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회)
제 1 편
전쟁은 어느때 일어나는가
제 4 장
1
그날 35련대 1대대 문화부대대장 방철호는 벽체미장까지 끝낸 건국실의 책상에 마주앉아 직관판에 써붙일 자료들을 추리고있었다.
건물내외부는 그만하면 나무람할데없이 잘된셈이니 이젠 직관판들만 잘 만들어 걸면 능히 시범이 될수 있을것 같았다.
이제 려단적으로 참관사업이 진행되고 이 1대대 건국실을 본보기로 전군이 따라배우게 된다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때면 그 도고하기 그지없는 련대군의소 라정순상급준의도 이 방철호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될것이다.
방철호는 직관자료들을 한줄한줄 더듬어내려가며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전번 예방주사놓으러 왔을 때 《조선혁명을 혼자 다 하는척 하지 마세요.》 하고 따벌처럼 쏘아대던 그 녀준의의 모습이 자꾸만 글줄우에서 얼른거리였다. 그날 직관판을 만들 각자를 대패로 미느라 바빠서(사실은 주사를 맞는것이 시끄럽기도 했었다.) 예방주사맞는데 가지 않았더니 일부러 건국실 꾸리는데까지 찾아와서 보기좋게 한꼴 먹이는 바람에 뻐꾹소리 한마디 제대로 못했던 방철호였다.
그 말이 지금껏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다.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듣는다 해도 속에 꿍져두는 법을 몰라 지금껏 사람들에게서 사내답다는 말을 들어온 방철호였지만 이 녀준의에게서 들은 말만은 고드름처럼 명치끝에 찰싹 매달려 좀처럼 녹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뭐, 조선혁명을 혼자서 다 하는척 하지 말라구? 도대체 이 방철호를 무얼로 보고 주제넘게 그런 말을…)
그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도 건국실을 기딱막히게 꾸려야 했다.
방철호는 눈앞에 지궂게 달라붙는 환영을 털어버리며 앞에 펼쳐놓은 자료에 주의를 집중했다.
박영욱이가 준 자료들이였다. 박영욱은 정말 이 방철호에 대하여 이만저만 관심이 크지 않다. 건국실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가에 대하여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다 가르쳐주었다. 쏘련에서부터 선전사업을 많이 해본 사람이니 아는것도 많고 얼음판에 박밀듯 말 또한 청산류수였다.
그런데 라정순이는 왜 박영욱부장에 대한 말만 들어도 새침해지군 할가? 분명 내가 박영욱부장에 대해 말을 했을때부터 그의 눈빛이 달라진것 같은데… 그때부터 나를 경멸의 눈빛으로 보는것 같다. 왜? 무엇때문에?… 혹시 선입견은 아닐가?
방철호는 자기의 생각이 또다시 라정순에게로 돌아갔다는것을 깨닫고 허구프게 웃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내가 왜 자꾸 이럴가. 빨리 직관판을 완성해야겠는데…)
자꾸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철호는 연필을 들고 자료들을 하나하나 선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군대의 표본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한 쏘련의 붉은군대요. 쏘도전쟁시기 붉은군대가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가,
어떤 전과를 거두었는가… 이것이 우리 건국실의 기본주제가 되여야 하오. 쓰딸린그라드전투, 꾸르스크전투… 이 꾸르스크전투자료만 보시오. 붉은군대는
50여일간에 걸치는 전투에서 50개 사단의 도이췰란드군을 격멸하였소. 도이췰란드군은 50여만명의 전사자, 중상자, 행방불명자를 내고…
꾸르스크전투는 쓰딸린그라드전투에서 시작된 쏘련인민의
건국실엔 이런 노래도 게시할수 있소. <정의의 싸움 >
나가자 나의 조국아 정의의 싸움에…》
박영욱은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자료들을 쓴 이 종이장들을 말아쥐고 연설이라도 하는듯 목청을 돋구다가 노래까지 불렀었다. 《우리 조선사람들도 그 붉은군대에 들어가 싸웠소. 제2차세계대전에서 피를 흘린 조선의 영웅남아들이 한둘이 아니요.》
박영욱은 마치 자기가 붉은군대 전투원으로 꾸르스크전투에라도 참가한듯이 눈물이 그렁해서 열변을 토했다.
확실히 박영욱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장끼가 있었다. 방철호는 자기가 박영욱의 절반만이라도 언변술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하며 직관판에 담을만한 분량으로 자료들을 추렸다.
