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그후 이야기

 

이렇듯 제천고을을 다시 차지한 류린석반일의병대는 태백산일대와 황해도, 평안도일대를 넘나들며 계속 싸움을 벌리였다.

일제의 야수적탄압과 리조봉건정부의 압력으로 더는 활동을 할수 없게 된 류린석은 그해 평안도 초산(당시)땅에 이르러 다시한번 격문을 날리며 친일관리들을 신랄히 규탄하고 반일투쟁을 호소한 다음 압록강을 건너 료동지방으로 갔다.

이후 중국의 동북지방과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동포들속에서 반일애국투쟁을 끊임없이 벌려나갔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쏘아죽이자 그것을 해내외의 수많은 동포들에게 알려준것이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5조약》의 강압날조는 반일의병투쟁을 더욱 강화하게 하여 그를 13도의군 도총재로 활약하게 하였다. 그때 그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 각지에서 또다시 의병투쟁을 벌려 일제와 친일주구들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타격을 안겨주었다. 이때에는 벌써 의병구성에서 로동자, 농민, 애국적군인, 청년학생, 상공업자 등 보다 광범한 군중들이 망라됨으로써 투쟁의 폭과 심도에서 많은 질적변화가 일어났다.

김백산과 서상렬, 안승우들은 류린석과 헤여진 후 그곳에서 계속 싸움을 벌리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리린영과 리강년이들은 《을사5조약》날조이후 류린석이 벌린 호소에 따라 또다시 의병장으로 나서 투쟁하다가 역시 왜놈들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류린석은 그렇듯 높은 애국심과 투철한 반일의식을 안고 일제와 용감히 싸웠으나 놈들의 야수적탄압과 봉건정부의 급진적인 대일굴종자세, 사회발전자체의 미숙성 그리고 류린석이 지니고있던 이러저러한 부족점들로 하여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73살이였다.

지나온 사실이 다 력사로 되는것은 결코 아니다.

을미년의 봉화, 이것은 침략자를 반대하는 애국의 심장들이 지펴올린 애국의 불길이였으니 그 불길 활화산처럼 타번지려면 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하고 군력이자 국력, 강한 군사력을 가질 때만이 나라의 자주권도, 민족의 존엄도 수호할수 있다는것이 바로 후대들에게 남긴 력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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