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제 1 편
전쟁은 어느때 일어나는가
제 4 장
8
(1)
방철호는 시무룩해서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문채 터벌터벌 맥없이 걸음을 옮겨놓고있었다.
오늘은 문화부려단장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대대에는 지금 문화부려단장이 내려와 틀고앉아있을것이다. 며칠전부터 문화부려단장에 대한 료해가 진행되고있다지만 문화부려단장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갑자기 미끌- 하는 바람에 방철호는 모로 넘어질번하다가 간신히 몸중심을 바로잡았다. 내물이 넘쳐흐르다 그대로 얼어버렸는데 그 얼음우에 눈가루가 깔린것을 모르고 짚었다가 하마트면 모재비로 넘어질번 한것이다.
제길- 방철호는 애꿎은 길바닥에 눈을 찔 흘기고는 조심조심 얼음우를 걸어 넘었다. 개울을 넘어서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리맥이 쭉 빠졌다.
방철호는 자기도 모르게 후-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눈앞에는 또다시 문화부려단장의 노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도대체 뭐요? 동문 조선사람이요 쏘련사람이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낯이 불붙는듯 화끈거려 견딜수가 없다. 얼굴에 검댕이칠을 당한것만 같은 수치감과 모멸감…
박영욱은 또 그때 일을 두고 얼마나 펄펄 뛰였던가.
며칠전에는 박영욱에게서 이런 전화가 왔었다.
《동무는 어제 도대체 어디에 갔댔소? 대대정치사업은 그렇게 죽을 쑤어놓고 어디에 그렇게 맘편히 나다니는거요?》
첫마디부터 신경질적이였다.
방철호는 속에서 주먹같은것이 불끈 치미는것을 느꼈으나 애써 참고 또박또박 그루박듯이 대답을 하였다.
《종합대학 선생님한테 가서 우리 나라 애국명장들에 대한 강의를 받고왔습니다.》
《잘하누만. 여보, 그딴데 시간랑비하지 말구 문화부려단장에 대한 자료나 묶소. 이제 인차 검열조가 내려가오. 동무가 없어서 동무네 대대지휘관들과 련대에 먼저 전화를 걸었소. 두고보오, 무사치 못할거요. 어따대구 감히…》
방철호는 가슴이 섬찍했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번져지고있는것이다. 자기때문에 이 일이 더 복잡해지고있었다.
문화부려단장은 그때 말한대로 자주 대대에 내려왔다. 이 방철호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고 검열까지 받게 되였다는것을 알고있는지 모르는지 그저
처음에 지시한대로 력사공부를 한 정형, 애국명장들에 대해 공부한 정형만 료해하군 했다. 며칠전에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오늘은 기한의 마지막날이다. 오늘 문화부려단장이 대대에 나와 료해해보고 합격인가 불합격인가 결론하겠다고 했다.
불합격이면 또 무엇인가 공부를 하러 다녀야 한다. 문화부대대장이라는 사람이 학생아이들처럼…
이제는 대대전사들 보기가 창피해서 견딜수가 없다.
전사들뿐이라면 그런대로 참을수가 있다.
이 방철호를 같잖게 보고있는 련대군의소 라정순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것인가.
기가 막힌 일이였다.
방철호는 앞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눈길을 들었다. 예닐곱살났음직 한 사내애들이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느라 법석 떠들고있었다.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크지 않은 개울인데 토끼털귀걸이를 한 애들 열서넛이 오구작작거리며 열을 올린다.
방철호는 물끄러미 그 애들을 바라보았다.
방철호가 라정순을 처음 만난것도 저런 시내가에서였다.
라정순은 한 간호원처녀와 함께 징검다리를 막 건너오려는 참이였고 방철호는 첫 징검돌우에 금시 올라서려던 길이였다.
《어서 먼저 건너오십시오.》
그들이 갓 조직된 련대군의소의 상급준의와 간호원이라는것을 알고있는 방철호는 례절있게 먼저 권했다.
녀군인들이 도로 징검돌에서 내렸다.
《먼저 건너오세요.》
녀군인들이 사양했지만 방철호는 아예 돌아서서 먼산을 쳐다보며 건늘념을 안했다.
녀군인들은 할수 없는듯 징검돌우에 올라섰다.
그 순간에야 방철호는 아차하며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중간 세번째 징검돌이 위태롭게 삐뚤거린다는 생각이 피뜩 났던것이다. 늘 이 길로 다니는 방철호여서 이 징검다리는 잘 알고있었다.
《아- 저, 동무!》
방철호는 황급히 돌아서며 손을 내흔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우환거리가 되였다.
녀준의가 바로 그 세번째 징검돌에 올라서는 순간이였는데 방철호의 고함소리에 놀라 섰다가 징검돌이 삐뚤하는통에 몸중심을 잃은것이다.
《어마, 어마!》
녀준의가 학춤추듯 허우적거리는데 뒤에 섰던 간호원이 《아이, 준의동지!》 하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간호원이 먼저 물에 뛰여들며 황황히 부축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녀준의가 끝내 모로 넘어지며 물참봉이 되였던것이다.
