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 회)
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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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권중대장은 오성숙을 찾아 재봉대로 가고있었다. 벌써 걸었어야 할 이 길이였다. 그러나 오늘에야 이 길을 밟게 된것은 그동안 복잡하게 들이닥치는 일때문에 정신을 출수도 없었지만 차일진의 이야기를 전한다는것이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오성숙인들 차일진의 소식을 작게 기다리고있었을것인가? 차일진을 위해 바쳐진 성숙이의 수고와 고달픔이며 기쁘고 가슴아프던 일이 한두가지였으랴. 누구보다 깊이 얽혀지고 충만한 애정으로 가득찼던 그들의 사랑을 잘 알고있는 한흥권이로서는 차일진의 희생을 전한다는것이 실로 헐치 않은 일이였다.
한흥권에게는 마치 차일진을 먼 북만땅에 두고 온것이 자기의 실책이기나 한듯이 괴롭고 안타깝게 여겨졌다.
만일 차일진이 죽지 않고 살아 이 근거지에 돌아왔다면 성숙에게는 얼마나 윤택한 생활이 흐르고 그의 유쾌한 말소리가 부락의 골목을 울리고있을것인가?
차일진이 사람들에게 남긴 인상과 애착이 큰것만큼 그를 잃은 유격구마을의 슬픔도 클것이라고 한흥권은 생각하였다.
재봉대가 가까와질수록 한흥권의 걸음은 떠졌다. 청년의용군병실을 지나 호검로인의 야장간모퉁이에 이르니 지붕에 하얗게 눈을 이고 선 재봉대가 보였다. 채광이 잘되라고 하얀 창호지를 발라놓은 창문이 오늘은 어쩌면 저리도 정갈하고 산뜻하게 눈앞에 떠오르는것인가? 마치 그 창문은 오성숙의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처럼 그의 가슴속에 눈물겨운 환영을 불러일으켰다.
저 창문안에 지금은 오성숙이가 홀로 녀대원들과 마주앉아 재봉기를 돌리고있을것이다.
한흥권의 눈앞에는 차일진이와 오성숙의 얼굴이 자꾸만 엇바뀌여 슬픔으로 가슴이 높이 부풀어오른듯한 그들의 모습조차 비껴흐르는것이였다.
호검로인의 야장간에서는 모루에 부딪치는 마치소리가 야무지게 들려왔다.
며칠째 불꺼졌던 야장간에 다시 불빛이 벙끗거리고 쟁기를 벼려내는 마치소리가 길가는 사람들의 고막을 청청하게 때리는것이였다. 이미 숨을 거둔 사람의 가슴에서도 저렇게 불꺼진 야장간에 불이 달리듯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여 그리움과 슬픔에 몸부림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올수는 없는가?
한번 멎으면 다시는 소생시킬수 없는것이 사람의 생명이기에 죽음이 그리도 야속하고 생이 또한 그처럼 귀중한것이 아닌가? 한번 꺼지면 다시 올수 없는 그 길을 차일진이 갔고 진옥이가 갔고 청해가 갔다. 그들이 혁명을 위해 자기들의 참다운 생명을 바친 그 순간에는 지금처럼 조용히 추억에도 잠기지 못했고 그들을 위해 슬픈 눈물도 미처 흘리지 못했으며 그들의 귀한 넋이 묻혀버리는 그 땅의 생김새도 눈에 익히지 못했었지…
한흥권의 눈에는 척척히 눈물이 고여있었다. 지나가던 유격대원들이 북만원정에서 돌아온 한흥권중대장을 보고 반겨 인사를 하였으나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응대를 하며 조용히 지나쳤다.
재봉대 귀틀막에서는 재봉침소리가 가락맞게 들리고있었다. 한흥권은 뜰안을 살펴보았다. 아직 채 밀어내지 못한 눈이 한쪽에 쌓여있고 처마끝에는 고드름이 기다랗게 매달려있었다.
한흥권은 제멋대로 늘어난 고드름을 따가지고 울바자너머로 힝힝 팡가쳤다. 그리고나서 뜰안의 눈을 치기 시작하였다. 억심으로 하는 일이라 별로 힘든줄 몰랐으나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한흥권은 눈가래를 깔고 바람벽에 기대앉아 땀을 들이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방안에서는 재봉침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말끔히 눈을
밀어낸 마당에는 참새떼가 내려앉아 소란을 떨었다. 한흥권은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오성숙의 가슴을 크게 놀래우지 않고 차일진의 소식을 전할수
있을가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하였다. 이 순간에는
한흥권은 문밖에서 툭툭 신발 터는 소리를 울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향해 재봉틀을 돌려놓고 일손을 다그치고있던 오성숙이 고개를 돌렸다.
한흥권을 알아본 오성숙은 흠칫 숨을 들이키며 놀란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돌아앉아 재봉기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한흥권은 땅바닥에 떨어진 가위밥들을 집어 한손이 버그러지게 움켜잡고 오성숙의 등뒤로 다가갔다.
《동무들은 다들 어디 가고 혼자서 재봉을 돌리오?》
《산에 나무하러들 갔습니다.》
한흥권은 휑뎅그레 비여있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성숙이와 호젓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 기회가 한흥권에게는 다행인지 아닌지 알수가 없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 방안은 그것대로 너무나 적막한 고요가 깃들어 한흥권의 가슴을 한결 답답하고 울적하게 만들었다.
