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 회)
제 3 장
초목도 분노한다
9
(1)
…류린석의병장각하.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습니다. 돌이키면 우리는 이미 구면인데 매번 좋지 못한 때마다 만나군 하였습니다. 당신이 충주나 가흥을 일시 차지하기는 했지만 나는 매번 그것을 빼앗았습니다. 물론 가흥에서 당신네가 와다나베와 야마무라를 죽이고 창고를 불지르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닥 큰 손실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듣자니 이번에 귀측에서 선봉장이하 많은 사람들이 부대를 떠나갔다고 하는데 손실이 얼마나 큽니까. 우린 바로 그런 때를 기다렸습니다. 제천에 대한 만단의 공격준비가 되였습니다. 어떻게 하겠는지?
청한다면 우리는 의병대의 생명도 재산도 고스란히 담보해줄수 있습니다. 요컨대 싸우지 않고 조용히 손을 들고나오면 다 용서해줄뿐아니라 친구로서도 맞이해줄수 있다는것입니다.
이 최후의 관용을 선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 후과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책임질수 없습니다.
조선주둔 일본군《토벌》대장 이다찌중좌
구학산고개에 나가있는 파수들이 받아온 이다찌의 최후통첩이였다.
그것을 읽고난 린석은 그놈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다찌, 네놈이 검질기게는 뒤쫓는구나, 끝까지 해보자, 나 역시 용서치 않을테다. …
했으나 무엇으로 어떻게 그놈과 맞서겠는지는 알수 없었다. 이렇다할 방법이 없었던것이다. 있다면 천연의 요새로 되여있는 학고개와 구학산고개를 지키는것인데 거기에 있던 대부분 의병들이 떠나갔다.
그러나 어쨌든 제천을 지켜야 했다. 의병이 여기 제천에서 처음 일어났고 전국에 싸움을 호소하지 않았던가. 이다찌에게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싸움준비를 다그쳤다.
이때에 이르러 이다찌는 마침내 공격에로 나왔다. 형세는 저들에게 극도로 유리했다. 충주성을 이미 차지한데다가 뒤통수를 겨눈 총구처럼 자기들을 위협하던 가흥의 선봉대도 없어진것이다. 이제는 오직 제천 하나에만 력량을 집중하면 되였다.
그들이 타산했던것처럼 제천으로 향하는 두 고개에는 방어력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놈들은 멀리서부터 총포사격을 가해왔고 대부대의 력량을 산고지로 올려밀었다.
천연의 요새로 굳게 믿었던 학고개와 구학산 두 고개는 적아간의 치렬한 격전장으로 변했다. 봄내 가물었던 산고지들에 불이 당기며 온 산판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런 속에서 의병들은 마지막조총탄과 화살을 날리며 창칼을 비껴들고 돌진해나가다가 하나하나 죽어갔다. 마침내 적들은 텅빈 고지로 기여올라와 제천에 대한 다음번 공격좌지를 차지할수 있게 되였다.
사태가 그렇게 번져갈것을 예견하고있던 의병들은 모두 창칼을 비껴들고 고을밖으로 나갔다. 거기서 강이나 숲을 끼고 최후결전을 벌리자는것이였다.
린석도 활을 메고 나갔다. 한옆에는 칼을 찼다. 화살도 날릴수 없게 될 때에는 칼로 마지막 한놈이라도 찍고 자기도 죽자는것이였다.
그것은 최후의 결사전이였다.
생각을 할수록 가슴이 터지는듯 하였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렇듯 죽음을 몰아온
놈들은 그런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단병접전을 피하고 산고지우에서 읍거리에 대한 집중사격전술을 썼던것이다. 놈들이 쏘아대는 기관총과 보총의 일제사격이 읍거리를 들었다놓았다.
골안을 들부시듯 뚜루룩 땅땅거리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밖으로 튀여나오다가 영문모를 총탄에 맞아 무리로 쓰러졌다. 순간에 하얀 시체들이 골안에 널렸다. 여기저기 집들에 불까지 달렸다.
그때까지 결사전을 각오하고 변두리로 나갔던 의병들이 놀라서 돌아섰다. 그들로서는 예견치 못했던 일이였다. 역시 원거리사격으로 의병들을 제압하기 위한 놈들의 전술이였던것이다.
《안되겠소. 사람들을 빨리 피신시키고 우리도 자리를 떠야 하겠소.》
한동안 당황했던 린석이 승우네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가슴이 아프지만 할수 없었다.
