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 회)

제 1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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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전에 눈덮인 로야령의 험한 산발을 타고 북만땅으로 들어갔던 원정부대는 지금은 천고의 원시림으로 뒤덮인 숲속을 헤가르며 행군을 계속하고있었다.

겨울의 로야령은 무시로 추위와 강설과 간단없이 불어치는 눈보라의 세찬 울부짖음으로 하여 행군이 어려웠었지만 여름의 로야령은 찌는듯한 무더위와 하늘이 보이지 않게 들어선 숲으로 하여 이만저만 힘들지 않았다.

오성숙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동무들의 배낭과 총을 거들어주고 앞장에 서서 장애물을 헤치면서 힘든 행군을 극복해나갔다.

성숙이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면 사람들은 누구나없이 차일진을 생각하였다.

그 어질고 순박하고 세상없이 솔직하며 남다르게 타고난 유쾌한 성미로 하여 동무들의 정을 한몸에 안고살았던 그 진실한 유격대원은 지금 이 대오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최후를 마친 그 땅, 그 지점을 기억에 새기고싶어 조그마한 종이장에 목릉땅의 지도를 그리고 한흥권중대장에게 차일진이 누워있는 지점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던 성숙이는 그 지도를 네겹으로 접고 기름종이에 싸서 저고리 안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하고있었다.

차일진을 위해 항상 바삐 뛰여다녔고 그의 짐을 거들어주느라 언제 한번 홀가분히 허리를 펼사이가 없었던 성숙이였건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였다.

다른 동무들이 휴식할 때면 성숙이도 휴식하였다. 다른 동무들이 식사를 들고 몸단장을 하고 보초를 서고 잠자리에 들 때면 그도 그렇게 하였다.

지금 일이 덜어진 성숙이의 마음은 허전하기 이를데 없었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안겨주던 그 시름과 걱정을 덜어버린 처녀의 마음은 쓸쓸하기만하였다.

성숙은 이따금 그 순하고 성실해보이는 눈으로 사방을 두릿두릿 살펴보았다. 가버린 사람에 대한 아픈 추억과 연연한 그리움은 우중충한 숲의 구석구석에 나무잎을 스치고 흘러지나는 자그마한 바람결에도 속속들이 깃들어있어 때없이 그의 눈길을 이끌고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

유정한 추억은 비단 성숙이에게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로야령의 원시림속을 헤치고 어려운 행군을 이어나가는 한흥권의 마음속에서도 진옥이에 대한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옥이에 대한 애끓는 추억은 부대가 로야령을 넘어 녕안현 이도하자와 삼도하자치기 골짜기에 머물게 될 때에 한결 더 강해졌다.

이 일대는 지난해 횡도하자전투를 치르고나서 주보중유격부대의 행방을 탐문하려고 진옥이와 함께 나와 며칠 생활하던곳이였다.

부대가 하마카강의 상류를 건너 자작나무들이 자욱하게 들어선 등판을 가로질러 하루종일 행군을 이어왔던 산판발구길은 진옥이가 김택근의 련락임무를 받고 이도하자에 있는 중대장을 찾아오다가 길을 잃고 장밤 헤매며 발목까지 삐여가지고 울상이 되여 나타났던 곳이며 이도하자에서 삼도하자치기로 올라가는 산속외통길은 진옥이와 둘이서 밤에 행군을 하다가 모닥불을 피우고 언밥덩이를 녹여먹기도 하던곳이다.

부대는 한흥권의 추억이 걸음걸음 조약돌처럼 깔려있는 이 길을 한낮에 지나갔다. 한흥권에게는 너무도 모든것이 눈에 선하였다.

그때는 비록 눈이 하얗게 산속을 뒤덮고있었지만 록음이 짙은 이 시절에도 어렵지 않게 가려볼수 있는 발구길이며 이따금 길을 토막을 내며 흐르는 실개천과 통나무를 무어 다리를 놓은 좀더 넓은 개울이며 그리고 이 통나무다리우로 발을 저는 진옥이를 조심스레 건네주던 일이 모두 눈에 선하였다.

아, 얼마나 그윽하고 세세히 가슴을 찢어주는 추억인가?

이도하자와 삼도하자치기사이의 골짜기에 자리를 잡은 장군님께서는 주보중유격부대를 찾기 위해 산동툰방향으로 한흥권중대를 띄우시였다.

한흥권중대가 떠나가자 장군님께서는 군정학습을 시작하시였다.

군정학습에서는 정치강의와 사격훈련을 위주로 하고있었다. 사격훈련에서 취급되는 무기들중에는 새로운것들이 들어있었다. 부대가 가지고있는 중무기중의 하나인 박격포는 라자구전투에 이어 진행한 로흑산전투에서 《정안군》놈들을 들이치고 빼앗은 무기였다.

사격훈련은 대개 낮에 하고 밤에는 정치강의를 하였다.

크게 지펴놓은 우등불을 마주향해 원정부대의 수백명대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장군님께서는 불무지두리를 천천히 거니시면서 말씀하시였다.

군정학습은 불과 십여일동안에 진행되였으나 유격대원들의 정치군사적준비는 비상히 높아졌다.

산동툰으로 갔던 한흥권중대가 주보중부대를 찾아 련계를 취하고 돌아왔다. 이날은 1935년 7월의 맑게 개인 어느날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림시로 꾸려놓은 지휘부병실의 열려진 창가에 앉아 한흥권의 보고를 듣고계시였다.