남자앞에 정말 대망신이였다.
방철호는 신발을 신은채로 첨벙거리며 황황히 그 징검돌로 다가갔다.
《안됐습니다. 내가 그 징검돌이 흔들린다는것을 알면서도… 미처 대책을 못했댔습니다.》
방철호는 못내 미안해하며 징검돌이 움직이지 않게 돌을 고이기 시작했다.
녀준의는 당황한 눈길로 힐끗 방철호를 훔쳐보더니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미안해할것두 없지요. 다 제 불찰인걸요.》
녀준의의 군복자락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용서하십시오. 참, 내가 불을 피워줄테니 옷을 말리우고 가십시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도 성냥은 있답니다. 어서 가보세요.》
쌀쌀하게 말하는 녀준의앞에 방철호는 그만 할말을 잊고말았다. 동실한 얼굴에 살갗이 하얀 량볼,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일것 같이 맑은 크고도 검은 눈… 상큼하니 솟은 코는 그 고운 얼굴을 더욱더 예쁘게 하여주었다. 곡선미가 흐르는 날씬한 몸매, 가뜬히 조인 군관혁띠로 하여 더욱 부풀어보이는 앞가슴…
한마디로 첫눈에도 마음이 끌리는 그런 형의 녀자였다.
그러나 방철호는 더 말을 건늬여보지도 못하고 맹랑하게 헤여지고말았다.
두번째로 만난것은 박영욱이 불러서 갔다올 때였다.
《아이, 어데 갔댔어요?》
은소반에 은구슬을 굴리는듯한 맑은 목소리.
방철호는 대뜸에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그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 그를 쳐다보았다. 쌍까풀진 아름다운 눈이 버들잎같은 눈섭아래에서 반짝이고있었다.
방철호는 가슴이 뭉클해옴을 느끼며 빙긋 웃었다.
《중앙당 박영욱선전부장에게 갔다오는 길이요. 건국실을 꾸리는데 방조를 좀 주겠다고 해서… 우리 건국실을 인민군적인 본보기로 꾸려보라는거요.》
《박영욱이요?》
녀준의는 주춤 멈춰서더니 놀란 어조로 물었다.
《그렇소. 선전부장을 아오?》
처녀는 경계하는듯한 깔끔한 눈길로 힐끗 치떠보더니 새침해지며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요. 어서 가보세요.》
처녀가 획 돌아서서 총총히 가버리는 바람에 방철호는 메사해져서 한참이나 그의 뒤모습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도 상냥해서 웃던 그가 왜 갑자기 돌변했는지 뻥뻥하기만 했다. 수치감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저 처녀가 왜 저러는가, 왜 갑자기 새파래져서…
그때부터 처녀는 도저히 곁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뒤늦게야 알기는 하였지만…
그래서 처녀에게 이 방철호가 어떤 사람인지 좀 본때를 보이려 하였지만 맹랑하게도 그 건국실로 하여 문화부려단장으로부터 호된 추궁과 처벌까지 받게 되였다.
혼맹이가 쑥 빠진 사람이니 그 혼맹이를 심어주어야겠다면서 일체 일을 전페하고 우리 나라 애국명장들에 대하여 공부해가지고 오라는것이였다. 이번엔 또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전투들에 대하여…
오늘까지 불합격되면…
그 라정순이는 이처럼 볼꼴없이 된 나를 이젠 본척도 안할것이다.
까짓거 그러겠으면 그러라지… 그렇다고 주눅들 내가 아니다.
방철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휙휙 걸음을 옮겼다.
대대에 도착하니 정말 안동수가 와서 건국실에서 전사들과 마주앉아 담화를 하고있었다. 약속은 한번도 어긴적 없는 부려단장이였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댔는지 건국실안엔 화끈화끈 열기가 돌고있었다. 더운 방안공기때문에 아니라 화제자체에 흥분되여 내뿜는 열기같았다.
《그래 이번 체육경기에서 이길
《그래두 우리가 이깁니다.》
전사들이 챙챙한 소리로 목소리를 합쳤다.
《모르겠다. 어쨌든 8. 15때 려단적인 경기를 하기로 했소. 그때 봅시다. 알겠소?》
《알았습니다.》
안동수가 빙긋 웃으며 비밀이라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8. 15때는 예술경연과 체육경기를 대대별로 조직하겠소. 둘다 이기는게 진짜 이기는거요. 체육만 이기고 예술경연에서 지면 그건 진거요. 둘다 잘하는 대대를 뽑아 시상을 하겠소.》
《야, 그래두 체육은 체육이 아닙니까. 그야 승부가 명백한건데…》
한세곤이 투덜거렸다.
《아니, 절대로 그럴수 없소. 대대전체가 참가하는 합창부터… 그게 전제조건이요. 알겠소?》
《알았습니다.》
《마침 문화부대대장동무가 오누만. 수고했소.》
안동수는 머밋머밋 다가서는 방철호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