그이께서는 반가우시여 밝은 안색을 지으시고 김만금을 바라보시였다.

《그 조합에서는 모내기가 다 끝났소?》

김만금이 말씀올렸다.

《농업상의 말에 의하면 아직 채 끝내지 못했답니다. 한 처녀가 뜨락또르를 배우다가 사고를 친 모양입니다. 막판에 뜨락또르가 고장나자 좀 지연되였다고 합니다.》

《처녀가 뜨락또르를 배운단말이요? 좋은 일이구만.

서툴러서 사고를 쳤겠지.》

《그 처녀는 전 관리위원장의 딸인데 그 일이 있은 후 집을 탈가하여 자체로 뜨락또르양성소에 찾아갔답니다.》

그이께서는 미소를 지으시였다.

《덕준아바이 딸이구만. 그 아버지에 그 딸이요.

사고치고도 주저앉지 않고 양성소에 갔다니 정말 용하오.

천리마동상을 건립할 때 나는 천리마에 로동자와 함께 벼단을 안은 녀성농민을 앉히도록 하였소. 오늘 농촌에서 그 처녀와 같은 시대의 선구자들이 많이 배출되고있소.

이제 그 처녀가 양성소를 졸업하면 새 〈천리마〉호뜨락또르를 타고 마을에 척 들어서게 합시다.》

이어 그이께서는 한룡택을 념두에 두시며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농업부문 일군들이 농촌현실에 자주 나가면 그런 좋은 이야기도 듣게 되고 농민들이 겪고있는 애로도 알게 되오.

뜨락또르가 한대 사고를 쳐서 지장을 준 사실에서 아마 농업상동무는 농촌기계화를 다그쳐야 하겠다는 충격을 받았을거요.

뜨락또르가 많으면 한대가 고장난것이 무슨 큰일이겠소. 뜨락또르를 비롯한 농기계들이 많이 생산되여 전야를 달리게 되면 일군들은 신심에 넘치고 선진국에 대한 환상도 없어지게 될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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