한흥권의 얼굴은 전에없이 생기에 빛나고있었다.

《그래 주보중동지의 건강은 어떻습디까?》

《부상처가 다 아물었습니다. 이제는 지팽이가 없이 걸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상에 오를 때는 전령병의 부축을 받군합니다.》

《꽤 오래 병에 시달렸구만. 웬만한 일에는 남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 주보중동지가 전령병의 부축을 받군한다면 건강한 사람이라고는 말할수 없는거요.》

《그래도 그몸에서 지팽이를 떼놓으니 싱싱한 사람같았습니다.》

《그렇기도 할테지.》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병자라고 가만히 앉아있는 성미가 아닌 주보중이 몸에서 지팽이를 떼버렸다는것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왕이산동무도 만나보았소, 하연성동무는 어떻게 지내고?》

《그 동무들은 남호두쪽에 나가 활동하고있습니다. 하연성동무는 예나 다름없이 왕이산부대의 대반노릇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번에 하연성이만 있었어도 기어이 우리를 따라 장군님앞에 나타났을겁니다. 왕이산동무도 사실 그렇구요.》

《보고싶구만. 그 동무들이 보고싶어…》

장군님께서는 창턱을 짚으시고 천천히 상반신을 기울이시면서 밖을 내다보시였다. 짙은 록음사이로 유격대원들이 분주히 오가고있었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유격대원들의 머리우로 선히 떠올라 창가로 다가오는듯한 생각이 드신다. 녕안촌에서 떠나실 때 기어이 떨어지지 않겠다고 눈물이 글썽해 고집을 쓰던 그 하연성이가 그새 가슴이 허전해서 어떻게 지냈을가? 그리고 그의 소대원들은?…

장군님, 지금 녕안유격대동무들은 장군님께서 또다시 북만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서 어쩔줄 모릅니다. 정말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합니다. 주보중동지자신은 자기가 직접 내려와서 장군님을 모셔가겠다고 하는걸 겨우 만류하고 왔습니다. 장군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신 말씀도 있고 해서…》

《잘했소. 이제 만나게 될 동무들인데 공연히 왔다갔다하면서 수고할 필요가 없소. 이제 마주앉으면 끝없는 이야기가 쏟아지겠지.》

《그럴겁니다. 기쁜 소식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녕안땅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녕안유격대가 배로 장성되였습니다. 왕이산의 독립대대가 활동하고있는 남호두 남쪽지대는 유격대의 수중에 장악되다싶이 혁명세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방지하혁명조직들도 많이 늘어났는데 심지어 자위단, 경찰같은데도 유격대공작원들이 들어가 활동하고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보중동지는 녕안땅의 이러한 전변은 전적으로 장군님께서 원정부대를 이끄시고 북만으로 들어오시여 놈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이 지대를 혁명화하신 결과에 이루어진 성과이며 북만의 혁명가들을 위해 유격대전술과 군중공작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적군와해, 지하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업의 기틀을 잡아주신 덕분이였다고 눈물겹게 외우고있습니다.》

《참말 어려운 시절이였지…》

장군님께서는 창가에서 일어서시여 해빛이 환하게 비쳐있는 방안을 천천히 거니시였다.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정말 고생도 많이 하고 속도 많이 태웠지만 남북만원정때 한번 원정대가 사지에 빠져 죽을 고생을 치른 때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작년원정때의 고생이 제일 컸소. 그렇게 고생이 컸던만큼 힘들게 혁명을 한 보람이 이 녕안땅에서 꽃피여났고 그날의 시련속에서 단련된 동무들이 이번 원정의 핵심성원으로 되고있소. 왕청중대들도 그렇지만 훈춘중대들도 지휘관들과 모범전투원들이 1차북만원정때 우리와 함께 왔던 동무들이요. 이제 산동툰에 올라가 주보중부대를 만나면 녕안땅을 진동시킬만한 큰싸움을 하나 조직해야겠소. 그리고는 액목지구로 나가서 놈들의 〈토벌〉거점들을 답새기고 그 지대의 반일부대들을 결속해서 이 북만땅에 몇개의 큰 유격집단을 형성해보자는거요. 그렇게 되면 쏘만 몽만국경에 집결된 관동군의 배후는 큰 위협을 받게 되오.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원동국지부의 통보에 의하면 일제는 금년 1월에 쏘련의 그로데꼬브지방에까지 침공해들어갔다고 하오. 그뿐만아니라 몽골인민공화국의 수도를 점령하겠다고 일만혼합군을 몽골령토로 들이밀기 시작했소.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를 높이 들고 제국주의침략으로부터 먼저 승리한 혁명을 옹호하기 위해 힘찬 투쟁을 벌려나가야 하오.》

사령관동지, 명심하겠습니다.》

한흥권은 한두번만 아니게 들어온 장군님의 가르치심이였지만 오늘에 이르러 다시금 그처럼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뜻을 가슴속깊이 새기려고 애썼다.

《군정학습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많이 취급되였는데 동무네 중대가 군정학습에 빠졌던만큼 이 방향에서 대원들을 교양하고 깨우쳐주기 바라오. 산동툰으로는 언제 떠날가? 행군은 밤중에 조직하는게 좋을거요.》

사령관동지, 명령대로 행군준비를 다그치겠습니다.》

한흥권은 힘있게 거수경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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