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회)
제 3 장
초목도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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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순간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 가까이에 의병들이 있으리라는것이였다. 그들을 소리쳐찾으려 했으나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생각을 바꾼 그는 손에 잡히는 나무 한가지를 꺾어들었다. 그리고 저고리를 벗어 그우에 걸었다. 있는 힘을 다해 높이 쳐들었다. 아, 달아달아, 더 밝게 비쳐주려마…
그렇게 하고있기를 그 얼마, 깜박깜박 흐려지는 의식속에 그는 누군가 자기를 흔드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자 하얀 달빛에 비치인 선봉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자기 코앞에서 우멍진 눈을 하고 똑바로 쳐다보고있다. 미영은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백산이 그를 안고 진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 그는 또 의식을 잃고있었다.
《미영이, 정신차리오. 미영인 제집에 왔소. 우리한테로 돌아왔단 말이요.》
백산이 안타깝게 찾았다. 그래도 부채살처럼 쫙 퍼진 속눈섭은 아래로 향한채 좀처럼 움직일줄 몰랐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의병들이 달려왔다. 자기를 지켜 굳어진듯 쳐다보는 그들을 보자 방싯 미소가 피여났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입술만 약간 움씰거릴뿐 목소리는 도저히 새여나오지 않았다. 그때에야 백산은 그가 말도 할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그것이 백산의 온몸을 피로 끓게 했다.
《미영이, 왜 이렇게 되였소. 왜 말도 없이 혼자 가다가 이 지경이 되였소?》
미영이 그에 대답을 하려고 안타깝게 모지름을 썼으나 여전히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의병들의 흐느낌소리가 바다물소리처럼 세차게 들려왔다. 미영이 그 모습을 둘러보다가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는 백산의 손을 끄당겼다. 그리고 그 바닥우에 자기 손가락을 대고 한자한자 쓰기 시작하였다.
《래일 놈들이 포사격함. 진지완전파괴… 대신 창고식량 왜놈들이 가진다… 불사르라.》
순간 백산은 와들뜰 놀랐다. 그것은 비록 몇자 안되는 글이였지만 그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도 우려했던 포사격이 마침내 진행되게 된것이다. 이것은 순수 도창무기만 가지고있는 의병대에 치명적인 타격으로 될수 있다.
백산이 리해한것을 보고 미영이 계속 써나갔다.
《와다나베, 야마무라 군막 왼쪽에서 세번째… 놈들이 지금 술… 오늘 밤 들이치라.》 하고는 백산을 쳐다보았다. 백산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미영은 행복에 겨운듯 미소를 짓고 손을 놓았다. 자기 임무를 다했다는 최후의 안도감과 행복에서였다.
그것이 백산으로 하여금 더더욱 의기를 끓게 했다. 그는 자기에게 그렇듯 중요한 소식을 전해준 미영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미영이, 내 이제 놈들을 기어코 복수하겠소. 야마무라, 와다나베 모두 죽이고 미영을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소.》
잠든듯 눈을 감았던 미영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백산의 손을 끄당겨 쓰기 시작하였다.
《안예요. 저는 아버지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원군을 보내지 않는… 원망스러워요. 아버지에게… 나라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이때에 량반상놈만 따지며 체면만 생각하는… 그래서 나라도 망친거라고…》
《미영이, 아버지를 욕하지 마오. 아버지는 량반선비의 몸으로 반일전에 나선 의병장이요. 그리고 미영의 아버지이구. 후세사람들은 아버지를 애국적인 반일의병장으로, 의로운 딸을 낳아키운 훌륭한 부모였다고 길이 전할거요.》
그러자 미영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나왔다. 그것을 씻을 생각도 않고 계속하여 써나갔다.
《고마워요. 갑오년에 처음 만났던 이후 저는 줄곧 선봉장님을 희망으로 안고 살아왔어요. 그렇게 살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 몸도…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어요.》
《미영, 이제 조만간에 왜놈들은 쫓겨가고 나라도 편안해질거요. 그때에는 나도 미영을 잊지 않겠소. 내곁에서 떼놓지 않고 영원히 함께 살겠소.》
미영의 얼굴에 미소가 피여났다. 있는 힘껏 고개를 흔들며 눈을 깜박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산은 밖으로 나왔다. 미영이 적진에서 알아온 귀중한 자료를 실전에 써먹어야 했다. 그것이 오늘 밤, 바로 이 시각이다.