제2차세계대전의 성격과 참가한 나라들, 승리의 요인을 한판에 주고 쓰딸린그라드전투에 대한 내용을 또 한판, 꾸르스크전투자료를 한판, 노래 《정의의 싸움》을 한판… 그런 식으로 여덟개 판을 가득채울 결심이였다.
박영욱이가 사진자료들도 얻어놓겠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만점짜리 건국실이 될수 있었다.
방철호는 직관판에 써넣을 자료를 다 추리자 건국실을 나섰다.
대대식당앞에 화물자동차가 한대 서있는데 대여섯명의 병사들이 적재함에 올라 무우를 부리우고있었다.
《여, 세곤동무! 동무네 중대 붓글 잘 쓰는 동무있지? 오, 영철동무 말이요. 곧 건국실에 보내주오.》
《알았습니다.》
무우를 부리우던 한세곤이 적재함에서 훌쩍 뛰여내려 자기네 병실쪽으로 뛰여가는것을 본 방철호는 다시 건국실로 들어왔다. 직관판에 써넣을 자료에 미진된것이 없는가 하나하나 다시 따져보는데 뒤에서 문이 여닫기는 소리가 났다.
《아, 영철동무요? 빨리 오우. 급한 전투임무가 제기되였소.》 하며 고개를 돌리던 방철호는 눈을 흡뜨며 벌떡 일어섰다. 뜻밖에도 려단장이 들어서고있었던것이다. 그의 뒤에는 대대장이 서있었다. 또 소문없이 대대를 돌아보는 모양이였다.
류경수려단장은 기습적으로 관하 구분대들을 돌아보기 좋아했다. 그래야 진짜실태를 알수 있다는것이다. 차렷구령도 영접보고도 못하게 했다. 곧장 병사들의 식당이나 취사장, 침실, 대대지휘부, 군관침실들로 직행하군 했다. 정상적인 준비가 되여있지 않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음, 여기가 건국실이란말이지. 건물은 괜찮게… 꾸렸구만.》
방철호는 그만 인사할 기회를 놓치고말았다. 건국실에 들어서자바람으로 벽체들을 둘러보고 창문도 열어보며 하는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건국실에 놓인 책상우를 쓸어보고 의자에도 앉아본 려단장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여올랐다.
《좋구만, 괜찮아. 문화부대대장 솜씨가 알리거던. … 그런데 왜 그렇게 장승처럼 서있소?》
류경수가 의아해서 쳐다보자 방철호는 어줍게 웃으며 뒤더수기를 긁었다.
《그렇게 인사도 못 올리게 하니 바빠서 견디겠습니까?》
《저 사람 보라. … 인사야 왜 못해? 규정대로 하면 되는거지 구실은… 직관판은 다 만들어놓은것 같은데 내용은 왜 없소?》
방철호는 막대기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며 힘차게 대답했다.
《인차 써서 걸겠습니다. 자료는 다 준비되여있습니다.》
《그래? 좀 볼수 있소?》
방철호는 앞에 놓았던 자료를 모아 려단장에게 내밀었다.
《음, 역시 일하는 본새가 다르군.》
만족한 표정으로 자료를 받아 한장한장 번져보던 류경수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벌컥벌컥 마지막자료까지 대충대충 뒤적이더니 책상우에 탁 엎어놓고 새사람이나 보듯이 방철호를 쳐다보았다.
《문화부려단장동무가 한번 왔댔소?》
《예, 며칠전에 왔댔습니다. 벽체미장을 할 때.》
방철호는 심각해진 려단장의 눈길을 차마 마주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 눈길을 내리깔며 어물어물했다.
(왜 그럴가. 왜 문화부려단장이 왔댔는가 물어보고…)
《문화부대대장은 어디 출신이요. 쏘련서 나오지 않았소?》
《예?》
방철호는 려단장의 왕청같은 물음에 눈이 둥그래졌다.
려단장이 히죽이 웃었다.
《어쩐지 흘레브냄새가 나서그래, 허허허.》
류경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철호에게 자료종이들을 주고 밖으로 나갔다.
방철호는 한순간 뻥뻥해지고말았다.
그건 무슨 말인가. 흘레브냄새가 난다는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방철호는 고개를 기웃하며 다시 자료들을 뒤적였다.
뒤에서 문열리는 소리가 났다. 뚜벅뚜벅 발자국소리가 가까와오더니 《문화부대대장동지! 1중대 포장 라영철 명령대로 왔습니다.》하는 명랑한 보고소리가 들려왔다.
