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 회)
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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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간 실눈을 하고 입술을 조금 벌린채 담가의 진동에 따라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우고있는 리유천은 먼길에 지쳐 조용히 잠들고있는것
같았다. 누워있는 그의 자세는 편안하고 군복깃에 눌리워 조금 아래로 숙어진 동그스름한 턱의 곡선은 부드러워보였다. 누구의 목도리인가를 풀어 허리를 조여맨 상처의 흔적만 아니라면 리유천에게는 아무 재난도 들씌워진것 같지 않았다. 그토록 그는 조용하고
평온한 자세였다. 그러나 그 평온하고 조용한 모습은
《한흥권동무, 중상당한 사람이 왜 이렇게도 조용하오. 이게 정말 이상하지 않는가 응. 리유천동무, 리유천동무.》
리유천은 응대가 없었다. 머리에 씌워놓은 털모자가 담가의 진동에 따라 이마전으로 밀려내려 눈덕을 가리우고있었다.
《유천이, 유천동무, 내 말이 들리는가. 어디 눈이라도 한번 떠보라구. 그래야 동무들이 마음을 놓을게 아닌가?》
그렇듯 애타게 외우시는
황망히 자갈을 밟는 소란한 발걸음속에 《지름길로 들라》, 《담가를 흔들지 말라》 하고 당부하시는
힘이 억대우같은 한흥권이도 다리가 마구 휘청거려졌다. 최춘국은 온몸에 비를 맞듯이 땀을 철철 흘리고 조왈남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있었다.
《왈남이, 조금만 참자구. 귀중한 혁명동지를 구원하는 전투가 아닌가?》
《압니다.
《고마워, 그래달라구.》
위증민은 몇번이나
북하마탕의 동쪽기슭으로 자욱이 들어찬 수림을 헤치고 북쪽으로 흘러내린 가야하를 건너 묘령등판을 지나자 담가우에서 기척없이 흔들리기만하던 리유천이 문득 눈을 떴다.
그 눈을 보시자
《동무들, 담가를 세우시오!》
하늘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 그의 눈은 구름 한점없이 맑게 트인 아득한 공간보다 더 밝았다. 그 눈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여나 온갖 시름을 잊고 맑은 하늘을 향해 어떤 환희의 불꽃을 피워올릴것만 같았다. 그토록 눈빛은 령롱하고 그 령롱한 눈동자우에는 알수 없는 충만한 힘조차 깃들어있었다.
문득 리유천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데 따라 조금씩 말소리가 새여나오자
《어서 말하라구. 내가 여기 있소.》
《
《무슨 소리요. 동무때문에 내가 어쨌단말이요. 응, 내가 어쨌는가 도대체…》
한흥권이 조용하게 여쭈어드렸다.
《
《그런 소리 마오.
누구는 처음부터 아무의 도움도 없이 제발로 걸어 혁명가가 됐는가? 동무들은 리유천이가 남달리
《
《아니요.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하오. 나는 리유천이를 두고 마음고생을 한것보다 보람찬 전투의 길을 걸으며 혁명에 대한 충실성에 감동했던 일들을 더 많이 생각하오.
리유천이는 나와 함께 동녕현성전투도 했고 라자구전투도 했소.
춘양읍거리를 들이칠 때에는 단신으로 적의 포대를 까부시고 우리의 진격을 보장한 사람이요. 지난해에는 나와 함께 량수천자일대에도 나갔고 신남구와 북봉오동 사동의 적을 치기도 했소. 암매한 〈유격구사수론〉자들이 유격구의 방어만을 주장하면서 적의 배후를 들이쳐 놈들을 수세에 몰아넣을데 대한 우리의 의도에 저항해나섰을 때 리유천동무는 당당히 우리의 립장을 지지했고 전투에 떨쳐나서 참다운 모범을 보여주었댔소. 그래서 나쁜놈들이 리유천을 미워하고 〈민생단〉감투를 씌운거요. 내가 리유천이때문에 남달리 마음고생을 한게 뭐라구 가슴아프게 자기를 속죄해야 한단말이요?》
한흥권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 솟구치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았다. 최춘국이와 조왈남은 담가를 등지고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거렸다.
그의 입술은 약간 벌려진채로 있었으나 말은 새여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그가 평상시 무엇인가를 하고싶던 심중의 말을 되새기듯 움직이고있었으나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했으며 뜻도 없이 떨리는 입술의 움직임은 세상을 향해 웨치고싶은 심장속의 부르짖음을 시각을 따라 꺼져가는 육체의 마지막몸부림에 실어 입술우에 번지려고 애쓰는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싶었으랴? 그리고 얼마나 많은것을 알고도 싶었으랴. 그는 아직도 다홍왜의 소식을 알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혹시 자기
가정의 문제로 하여
하루 한시각도 그 고민과 번뇌에서 벗어나본적이 없었던 리유천이로서는 얼마나 그후의 소식을 알고싶었으랴?
그러나 리유천은 끝내 그 많고많은 심중의 호소와 안타까움을 가슴속에 묻어둔채 조용히 꺼지려하였다.
숨소리는 갑자기 높아졌다. 가슴은 빠르게 오르내렸다.
《유천이, 정신을 차리라구. 동무가 눈을 뜨고 보아야 할 엄정한 세상의 판가림이 멀지 않은 요영구땅에서 우리를 기다리고있지 않는가. 힘을 가다듬어야 해!》
《
한흥권중대장이
《그러지 마오. 담가보다는 내 등이 더 편안하오.》
숨소리는 시각을 따라 꺼져갔다. 등에 업힌 리유천의 몸은 솜뭉치처럼 나른해 잦아드는 느낌이였다.
《리유천이, 정신을 차리라!》
《동무는 어째서 다홍왜소식도 한마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있소? 누구보다 가슴을 조이고 누구보다 번민속에 모대기며 회의소식을 기다렸을 동무가 아니요! 다홍왜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 승리를 거두었소. 이제는 세상앞에 머리를 높이 들고 조선혁명을 부르짖어도 여기에 저항해나설 방해군이 없소. 간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의 80~90프로가 〈민생단〉이라는 터무니없는 허물을 뒤집어쓰고 재난을 당할 우리가 아니요. 리유천이, 내 말을 듣소?》
눈물이 두눈을 가리여 앞을 보실수 없으시였다.
한흥권중대장이 등에 업힌 부상자가 이미 운명을 한것 같으니 그만 내려놓아달라고 아뢰였으나
리유천이 숨을 거두었으리라는것을
《
한흥권중대장이 눈을 파헤치시는
서켠으로 기우는 해빛이 수림속으로 엇비듬히 비껴들었다. 해빛을 받은 잔디밭은 모닥불을 지핀듯 황금빛으로 불타올랐다.
유난히도 희고흰 얼굴, 부드럽게 휘여든 눈섭, 한쪽볼에 조그마하게 패인 볼우물… 지금 바라보면 리유천은 너무도 애된 모습이고 소녀같이 순하게 생긴 사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