《제천을 내놓아야 한단 말입니까?》
《사태가 어쩔수없이 우리를 그리로 몰아가고있소.》
린석이 힘겹게 말했다. 내심으로는 그보다 더 큰 불안이 비껴들고 있었다. 의병대가 더이상 견디여내기 힘들것이라는 그나름대로의 예감이였다. 이제 여기에 그냥 틀고앉아 저 산우에서 퍼붓는 철의 소나기를 피할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들은 자리를 떴다. 인명의 손실이라도 되도록 적게 내기 위하여 빨리 읍거리를 빠져나가자는것이였다.
대부분의 주민들도 비록 처음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점차 머리를 정돈하고 산으로 올랐다. 그속에서 린석도 자기를 잃지 않고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사람들을 피난시키다가 마지막에야 산으로 올랐다. 그가 바로 산골짜기로 잡아들 때 승우를 비롯한 몇사람이 마주내려왔다.
《저… 부인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승우가 불안이 어린 소리로 말했다. 마을에서는 함께 떠났는데 산에 올라와보니 없다는것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 로친이 또…)
불안한 예감이 뇌리를 쳤다. 무작정 돌아서 다시 읍거리로 향했다. 여느때에는 그렇게 하리라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일이였다.
거리에는 여전히 총포탄이 울부짖고 집들이 불타고있었다. 그사이를 누비며 리씨를 찾았다. 그러나 리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객사로 달려갔다. 리씨는 거기에도 없었다. 늘 쓰던 그릇깨비며 약탕관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리씨가 가지고 떠났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하다면 그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또다시 그를 찾아헤맸다. 그러다가 무너진 어느 한 집근처에서 무춤 걸음을 멈췄다. 몸에 익은 약냄새가 코를 자극했던것이다. 씁쓸하면서도 향긋하고 구수한 맛이 나는 십전대보탕냄새였다. 그것이 여기어디에 리씨가 있을것이라는 예감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하여 다시 그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하였다. 하다가 그만 한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안해가 무너진 지붕아래에 깔려있는것이 보였던것이다. 의병들이 달려와 그 지붕을 벗겨냈다. 그러자 안해의 모습은 더욱 완연히 나타났다. 한손에는 약탕관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그릇깨비들을 꼭 끼고 모로 누워있는것이였다. 총탄이 바로 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었다.
순간 린석은 갑자기 자기가 그 총탄을 맞은듯 한 아픔에 꺼이꺼이 흐느꼈다.
《여보, 여보-》
그는 소리쳐불렀다. 그러나 말은 한마디도 새여나오지 못하고 가슴속에서만 소용돌이를 하였다. 품에 안은 약탕관과 그릇들을 꺼내려 하였으나 팔에 꼭 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더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여보, 이게 무슨짓이요. 제 몸부터 빨리 피할것이지 이것들이 무엇이라고…》
말을 안했고 할수도 없었지만 그가 어쩌다 이렇게 되였을것이라는 광경이 주마등처럼 눈앞으로 지나갔다.
아마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놈들의 첫 총포성에 놀라 갈팡질팡하다가 산으로 올랐을것이다. 그러다 이런것들이 생각나 다시 내려와 꼭 필요한것들을 품에 안고 뛰다가 적탄에 맞았을것이다. 거기에 집마저 무너지며 그밑에 깔리였을것이다.
그 깨여진 약단지가 여기에 딩굴고있다. 거기서 풍기는 약냄새, 약냄새…
약탕관이 쓰러진 시체나마 찾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까짓 약탕관이나 그릇깨비들이 무엇이라고 가던 길을 돌아설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당신을 그런것들과 바꾸기를 바라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러나 아무리 애타고 쓰라린 후회도 욕망도 리씨를 다시 일쿼세우지는 못했다. 누워서나마 자기를 살풋이 쳐다보며 무엇인가 훈시를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 그 뜻밖의 잔소리나마 이제 다시 들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나 들을수 없다. 그럴뿐아니라 검질기게 뒤따르는 이다찌의 추격을 피해 주변의 산속을 끊임없이 헤매였다. 며칠만에야 이름없는 어느 한 산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원쑤왜놈, 특히 이다찌에 대한 분개심을 배가해주었다. 제집과 땅을 곁에 두고 이런 산속에 배겨있게 되였다는 분노와 반발심이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는것이 또한 그의 처지이기도 하였다.
안승우가 그를 찾아왔다.
《대장님, 이제라도 저를 죽여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된것이 다 저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때 백산이 칼로 나를 베여죽이고 그가 부대에 남아있어야 할것이였는데…》
《중군장, 가만히 있게. 그렇지 않아도 아픈 이 가슴을 자꾸 허비여놓을텐가?》
린석이 격해서 소리쳤다.
그것은 진심이였다. 백산을 떠나보내놓고 시종 그 후회속에 사는 린석이였던것이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뒤따라 흩어져간 의병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생각같아서는 이제라도 달려가 그들을 모두 불러들이고싶다. 함께 싸우자고 피타게 호소하고싶다. 그러나 할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