방철호는 돌아서서 손을 들어 보고를 받고는 손에 쥐고있던 자료종이를 라영철에게 내밀었다. 어쩐지 좀 미타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시작한 일이니 이제 와서 그만둘수도 없었다.
《이 자료들을 저 직관판에 써서 걸어야겠소. 전투요, 하루이틀새에 제꺽… 알겠소?》
라영철은 벌씬 웃었다.
《오늘 밤을 새우면서라도 다 해놓겠습니다.》
《좋소. 그럼 시작하오. 내 인차 가서 사진자료들을 더 가져올테니… 그 자리들은 여기 이만큼씩 내놓고…》
직관판에 사진을 붙일자리를 알려준 방철호는 밖으로 나왔다.
박영욱은 마침 사무실에 있었다.
그가 내놓은 사진들은 쓰딸린그라드격전과 꾸르스크전투자료에 안받침될만한 직관성이 있는것들이였다. 땅크들이 드넓은 벌판에 횡대로 서서 공격하는 장쾌한 장면도 있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도이췰란드군의 몰골을 보여주는 사진도 있었다. 특히 전승열병식사진들이 많았다.
《됐습니다. 이거면 병사들이 쏘련에 대해 좀 알수 있을겁니다.》
《그게 중요하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쏘련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고있는데 그래서는 발전 못해. 지어 쏘련에서 나온 간부들에 대해서도 아직 인식들이 부족하더란말이요. 참, 동무네 련대군의소에 라정순이라고 있지?》
《예?》
사진들을 다시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어느 자료에 어느 사진을 붙일것인가 생각을 굴리던 방철호는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듯 어마지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박영욱이에게서 라정순이에 대한 말이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던 그였다.
방철호는 자못 긴장해져서 박영욱을 쳐다보았다.
《라정순동무를… 아십니까?》
박영욱은 씁쓸히 웃었다.
《그저 좀 아오. 서울에서 의전을 나오고 평양의 집에 와 허송세월하는것을 내가 우연히 알고 허가이동지에게 소개했었지. 그때 허가이동지
부인이 페가 나빠 고생을 하고있었소. 페결핵이였지. 허가이동지 부인을 전적으로 담당해서 치료하게 했더랬는데… 병이 기울어 작년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말았소. 그때부터 허가이동지는 독신으로 고생하면서 혁명사업을 했소. 내 보다못해 라정순에게 허가이동지소리를 했지. 그러자 글쎄 대뜸 얼굴이
새파래져서 사람을 뭘로 보느냐고 하더니… 훌떠럭 군대로 가는게 아니겠소. 아, 당부
방철호는 너무도 놀라운 말에 멍하니 박영욱을 쳐다보다가 약간 떨리는 어조로 조심스레 물었다.
《허가이동지는… 아직… 독신입니까?》
박영욱은 흠 하고 코소리를 냈다.
《아, 그 좋은 자리를 누가 마다하겠소. 금년초에 새 부인을 맞이했소. 최니나라고 역시 쏘련태생이지.》
방철호는 왜서인지 후- 하고 안도의 숨이 나가는것을 자기도 어쩌지 못했다.
허가이가 아직 독신이라면 라정순에게 지금도 미련을 가지고있지 않겠는가 하는, 그러면 자기가 라정순이와 사귀는데 일종의 구속력을 느끼게 될것이라는 그런 속타산에서였는지도 몰랐다.
방철호는 라정순이가 박영욱의 말만 들으면 새파래지는 까닭을 알게 된것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라정순의 사람됨이 가늠이 갔던것이다. 사랑은 직위와 권세와 돈으로 흥정할수 없는것이다.
방철호는 만세라도 부르고싶었다.
(라정순동무, 기다려주오. 이 상위 방철호가 동무의 심장속으로 곧바로 돌격할테니…)
방철호는 박영욱이 이상해하며 눈을 껌벅이는것도 모르고 기분이 좋아서 부대로 돌아왔다. 입에서는 흥얼흥얼 코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날 방철호는 라영철이와 함께 밤을 꼬박 밝히면서 직관판을 완성했지만 조금도 피곤한줄 몰랐다.
안동수가 대대에 도착한것은 방철호가 직관판을 건국실에 걸어놓고 흐뭇해서 식사하러 갔을 때였다.
방철호는 자기에게 이제 어떤 벼락이 떨어질는지 상상도 못한채 맛있게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