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1 장
12
(2)
농업상은 계속하여 말했다.
그 나라들의 농촌마을들은 현대적이고 문화적으로 꾸려졌다. 초가집이나 흙으로 담벽을 바른것은 찾아볼수 없고 스레트와 함석지붕에 유리창문들이 번쩍이고 마당에는 꽃밭이 펼쳐져있고 젖소들이 우유냄새를 풍기고있다. …
듣다못해 김만금이 마침내 반발했다.
《농업상동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다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우리가 농촌문화혁명도 중심과제의 하나로 내세우고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는 락후한 식민지농업국의 상태에서 해방된지 이제 겨우 15년이 되였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가슴에서 불끈 치미는것에 목이 메였다.
한룡택은 그를 얼핏 돌아보고는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마저 하시오. 들어봅시다.》
《저는 선진공업국과 우리 나라를 대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농업상이 계속하였다.
《대비할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농촌의 기술적개조와 문화적발전은 나라의 공업화와 물질적부의 수준에 따라 좌우되는것만큼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대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진국에서 배울것은 배우고 그들의 경험에서 참작할것은 참작해야 합니다. 우리도 장차 선진국수준에 올라서야 하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식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
한룡택의 말씨가 활발해졌다.
《계속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종합기계화가 되고 생활이 유족하고 집단경리의 력사도 오랜데 그들의 관리운영이 엉망진창인것입니다.
경영활동에서의 관료주의현상을 실례든다면 구역당일군들이 주당에 잘 보여 출세하려고 꼴호즈의 영농계획에 주관적으로 망탕 간섭하는것을 들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실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경영활동에서 자유주의는 반대로 구역당의 지도가 거의 결여되고 꼴호즈의 관리일군들이 라태해져서 농사일을 되는대로 하고있는데서 나타나고있습니다.
이 관료주의와 자유주의는 결과적으로 알곡, 공예작물, 고기와 알생산의 저하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꼴호즈
품종이 우량하고 선도가 좋은 남새와 고기, 우유는 개인장사군들을 통해 뒤문으로 팔리고 그 나머지것들이 국
꼴호즈원들은 집단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자유주의와 개인리기주의를 추구하고있으며 꼴호즈를 해산하고 개인경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들을 공개적으로 하고있습니다.
동유럽나라들에서는 집단화가 채 되지도 않았지만 집단화된 조합들이 대부분 해산되고있습니다.
저희들이 동유럽나라들을 한 나라만 가보고 돌아선것이 그때문입니다. 찾아볼 신통한 조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기일이 단축된것입니다.
쏘련에서 체류하며 더우기 놀랍게 체험한것은 엠떼에쓰와 꼴호즈들의 한심한 로동규률과 와해되여가는 모양에 대하여 농업지도기관 일군들뿐아니라 당일군들도 내놓고 말하고있는것이였습니다.
누구나 자기네 꼴호즈제도에 대한 불만을 꺼리낌없이 우리들에게 터놓고있었습니다.
제가 쓰딸린동지가 살아있을 때에 본 꼴호즈와는 딴판이였습니다. 관리일군들이 일처리를 잘하여 규률이 서고 생산조직을 옳게 하여 부유하게 사는 꼴호즈들도 물론 있지만 거기에서도 세차게 불어오는 수정주의바람에는 대처하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협동경리실태에 대해서도 말했다.
중국에서는 집단경리운영경험이 없는 조건에서 협동조합을 인민공사라는 이름밑에 규모를 너무 크게 정하여 농민들을 망라시켰고 《공동식사》까지 시키는 착오를 범하였다.
중국은 집단화를 좌경적으로 진행하여 지금 시련을 겪고있다. 쏘련은 기술적개조를 먼저 하고 경리형태의 개조를 하였지만 오늘에 와서 수정주의바람에 휩쓸려 망태기를 치고있다. 가슴아픈 일이였다.
