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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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상 한룡택은 계획대로 쏘련과 중국,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평양역에서 그는 이제껏 그속에서 살아왔으며 늘 보아온 수도의 모습이 새롭게 안겨와 저으기 놀라와하였다. 유럽땅에서 본 화려하고 번쩍이는 큰 도시들에 비해 방금 페허속에서 솟아오르는 조국의 소박한 수도가 오히려 애착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거리를 걸어가는 시민들과 건설자들의 걸음은 씩씩하고 빨랐으며 천리마기수임을 말해주는 천리마휘장을 자랑스럽게 앞가슴에 단 청년들의 얼굴은 긍지로 빛나고있었다.

어디선가 《피끓어라 청춘아, 불타라 심장아》하는 대렬합창소리가 들려왔다. 미국놈들의 폭격만행으로 재더미로 되였던 빈터우에서 수도를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일떠세운 영웅적건설자들의 그 기백과 용기, 신생의 세찬 호흡이 거리에 차넘치고있었다.

지난 8월에만도 대동강반에 평양대극장, 옥류관, 대동강을 건너간 옥류교가 완공되였고 모란봉기슭에 경기장이(후에 김일성경기장으로 불렀다.) 개건확장되여 평양의 모습을 더 아름답고 웅장하게 장식했다.

건설장들에 수차례에 걸쳐 나가시여 현지지도하신 수령님께서 준공식에 일일이 참가하시여 준공테프를 끊으시였다.

한룡택이 자기가 외국출장을 가있는 사이에 또 어떤 건축물이 일떠섰는지 궁금했다.

식당들에 내건 간판들도 《국수집》, 《온반집》, 《설렁탕집》 이렇게 조선식이였다.

한룡택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 식당들에 들어가 조선음식을 먹고싶은 마음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그간 먹어보지 못한 김치를 먹고싶었다. 그도 조선사람이 아닌가.

성에 도착하여 잠간 지체한 한룡택은 그길로 당중앙위원회에 찾아가 김만금부장에게 싱싱한 모습으로 도착보고를 했다.

인사를 나눈 후 그는 김만금에게 쏘련제 최신전기면도기를 기념으로 주었다.

《허, 내가 매일 면도를 하는 사람이라는것을 어떻게 알고?…

감사하게 받겠소.》

김만금이 턱을 손바닥으로 쓸며 빙그레 웃었다.

출장보고서를 따로 제출해야 했으므로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혹시 수령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을가 하는 기대를 품고있었기에 그때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잡도리여서 김만금부장에게는 간단히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수상동지께서 찾아주시지 않을가요?》

《글쎄, 수상동지께서 지금 상동무의 귀환보고까지 들어주실틈을 내실수 있겠는지.》

김만금이 조용하나 격동된 어조로 계속 하였다.

《상동무가 외국출장을 가있는 짧은 기간에도 수상동지께서는 남포지구를 현지지도하시고 서해수산업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으며 평양에 돌아오시여서는 새로 건설된 다리와 여러 거리들을 돌아보시였소. 또한 가을걷이가 시작된 농촌들을 매일처럼 현지지도하시였소. 안주군 룡흥, 문덕군 룡오, 니서(당시), 순안군 안흥농업협동조합들을 찾으시였고 바로 어제 삼석구역 삼석농업협동조합도 현지지도하시였소.》

《예…》

김만금이 계속하였다.

《수상동지께서는 다음해에 알곡 100만톤을 증산하기 위한 운동을 벌리자고 교시하시였소.》

한룡택은 고개를 번쩍들고 김만금을 놀랍게 쳐다보았다. 자기가 외국출장을 가있는 그 짧은 기간에도 조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수령님께서 얼마나 많은 로고를 기울이시였는가!

《내가 너무 자기 욕심만 부렸소.》

한룡택이 사죄하듯 말했다.

김만금은 출장갔다온 보고서를 간단하고 명백하게 그리고 빨리 쓰라고 말했다.

한룡택은 수령님을 만나뵐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이튿날 한창 보고서를 쓰고있는데 김만금이한테서 뜻밖에도 전화가 왔다.