그는 급히 싸움조직을 했다. 부대의 총력량을 동원하여 적진을 들이치고 창고더미들에 불을 놓으며 혼란된 틈을 리용하여 놈들의 포위를 뚫고나가는것이였다.
그렇게 하고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미영이 아까처럼 자리에 누워있는데 어쩐지 방이 싸늘하고 선뜩한 감이 들었다.
《미영이, 웬일이요? 내가 왔소, 왜 말이 없소?》
다급히 찾았으나 대답이 없다. 손을 만져보니 싸늘하다. 아까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글을 날리던 그 손이 어느새 식어서 힘없이 늘어졌다. 다른 한손은 웬일인지 입에 물려있다. 피가 랑자하니 묻어있다. 이발로 깨문 자리이다.
이것은 또 웬일인가?
옷고름이 가슴에 접혀있었다. 아까 달빛에 그렇듯 우련히 자태를 드러냈던 흰 저고리고름이다.
급히 펼쳐보니 거기에 피로 쓴 글발이 나타났다.
《원쑤를 갚아주세요!》
또 다른 고름에는 쓰다만 글줄이다.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것일가.
피눈물이 났다. 이것이 사실인가. 과연 미영이 죽었단 말인가. 그렇게도 생을 즐기며 남다른 희망을 꿈꾸며 사랑의 열정으로 가슴을 태우던 그 몸도 죽을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이였다. 이미 피가 통하지 않는 싸늘한 몸이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 그는 세상에 없다. 다시는 정넘친 그 웃음을 볼수 없고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매끄럽게 헤염치던 그 손도 다시 잡아볼수 없다.
그는 밖으로 튀여나왔다. 벌써 싸움준비를 갖춘 의병들이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미영의 사망소식을 듣고 더구나 격분한 그들이였다. 그들을 향해 백산이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형제들, 왜적을 반대하여 떨쳐난 의병용사들! 우리는 지금 왜놈의 손에 무참히 죽어간 한 녀인을 보고있다. 그것은 한 사람만이 아닌 우리 동포모두의 죽음이다. 복수를 하자. 우리가 한 녀인의 죽음을 놓고 슬퍼하거나 눈물만 흘린다면 간악한 왜놈들은 더 오만방자해져서 래일은 그대들의 부모처자를 죽이고 우리 동포모두를 죽이려 할것이다. 우리 대대손손이 오랑캐족속에게 눌리우고 이 땅이 영원히 오랑캐의 땅으로 되고말것이다.
복수를 하자. 그의 몸은 비록 갔어도 령혼은 우리들에게 복수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먼저 간 선렬들과 억울하게 죽어간 모든 녀인들의 복수를 위하여, 이 나라 남아들의 애국충정과 장한 기개를 떨치며 과감히 왜놈들을 족치자!》
소리는 비록 크지도 길지도 않았지만 모든 의병들이 뜨겁게 받아안고 따라웨쳤다.
《족치자! 족치자! 족치자!》
이어서 의병들은 어둠속을 전진해갔다. 한 대오는 놈들의 군막을 향하여, 다른 한 대오는 강기슭의 창고를 향하여…
백산이 앞장에 섰다. 먼저 보초놈을 활로 쏘아눕히고 천막안에 뛰여든 그는 놀라서 달려나오는 와다나베를 단칼로 베여넘겼다. 뒤따라선 홍정식은 천막뒤로 달아빼는 야마무라의 뒤등을 창으로 들이박았다.
이러한 복수전은 천막마다에서 진행되였다. 래일의 《승리》를 자랑하며 술에 만취되였던 놈들이 불시에 들이닥친 의병들의 공격에 만신창이 되도록 얻어맞는것이다.
바로 이런 쾌거를 타고 창고쪽에는 불시에 불길이 타올랐다. 처음에는 한두곳에서 점점이 피여오르던 불길이 순간에 거대한 불기둥이 되여 사방에서 치솟아올랐다. 절대로 왜놈들에게 쌀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의병들의 장한 기개가 그대로 불길이 되여 한알의 낟알도 남김없이 태우고있는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놈들의 포위환이요 뭐요 하던것은 순간에 달아나고 어디로나 훤한 통로가 열리였다. 바로 그러한 기세를 탄 의병들은 미영의 시신을 앞세우고 무사히 가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