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 회)

제 1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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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정신없는 손길로 로인의 몸을 더듬으며 형체없이 찢어지고 맨살이 어루만져지는 옷을 만졌다. 비록 짐승의 가죽으로라도 탐탁하게 사냥군의 외양답게 의젓이 몸을 거두고다녔던 로인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 겪은 고생이 어떠했을가는 상상만으로도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혜정은 쉽사리 입을 열어 로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물을수 없었다. 물으려면 그저 눈물이 쏟아진다. 마음을 진정하고 어머니 안부도 묻고 자기들이 동만땅에서 겪은 사변이랑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절하였으나 가슴은 찢어지는듯한 아픔으로만 옥죄여들었다.

아버님, 어서 저와 함께 떠나십시다. 저쪽에 우리 동무들이 발구를 세워놓고 기다리고있습니다. 한시바삐 말리거우에 계신 장군님을 만나뵈워야 해요.》

《뭐? 장군님께서 말리거우에 오셨다구? 장군님께서…

《그래요.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애타게 아버님을 찾고계신지 몰라요.》

혜정은 장군님께서 호검로인의 집에 려장을 푸시고 밤낮없이 기다리시던 이야기를 하였다.

《장군님!》

로인은 그저 이 한마디만 간신히 외우고 아무 말도 입밖에 번지지 못하였다.

발구를 몰아 이십리길을 넋없이 달려온 혜정은 사령부문밖에서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십여명의 유격대지휘관들과 정치일군들이 정숙한 분위기에 싸여 앉아있었다.

그들은 유격대가 동만의 고정된 유격구를 떠나 광활한 지대에 진출한것만큼 놈들이 어느 한곳에 력량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도처에서 적을 치고 광범한 지역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나가며 투쟁의 무대를 점차 국내와 국경지대로 확대발전시켜나가는데 따라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과 당창건방침을 더욱 힘있게 관철해나가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받고 남북만의 항일무장부대들과 국내와 국경연안으로 파견되는 공작원들이였다.

그들중에는 백두산지구에 나가있는 송명준에게 보내는 소부대책임자도 있었고 남만에 나가 독립련대를 지휘하고있는 백선일부대에 중대장으로 파견하는 군사일군도 있었다.

방안의 분위기가 하도 엄숙하고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너무도 긴중한 까닭에 혜정은 그만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려 하였다.

《무슨 일이요, 송혜정동무?》

장군님께서는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채시고 혜정이를 불러세우시였다.

장군님, 여기 문밖에… 저의 아버님이…

《무슨 소리요. 똑똑한 말로 대답하오.》

장군님앞에서 그토록 자신을 잃지 말자고 몇번이나 속다짐하였건만 막상 입을 열자 솟구치는 눈물을 막을수 없었다.

혜정은 흐느끼며 겨우 말을 번졌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는 저의 아버님이 문밖에 오셨습니다.》

《리호검아버님이 오셨단말이요?》

《예.》

장군님께서는 손에 들고계셨던 종이를 통나무책상우에 내려놓으시고 한손으로 벽을 짚으시였다.

《동무들은 돌아가 떠날 차비들을 하고 기다리시오. 래일아침에 다시 부르겠소.》

장군님께서는 경황없는 걸음으로 문밖에 나가시였다. 출입문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나무밑에서 우들우들 떨고있던 리호검로인이 장군님의 모습을 우러르자 지팽이를 집어던지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불처럼 날아와 안기는 로인의 어깨를 껴안으신 장군님께서는 잠시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조용히 몸을 떨고계시였다.

아버님,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장군님께서는 옆에 서있는 송혜정이조차 겨우 들을 지경으로 간신히 한마디를 하시였다. 로인의 손을 이끌고 방안으로 들어오신 장군님께서는 통나무의자를 당겨놓으시고 마주앉으시였다.

《그동안 어디 계셨기에 그처럼 세상을 발칵 뒤지며 돌아갔는데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예?》

장군님께서는 애처롭다 못해 안타까운 생각에 목이 메이시였다.

