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1 편

전쟁은 어느때 일어나는가

제 2 장

2

(2)

 

로버트도 제3자의 눈으로 현실태를 투시해볼 필요가 있다. 달리는 전쟁마차의 말고삐를 잠시 멈추어세우고 말상태는 어떤지, 말편자는 제대로 박았고 배는 불렀는지, 수레바퀴는 든든한지 다시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황대걸이 자기보고 이 전쟁마차를 준비하라면 대담하게 이 비루먹은 《국군》이라는 말대신 제2차세계대전에서 살이 질대로 진 이 세상 제일 《강한》미군이란 말을 메울것이다. 그러면 전쟁마차는 진창이건 돌밭이건 마구 내달려 하루저녁에 저 압록강, 두만강까지 가닿을것이다. 만주나 씨비리까지 단숨에 가닿을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에게는 말을 갈아댈만한 권한이 없다.

모두가 북벌에 미쳐버려 전쟁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로버트에게 활짝 웃어주며 박수갈채를 보내고있는 이때 《저 말은 비루먹은 말이여서 안되오.》 했다가는 당장 정신병자로 몰려 목덜미를 쥐여 어느 시골병원으로 끌리워갈지도 모른다.

후유- 황대걸은 또다시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저 백악관과 도꾜의 극동군사령부 주인들이 로버트가 준비한 말이 비루먹었는가 아닌가 하는것을 가려볼수 있게 하자면 랭철한 리성으로 돌아가도록 강한 자극제를 마련해야 했다. 그 자극제는…

갑자기 무엇인가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마이클이 바로 이 황대걸이를 가지고 그 자극제를 제조하려 한다는 생각이였다.

그랬다. 마이클은 바로 이 황대걸의 두뇌와 피와 살, 온몸전체를 산산이 부스러뜨리고 골고루 반죽을 해서 알약을 빚으려 하고있다. 그렇게 빚은 자극제를 그 어른들에게 한덩이씩 공급하려 하고있다. 그 자극제만 쓰면 그 《현명한》분들은 대뜸에 눈이 밝아질것이다. 순간에 비루먹은 말을 알아볼것이며 대신 살찌고 억센 말을 바꾸어메울것이다. 전쟁마차는 기세차게 달리게 될것이며 조만간에 저 두만강가에서, 다음엔 우랄의 봇나무숲에서 로씨야곰을 잡아놓고 불고기를 하며 전승축배를 들것이다. 하지만 이 황대걸에게 남을것이란 쥐뿔도 없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다고 했는데… 죽은 다음에야 아무리 북벌통일을 한들 무엇이 필요한가. 죽은 다음 설사 누가 묘비라도 세워준다치자. 묘비를 세워주고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에는 지나가던 수개가 한다리를 들고 그 묘비에 오줌을 갈겨댈지 누가 알랴. 억이 막히는 일이였다.

마이클이 지금 자기를 그 자극제의 제조감으로 내정하고 칼을 갈고있는이상 그에게 목이 매인 자기로서는 더는 어쩔 방법이 없다. 정말이 자리에서 바람벽에 머리를 쾅쾅 받고 죽고싶은 심정이였다. 속에서 무엇인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고패치기 시작했다. 황병태는 아들의 그 심리를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손가락끝으로 똑똑 탁자우에 그루를 박으며 훈시를 했다.

《틀려먹었다. 넌 아직 우리 어른들의 속을 다 몰라. … 넌 그래 이런 집에서 고운 녀편네를 끼고 호강을 하니까 제 본분까지 술에 타서 다 마셔버린건 아니냐?》

《뭐라구요?》 개벼룩씹듯 오만상을 찌프리고앉아 제 혼자 풀떡거리던 황대걸은 그 말을 듣자 더 참지 못하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사나운 눈길로 애비를 쏘아보았다. 아이때 먹은 젖까지 왈칵 솟구쳐오르는것을 참아낼수가 없었다. 속에서 고패치던것이 드디여 터질 구멍을 찾은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애비의 멱살을 틀어쥐고 철썩 뺨을 후려갈기며 《뭐야, 이 두상태기야. 뭐가 어쩌구 어쨌어? 뭐, 이런 집에서 고운 녀편네를 끼구 호강한다구? 제 본분까지 술에 타서 다 마셔버렸다구? 뭐, 내가 아이야? 네가 도대체 무얼 안다구 훈시질이야, 이 쌍놈의 두상태기야.》하고 욕지거리를 퍼붓고싶은것을 겨우 참았다.

