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 회)
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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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국을 찾아 적구에 들어갔던 리유천은 근 한달가까운 시일을 아껴가며 쌍하진과 대두천, 천교령과 백초구일대를 누비고 다녔으나 적구부대를 만나지 못하였다.
이사이에 최춘국은 두번씩 적구에 들어가 놈들의 후방을 들이치고 유격구로 돌아오군 하였으나 누구도 모르게 기민하게 움직이는 소부대를 만날수 없었던것이다.
이리하여 리유천은 단신으로 경찰관파출소와 자위단을 습격하고 수류탄벼락을 들씌우며 적들과 싸웠다. 리유천은 2월이 거의다 가고있는 이밤에는 천교령거리에 내려갔다.
관동군사령부의 특별명령을 받은 핫또리가 천고령에 나와 요영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작전을 준비하고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수 없었던 리유천은
이전에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세상에 무서운 일이 있을수 없었다. 더구나
이 한달나마의 기간을 리유천은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고 지금까지 지탱했는지
이 기간에 리유천에게서는 한 인간이 조용히 사멸하고 다른 인간이 새롭게 눈뜨고 태여나는 진동의 시기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리유천은 혁명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그래야 뒤늦게라도
리유천은 천교령수비대로 들어가는 마차의 굴대에 매달려 수비대보초소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장교침실을 찾아 홀연 벼락같이 뛰여들었다. 보통의 결심으로는 결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것이다.
리유천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용맹이나 기지가 아니였으며 보다 복잡한 심경의 몸부림이 빚어낸 견인불발성이였다.
이 견인불발성앞에서는 적들이 질겁을 떨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보통 감정과 사고를 초월한 초인적인 비등된 감정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적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는 혼란속에서 수비대병영을 빠져나온 리유천은 자기가 적의 총알이나 파편에 긁힌자리도 하나 없이 성성한 몸으로 나섰다는것이 리해가 안될 지경이였다. 그가 마차의 굴대에 매달려 병영안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몸에 품고가는 열개의 수류탄을 모두 던지고나면 자기에게는 필경 빠져나갈 퇴로가 막혀버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수비대를 하늘로 날려버리고야말겠다는 결심이 있어 단신으로 적병영에 뛰여든것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야 하였다. 장교침실에 뛰여든 순간에 그는 적들이 요영구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주변의 《토벌대》들을 끌어모으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였다.
그래서 그는 적의 공격계획을 유격구에 알리기 위해 요영구땅을 바라고 허둥지둥 걸음을 내짚고있었다. 이 길은 그에게 있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리유천은 자기가 이제 요영구에 들어가면 십중팔구 숙반에 묶이여 사형장에 나서게 되리라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렇다고 위험에 처한 근거지의 비극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리유천은 자기의 한몸을 내대고 근거지를 사수하려는 각오와 더불어 자기의 최후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쓰라린 감정에 모대기며 요영구로 가고있었다.
리유천은 천고령에서 백여리길을 걸어 이튿날 한낮때에 요영구의 서북쪽 묘령산마루가 바라보이는 가야하를 건너갔다.
기슭에 얼음이 버석버석한 강으로 옷을 벗고 들어서자 바로 한달전에 혜정이가 누워있는 숯구이막에 우연히 들렸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강을 건느다 말고 센 골물이 사품쳐흐르는 가야하의 구불구불한 줄기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이 물기슭을 따라 어느만큼 가면 혜정이 누워있는 그 숯구이막에 가닿을수 있을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혜정이를 낯모를 숯구이막로인의 손에 맡겨두고 눈물을 뿌리며 적구로 들어갔던 리유천이 한달 고전을 치르고 유격구로 돌아가고있는것이다.
그동안 혜정이는 어찌 되였을가? 상처를 털고 근거지에 들어갔을가? 아니면 상처가 덧나 아직까지 고생을 치르고있는지? 어쩌면 그 상처로하여 혜정이가 운명의 기로에서 허덕이고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리유천의 가슴은 마치 대망에 짓눌린듯 갑갑해났다.
단숨에라도 이 물기슭을 따라 내달려 그리운 그 혜정이 있는곳으로 가보고싶었다. 이제 보지 못하면 영영 다시 보지 못할는지 모르는 혜정이, 그 혜정이를 지척에 두고 걸음을 돌리자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수 없었다. 유격구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사람이였다.
금시 허리를 끊어갈듯 차겁게 휘감기며 사품쳐오르는 가야하를 제정신이 아니게 건너선 리유천은 묘령등판에 올라 한동안 흘러가는 가야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혜정이, 사랑하는 그대를 지척에 두고 마음처럼 달려가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오. 내가 지금같이 이렇게 시간을 다투며 요영구의 운명을 걱정하게 되는 이런 때가 아니고 좀더 여유있는 환경에서 그리운 사람을 생각할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겠소. 그러기만 했어도 나는 이렇게 눈덮인 묘령등판에 홀로 앉아 상념속의 그대를 더듬으며 괴롭고 쓸쓸해지는 마음에 눈물을 머금지 않아도 될것이요. 애들처럼 시뻘건 두주먹을 움켜쥐고 눈속에 딩굴고 나무드덜귀에 걸채며 꼬꾸라지면서도 기어이 달리고달려 그대가 누워있는 그 숯구이막앞에 이르러 혜정이! 하고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웨쳤을 내가 아니겠소.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룡정중학의 그 시절에 조용히 시작되여 세상의 모진 풍파에 시달리며 허리를 꺾이울듯하면서도 끝내 꺾이우지 않고 마침내
뿌리를 박고 줄기를 솟구치고 아지를 뻗친 우리의 사랑이 마지막잎을 돋치고 끝을 맺으려는 순간에 이르러 끝끝내 사나운 도끼의 세례를 받는가보오.
나는 이것을 세상의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탓, 나의 실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죄를 지은 인간의 량심으로는 귀중한 애정도 애틋이 나눌수 없다는것을 나는 새롭게 깨달았소. 리성을 상실한 인간은 미상불 사랑도 상실하게 되는가보오. 사람이 한순간의 실책으로 하여 일생의 고뇌를 겪게 된다는 말을 나는 퍽 어릴적부터 격언처럼 외우고있었으나 그것이 내 인생에 굽이쳐와 이렇듯 심신을 녹여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혜정이, 사랑하는 혜정이, 나는 이제 죽음을 각오하고 요영구로 가오. 우리 앞으로 다시 만나 지나간 시절의 일도 돌이키고 두사람사이에
있었던 가슴아픈 사변이랑 다 추억하면서 누에의 허울처럼 벗어던진 과거의
그러나 이 순간의 내 머리속에는 온갖 번거로운 사념을 짓누르고 솟아오르는 하나의 뚜렷한 의식이 있소. 그것은 지난 시절의 우리 애정이 세상의 그 어떤 모진 탕수에도 더럽혀지지도 않고 찢기지도 않았듯이 앞으로 우리의 사랑에 그 어떤 가혹한 불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해도 그것으로 결코 손상을 입거나 지치러들지 않으리라는 그 신념이요.
혜정이, 내가 지금 요영구땅에 들씌워질 가혹한 수난을 막고저 죽음을 맞받아나가는 이 길에는
잘있소, 사랑하는 혜정이.)
리유천은 마음속으로 혜정이에게 긴 이야기를 속삭이고 일어섰다.
그는 이튿날아침에 요영구부락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올라섰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수 없는 숙반대원들이 총을 꼬나들고 그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