《오후에 나한테로 오시오. 네시전에 와야 하오.

수상님께서 동무와 나를 부르시였소.》

한룡택이 앉았던 걸상에서 튕겨나듯이 일어섰다. 그는 송수화기에 대고 흥분하여 웨치듯 했다.

《알았소. 부장동무가 보고드린 모양이구만.》

김만금의 사무실에 도착한 한룡택은 접견시간을 기다리며 진정하지 못하고 줄곧 초조하게 기다렸다.

오후 4시 정각에 그들은 집무실앞에 이르렀다.

한룡택은 어려워하며 김만금이더러 앞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김만금이 그의 등을 떠밀어 앞세우고 책임부관방에 들어섰다.

수상님께서 기다리고계십니다.》

책임부관이 이렇게 말하며 집무실로 통하는 방문을 열어주었다. 이번에도 김만금이 한룡택을 앞세우고 집무실로 들어가 인사를 드리였다.

《어서 오시오.》

김일성동지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집무실안을 울리였다. 그이의 존안이 해볕에 검실검실하게 탄것을 보며 한룡택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수령님께서 손을 잡아주시며 반갑게 미소지으시자 한룡택은 어려움을 잊고 따뜻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자 어서들 앉으시오.》

그이께서 걸상들을 가리키시고 자신께서도 그들 가까이에 앉으시였다. 그이께서 부드럽게 물으시였다.

《외국방문길에서 건강은 일없었습니까?》

한룡택이 급히 일어섰다.

《전 건강합니다.》

수령님께서 앉으라고 다시금 걸상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였다.

《동무들을 부른것은 농업부문에서 올해 거둔 성과와 다음해의 과업에 대하여 예비적으로 토론해보기 위해서이고 또한 농업상동무의 귀환보고를 듣자고 해서입니다.》

그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농업상동무의 귀환보고부터 듣자고 하시였다.

한룡택이 일어섰다.

《앉아서 얘기합시다. 세 사람인데 격식이 필요하겠습니까?》

한룡택은 귀국하여 평양의 거리들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감정을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으나 그러한 감정표현은 시간이 귀중한 수령님앞에서 삼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무적인 보고를 시작했다.

《쏘련측에서는 농업상의 직분에 맞게 저와 우리 실무진을 대했습니다. 쏘련농업성 부상의 참가하에 면담을 했고 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엠떼에쓰, 꼴호즈, 뜨락또르공장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쏘련농업상은 우리가 동유럽으로 떠나는 날 오찬을 차리고 만나주었습니다.

먼저 말하게 되는것은 우리 나라에서 쏘련에 대해 많이 소개했고 저자신도 쏘련에 드나들며 목격도 하여 우리가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실무적인 눈으로 들여다보니 쏘련에서의 농촌기계화수준이 상상했던것 이상이라는것입니다.

오래전에 종합적기계화를 실현하였으니까 말입니다.

동유럽나라들도 기계화수준이 대단했고 알곡수확고에서는, 실례로 강냉이농사 하나만 들어도 우리보다 훨씬 더 높았습니다.》

계속하여 그는 사업수첩을 들여다보며 실무진과 같이 방문했던 엠떼에쓰들과 꼴호즈들의 기술장비와 농산 및 축산작업의 기계화비중에 대하여 수자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김만금은 그가 무엇때문에 그 나라들의 기계화수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지 알수 없었다.

당중앙위원회에 사업보고를 하러 왔을 때 한룡택은 그 나라들의 농촌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수도 있었을것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집단경리의 우월성에 대해 의혹을 갖게 한다고 말했었다.

그는 구체적인 내용은 수상님께 보고드릴 때 말하겠다고, 아마 부장동무도 동석할터이니 지금은 이 정도로 그치겠다고 하였었다.

그랬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나라들의 농촌경리기계화를 자랑하고 선전하는듯 한 립장에 서있으니 김만금은 몹시 불쾌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묵묵히 듣기만 하시였다.