푸들쩍거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혀끝까지 올라온 가래처럼 걸죽한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넘겼다. 괜히 가슴만 풀떡풀떡하다가 자기 잔에 부은 술을 꿀꺽꿀꺽 제 먼저 마셔버렸다. 밑창까지 다 마시자 술잔을 짱소리가 나게 놓고 울분을 터뜨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유람이나 다니는줄 아우? 아버진 이 아들의 마음이 뭐 편한줄 알아요? 나도 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우다. 북벌을 아버지보다 더 바라는 사람이란말이우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불집을 일으켰다가 지는 날엔 또 어디로 가겠소. 일본에? 미국에?》

황대걸이 손가락으로 문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황병태는 아들이 푸들쩍거리자 커다란 두눈을 뜨부럭뜨부럭거리며 멍청히 쳐다보다가 참을수가 없는듯 이마에 지렁이같은 피대줄을 세우고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너 이놈, 그럼 국부께선 너만 못해서 이런 장담을 하셨단말이냐? 돼먹지 않은것들… 언감생심 어따대구… 예로부터 늙은 말이 길을 안다고 했다. 국부께선 다 내다보시구 결심한건데… 너희 젊은것들이 죽을 각오를 가지구 떠받들 생각을 해야지. 뭐, 진다구? 어디로 간다구?…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느냐, 이놈.》

황병태가 불난 강변에 덴소 날뛰듯 펄펄 뛰자 억이 막힌 황대걸은 입만 쩝쩝 다셨다. 구슬픈 눈매로 애비를 쳐다볼뿐 더 말을 안했다. 애비와 싸웠대야 리로운것도 없는것이다. 갑자기 모기 한마리가 앵-하고 앙칼진 소리를 내며 날아와 볼따귀에 착 달라붙었다. 며칠씩이나 굶주려온 놈이라 사정없이 피를 빨아먹는듯 대뜸에 볼이 때끔했다. 황대걸은 화가 나서 있는 힘껏 제 볼따귀를 철썩 후려쳤다. 볼따귀가 얼얼했다. 얼른 손바닥을 들어보니 모기란놈은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황대걸의 이 동작은 비록 모기잡이에서는 실패를 했지만 애비의 성을 가라앉히는데는 놀라운 효과를 나타냈다.

황병태는 눈이 둥그래서 대걸을 쳐다보다가 마치 제가 아들의 뺨을 때리기라도 한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더 말을 않고 술을 쭉 들이켰다.

대신 황대걸은 또다시 울분이 목구멍을 꽉 메우며 솟구쳐오르는것을 느꼈다. 《죽을 각오》라는 말이 신경을 건드린것이다. 지금 38°선에서는 《죽을 각오》가 아니라 실지 죽고있는것이다. 은파산에서 본 그 골짜기와 산비탈을 뒤덮었던 《국군》의 시체들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 시체우에서 떠돌던 까마귀떼들… 다음번엔 자기가 그 신세로 될수 있다.

황대걸은 동생 영걸이도 부상당하고 병원으로 실려갔다며 분을 터뜨리려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유, 아버님이 오셨네?》하는 간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던것이다.

황대걸은 고개를 획 돌려 그를 쏘아보았다. 그 눈길엔 아랑곳 않고 송려애는 닭알빛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오히려 대걸에게 눈을 할깃했다.

《아이참, 당신도… 아버님이 오셨는데… 내가 없으면 카페나 다방에 모셔갈게지…》

분내와 향수내와 알콜내가 뒤범벅이 되여 갑자기 온 방안에 묘한 냄새를 풍겼다.

황대걸은 속에서 불이 이는것 같았다. 어디 갔댔는가고 따지고싶었다. 하긴 따졌대야 구실이 없겠는가. 동창이나 아는 동무나… 또 누구에게 가서 피아노를 쳤다거나… 공연을 보았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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