《새 군복은 며칠이면 다 지을것 같소?》
한흥권은 될수록 쾌활한 기분을 가지려고 애쓰면서 말을 건넸다.
《한 열흘쯤은 걸려야 할것 같습니다.》
《열흘… 그렇게 짧은 기간에 다 지을수 있을가?》
《그보다도 하루이틀 앞당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
한흥권은 녀대원들이 밤을 밝혀가며 일하고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누구나 편히 일하려는 사람이 있을수 없었다.
《바쁘신 중대장동지가 어떻게 재봉대에 오셨습니까?》
오성숙은 가위밥을 움켜쥐고 자기를 묵묵히 내려다보는 한흥권을 처음으로 똑똑히 쳐다보았다.
《
《
오성숙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더니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혹시 차일진동무의 소식을 전하려고 그래서 오신것은 아닙니까?》
그 순간 한흥권은 문득 숨이 가빠 헛기침을 깇었다.
《저, 사실은…》
한흥권은 마음속으로 침착하게 할 말도 고르고 성숙이를 위로할 방법도 곰곰히 생각하고있었으나 정작 그의 앞에 맞다들자 모든 세세한 준비들이 뒤죽박죽이 되고말았다.
《저는 차일진동무가 원정대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는걸 알고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때문이면 너무 속태우지 마세요.》
한흥권은 무겁게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성숙의 태도가 너무도 침착하고 조용한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리고 그 침착한 태도로 하여 번져지는 아픔이 한결 더 못견디게 가슴을 짓눌렀다.
성숙은 재봉기를 돌렸다. 아무런 변고도 없고 아무 시름도 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손을 놀려 하다 만 군복을 누비고있었다. 재봉기소리가 멎으면 방안에는 못견디게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한흥권은 쿵쿵 뛰는 자기 심장의 박동소리까지도 똑똑히 귀에 들리는상싶었다.
성숙은 그냥 재봉기를 돌렸다. 그러더니 문득 재봉기를 멈추고 주머니에서 네모나게 접은 종이장을 꺼내였다.
《중대장동지, 제가 목릉땅의 지도를 그려보았습니다. 차일진동무가 누워있는곳을 어방짐작으로라도 대여주십시오.》
한흥권은 손바닥 두어폭넓이의 종이에 연필로 복잡하게 그려넣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눈앞이 푹 흐려와 종이장이 보이지 않았다. 말없는 가운데 그리고 내색하지 않는 거동속에 감추어진 성숙의 슬픔, 성숙의 몸부림이 조그마한 지도를 감싸고 뜨겁게 서려있었다.
한흥권은 동만땅에 와서도 언제한번 벗어놓을줄 모르는 전투가방속에서 군용지도를 꺼내였다. 그리고 군용지도와 성숙이의 지도를 맞추어보며 천교령 동남지대의 한 수림속에 동그라미를 그었다. 그곳은 성숙이의 상상으로도 지형을 가늠할수 없는 목릉원시림속이였다.
성숙이는 한흥권이 표시해놓은 동그라미옆에 《1935년 1월 ×일》이라고 써넣었다. 차일진이 전사한 날자는 누구도 알수 없는것이였다.
성숙은 종이장을 다시 네절로 접어 군복저고리 안주머니에 넣더니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물끄러미 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차일진동무가 떠나면서 무슨 말이던 남기고 간게 없습니까?》
《없었소. 정황이 하도 긴박하여 말을 주고받을사이도 없었지. 그는 원정대가 사경에 처한 순간에 생명을 내대고 적들을 유인하여 부대를 구출했소.》
《고맙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행군을 해오던 동무가, 저는 차일진동무의 소식을 듣고 제일 가슴아프던 일은 그의 생명의 마지막순간에 제가 그의 옆에 없었다는 그것이예요. 저에게는 그가 얼마나 힘들게 생눈길을 헤가르며 적들을 유인했을가싶은 애처로운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제가 그의 옆에만 있었던들 죽음을 각오하고 적들을 유인하는 차일진동무를 도와주고 받들어줄수가 있었을거예요.》
《자꾸 그런 생각을 마오. 하긴 성숙동무야 차일진동무를 도와주고 보살피는데 너무도 습관된 녀성이지.》
《예, 그랬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가슴아파도 남처럼 자기힘으로 꿋꿋이 난관을 헤쳐나가던 사람도 못되던
《그렇지만 전사할무렵의 차일진동무는 예전의 그런 차일진이 아니였소. 그는 불속에서 단련되고 모루우에서 다져진 단단한 쇠붙이였었소. 긍지를
가지고 그를 추억해주오. 녕안촌에서 동무와 헤여질 때 그가 부접없이 굴었다고
오성숙은 와락 재봉기를 그러안더니 어깨를 떨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참고참았던 눈물이 그만에야 가슴을 터치며 쏟아져나왔다.
한흥권은 몇대째 담배를 갈아물며 한숨을 쉬였다. 오늘 하루는 오성숙을 위해 바치기로 한 시간이다. 그는 오성숙의 울음을 만류하려 하지 않았다. 몇날 몇달 몇해를 두고 쏟아야 할 처녀의 눈물을 이자리에서 마음껏 쏟뜨리게 하고싶었다. 우리는 얼마나 커다란 시련과 역경을 치르고 사랑하는 동지를 걸음마다 묻으며 혁명을 하고있는 사람들인가? 흐느껴도 몸부림치는 흐느낌이 아니고는 우리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에 호소할수가 없다고 한흥권은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