장군님, 이 액목땅에 들어와 깊숙이 박혀있었습니다.》

《액목땅에는 어째서요. 그 넓은 동만땅을 두고 여기는 왜 들어와 숨어계신단말입니까?》

《죄지은 늙은이가 머리들고 떳떳이 살데가 없었습니다.》

《죄는 무슨 죄를 지었다는겁니까? 그거야 나쁜놈들이 꾸며낸 수작이지 어떻게 리유천동무나 송혜정동무들이 반혁명의 길로 굴러떨어질수 있겠습니까. 아버님이 나쁜놈들의 모해를 받고 엄동설한에 쫓기였으니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습니다. 동만땅에서는 찾을만한곳은 다 찾았습니다. 혹시 나를 만나려고 녕안쪽에 가시지 않았나하여 그쪽에도 사람을 띄워 속속들이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종무소식이였지요. 이 액목땅 말리거우막바지에 와계신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쩌면 이렇게도 모질게 혼자 고생을 하신단말입니까? 어머님은 어디 계시기에 입고계신 옷이랑 그렇습니까?》

장군님, 이 죄많은 늙은이를 욕해주십시오. 로친은 로야령을 넘다가 숨이 졌습니다. 아들며느리가 보고싶다고 푸념을 하면서 숨을 거두었지요.》

장군님께서는 모질게 부르쥐신 주먹으로 무릎을 짚으시였다. 송혜정은 그저 한모양으로 고개를 숙이고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드리고있었다.

《지난해 북만원정을 떠나와 귀중한 혁명동지들을 전장에서 잃을 때에도 지금같은 억울함과 통분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장엄하고도 외로운 슬픔속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리유천동무가 우리 혁명을 보위하고 내 무릎우에서 숨이 질 때 나는 드디여 혁명가들을 죽음우에 덮씌워지는 억울함과 통분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때보다도 아버님을 만난 지금 내 마음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혁명가들이 놈들에게서 아무리 협박을 받아도 그대로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받아낼걸 받아내고야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님은 리유천동무가 어떻게 적구에서 홀로 용감하게 싸웠는지 알고계십니까?》

장군님, 방금 혜정이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녀석이 이 아비앞에 살아돌아오지 못했다고 나무람을 안합니다. 슬퍼도 안하구요. 그자식이 사람구실을 하고 갔다니 내 이제 죽어두 눈을 감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목이 꽉 메이시였다. 손수건으로 눈언저리를 누르시고 한동안 어깨를 들먹이시였다.

《리유천동무와 송혜정동무에게 그토록 참혹한 고통을 안겨준 백하일이란놈은 혜정동무의 총에 맞아 개수도랑에 처박혔습니다.》

장군님, 내 쌍대배기렵총으로 그놈의 대갈통을 쏴갈긴것만치나 시원합니다.》

《그놈의 수작질에 멋없이 들떠 돌아치며 끌끌한 혁명가들을 모해하고 혁명의 지도적지위를 탈취하려고 노리던 강시중이란놈도 근거지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장군님, 그놈은 왜 그대로 살려보냅니까?》

리호검로인은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우들우들 떨며 부르짖었다.

장군님께서는 못견디게 가슴속이 뒤번지시여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송혜정은 눈물을 씻고 고개를 들었다. 말 못할 슬픔이 서리서리 얽히였던 송혜정의 눈에 린광과도 같은 차거운 빛발이 번뜩이였다.

아버님, 강시중이같은 변절자를 처리하는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국제공산당에서는 동만의 사태를 신중히 론의하게 될것입니다.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데 대해 시비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양보 못할 우리의 권리에 속합니나. 이 권리를 지키고저 조선의 우수한 혁명가들이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지요.》

가까스로 그 어떤 의분을 누르시고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였다.

리호검로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없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너구나 혹독한 시련에 부대끼고 너무나 많은것을 잃기도 한 로인은 지금은 그 어디에서 조선혁명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이 리해되지 않았고 참담히 억울하게도 생각되였다.

다음날 장군님께서는 말리거우를 떠나시기에 앞서 송혜정을 조용히 부르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혜정에게 아버님을 모시고 소자지하밀영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였다. 모스크바에 함께 갔다가 먼저 나온 윤병도의 말을 들으면 이제는 위중민이도 나올 때가 되였다고 하시면서 김택근소대장이 련락성원들을 데리고 떠나는데 혜정이도 함께 밀영으로 들어가라고 이르시였다.

《이제 아버님과 헤여지면 다시 또 언제 만나겠소. 소자지하밀영은 여기서 이백리길이 잘되니 아버님께 불편이 없도록 준비들을 잘 해가지고 떠나오.》

장군님의 간곡한 당부를 들은 송혜정은 지체없이 리호검로인을 데리고 소자지하밀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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