꼴호즈의 넓고넓은 대지에서 뜨락또르가 달리고있던 시기 우리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세기적락후성으로 신음하고있었다.

농민들은 《저 북쪽 멀리에 있는 아라사에서는 쇠소로 밭을 갈고있다지. 땅이 얼마나 넓은지 쇠소가 한번 떠나면 며칠 지나서야 되돌아온다누만.》 하고 환상속에서 그 북쪽나라를 그려보며 동경하였다.

조국을 해방하고 개선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시고 그들을 고된 로동에서 해방시킬 구상을 무르익혀가시였다.

1947년 초봄 그이께서는 황해도에 나가시여 김제원농민을 만나 농민들의 애로와 희망에 대해 알아보시였다.

김제원농민은 농민들이 부림소도 부족하여 밭갈이를 제대로 못하고있다고 하면서 빈농들이 부농들한테서 소 한마리를 빌려 하루 밭갈이를 하자면 쌀 한말을 내야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농민들이 나라에 바치는 애국미로 뜨락또르를 구입해다 소대신 기계로 농사짓게 하며 근로인민의 아들딸들을 공부시킬 학교를 짓자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첫 종합대학이 평양에 섰고 외국에서 사들여온 뜨락또르들이 전야를 달리기 시작했다. 반만년력사에 농촌기계화의 첫시대가 도래하였다.

가렬했던 전쟁시기에 이어 전후에는 주변국가들에서 수입도 하고 원조를 받기도 하여 뜨락또르들의 작업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그러나 주변국가들에서 매해 3천대씩 들여온다 해도 전야에서 3만대의 뜨락또르가 작업하게 하자면 10년이 걸린다. 그리하여 수령님께서는 농업협동화를 승리적으로 끝낸 농촌에서 기계화를 빨리 다그치기 위하여 수입해오는것과 함께 자체로 뜨락또르와 자동차를 생산할것을 결심하시였다.

보잘것없는 건물과 몇대 안되는 공작기계를 가지고 지그자그써레, 탈곡기, 축력파종기, 보습 등을 만들고있던 기양기계공장(당시)에서 뜨락또르를 만드는 엄청난 사업을 시작하였다.

설계도면도 없어 바퀴식뜨락또르를 가져다가 해체하여 부속품들을 보고 설계를 했으며 온 공장의 로동자들과 가두의 녀맹원들까지 달라붙어 손으로 두드리고 연마하며 하나하나 만들어나갔다. 쏘련대사관의 경제아따쉐가 나와보고 이 야장간같은데서 뜨락또르를 만들겠다고 접어들었다니 리해되지 않는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우주공간에 인공지구위성을 쏘아올린 쏘련사람들의 눈에는 아이들 장난같이 보일것이다, 그러나 쏘련도 이렇게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뜨락또르를 만들어내는것을 그들이 우주로케트를 쏘는것에 대비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은 손으로 두드리고 연마해서 뜨락또르를 만들고있지만 래일에는 인공위성을 발사할 때가 온다고 하시며 기술자, 로동자, 일군들을 고무해주시였다.

기양기계공장 로동계급은 드디여 뜨락또르 《천리마》1호를 만들었고 그것을 평양에 몰고가서 수령님께 보여드리였다.

시제품을 만든 후 계렬생산에 들어가 현재까지 3천여대를 생산했다.

이러한 우리 농촌기계화의 간고하고 청소한 력사를 결부시켜 농업상이 이야기했더라면 더 좋았을것이다. 그는 이러한 력사를 알고있다. 물론 그가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농촌기계화수준에 대해 말하는것이 우리도 농촌기술혁명을 다그쳐야겠다는 분발심에서라면 좋은것이다.

발전된 큰 나라들에 대한 숭배심에 젖어있는 한룡택이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한룡택은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을 받들고 집행하고있지만 우리 중공업의 힘에 대해 비관하고있었으며 따라서 우리 농촌에서의 기술혁명의 전도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대하고있었다.

우리 협동조합들을 료해한후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한 방문을 통해 그의 그러한 심리가 더 굳어졌는가. 김만금은 그에 대한 의혹을 금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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