쏘련은 강력한 공업국으로서 그 위용이 당당한 사회주의대국이다. 이 나라를 여러차례 방문하신
그런데 오늘 수정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청년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돈밖에 모르며 쟈즈음악과 춤에 미쳐돌아가고있다. 농촌에서는 집단경리를 배격하고 개인경리를 장려하는 바람이 불고있다.
《쏘련당의 수정주의정책이 가져온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사상교양사업을 줴버리였기때문에 수정주의바람이 거침없이 침습해들어왔습니다. 심각한 력사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농촌에서 협동화를 한 후에 기술적개조와 문화농촌건설을 계속하는것과 함께 그에 선행하여 사상의식을 개조하는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농업상이 이번에 가본 나라들의 농촌에서와 같은 현상이 빚어질것입니다.
집단화는 되였으나 사상혁명을 하지 않으면 집단주의정신이 희박해지고 개인리기주의와 사리사욕, 건달풍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집단경리는 더 발전하지 못하고 실패하고맙니다.
그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일하기가 싫어 건달을 부리면 술을 마시고 놀음놀이판에 찾아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녀자들이나 따라다니게 됩니다. 이것은 다 돈을 써야 합니다.
가을에 남들은 공수를 벌어 분배를 많이 타는데 여름에 놀았으니 분배는 못탔지, 먹을것은 없지, 돈은 썼으니 빚단련을 받지, 나중에는 이래도 저래도 살길이 없으니 나쁜 생각밖에 날것이 없습니다. 다시말해서 조합재산을 훔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쟁시기 내가 원화리에 가서 농민들이 품앗이, 소겨리반을 무어 서로 합심해서 농사를 짓고있는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 경험을 살려 전후에
협동조합을 조직하려 하는데 어떤가고 묻자 리녀맹
쏘련이나 동유럽나라들에서 보는바와 같이 사회주의집단경리의 전망이 위태롭게 됩니다.》
농업상은
그렇지만 그러한 의혹을 감히 내비치지는 못했는데 바로
특히 사상혁명을 해야 한다. 그 사상혁명이란 사회주의, 공산주의사상으로 농민들과 인민들을 교양하고 무장시키는것이다.
그런데 쏘련에서는 그것을 줴버리고 수정주의사상을 정치의 기둥으로 세웠다. 물론 그들은 《수정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며 맑스- 레닌주의기본원리가 현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진수를 거세하려 하고있다.
그런데 그들이 《새 사조》를 받아들이였을 때에야 그것을 진리라고 인정했기때문이 아닐가? 사회주의집단화도 낡았다고 보는가?
농업상의 머리속에서는 이런 모순된 감정이 회오리치고있었던것이다.
그의 번잡하고 모순된 심리를 쓸어버리듯
《그러면 경리형태의 사회주의적개조가 끝난 후 사회주의농촌경리를 어떻게 계속 발전시켜나가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먼저 집단화를 한 나라들이 길을 열지 못하고 막혔습니다.
토지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주의적집단화가 완성될 때까지는 농촌문제해결이 거의 모든 사회주의나라들에서 대체로 잘 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 단계에서의 발전에 관한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구체적인 방도를 내놓은것이 없고 모범으로 될만한 뚜렷한 경험도 없습니다.
맑스와 레닌도 공산주의에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당은 우리의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농촌경리의 발전로정을 모색해야 합니다.
지금 확고하게 말할수 있는것은 우리가 농촌에서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계속해나가야 한다는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회주의나라들이 공업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농업에서는 크게 전진하지 못하였으며 농업상동무가 말한것처럼 사회주의농촌경리가 우여곡절을 겪고있는것은 이 세가지 혁명을 계속하지 않고있기때문입니다.》
《맑스- 레닌주의창시자들이 공산주의에로 나아가기 위하여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를 없애야 한다고 한 사상은 농촌문제의 종국적해결을 의미합니다.》
김만금은 말씀을 사업수첩에 적으며
한룡택은 잠자코 있었다. 농촌문제가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를 없애는것으로 종국적으로 해결은 되겠지만 그 로상에서의 사회주의집단경리의 전망에 대한 의혹은 그의 머리속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