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 회)

제 3 장

초목도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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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벼락치듯 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안승우가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고있었다.

그들은 일어섰다. 바로 그때 승우가 달려들며 미영의 얼굴을 번개같이 후려갈겼다. 또 한번 날아들 때 백산이 밀치며 앞을 막아섰다.

아버님, 미영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저를 때리십시오.》

아버님? 네가 날보고 아버님이야? 이 상놈의 자식, 네가 감히 내 딸과 야합을 하자고 해?》

소리치고는 역시 번개처럼 백산의 귀쌈을 후려갈겼다. 그래도 끄떡없이 서있는 그를 보고 승우가 다시 달려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영이 그앞을 막아섰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욕을 해도 말로 하고 인격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선봉장은 상놈이 아닙니다!》

《상놈이 아니라구? 이 례의도 법도도 모르는 놈아, 부모 몰래 야합을 하는것이 상놈이 아니고 뭐냐. 개, 돼지만도 못한 놈이지?》

《아버지는 진정 그때문에 노하는것입니까, 량반이 아니라는 그때문에?》

《우리 가문이 바로 그랬다. 력대로 이런짓을 몰랐어.》

《량반도 량반나름이고 상놈도 상놈나름이지요. 아버지는 량반이여서 함부로 사람을 치며 모욕을 하는겁니까. 그것이 량반의 도덕입니까?》

《나는 너를 그렇게 기르지 않았다. 없는 네 어미 정까지 합쳐서… 내가 지금 노하는것도 너를 위한때문이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너는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놀아대며 이 아비의 아픈 가슴을 허비여놓는단 말이냐.》

《말씀을 듣건대 아버지는 노상 량반이란 체면때문에 그러시는것 같은데 그것이 그리도 귀중한가요. 사람이 그때문에 사는것인가요?

아버지, 저도 이제는 과년한 처녀로서 보는 눈이 있고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은 체면이나 명예로 사는것이 아니라 정에 삽니다. 그 정이란 물과 같이 자유로와서 흐르는 곬이 있고 고이고싶은 곳이 있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도록 흘러갈데를 찾지 못해 일렁이던것을 이제야 쏟치는것도 그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그것도 리해못하시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말을 마치며 미영은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것이 승우를 더한층 놀라게 했다. 그러다가 과연 딸이 어디 가서 목숨이라도 잃지 않겠는가 하는 공포심을 자아내게 했던것이다. 그것이 이번에는 무작정 그의 손을 잡아끌게 했다. 차라리 자기가 데려다 곁에서 죽게 할지언정 백산에게는 주지 않겠다는 결심에서였다.

끝내 미영은 아버지의 손에 끌려가고말았다.

그것이 백산의 가슴을 타는듯 쑤시게 했다. 당장 뒤따라가서 그를 빼앗아오고싶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것이 당당하지 않는가. 또 그렇게 하는것이 사나이다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저도 모르게 몸이 그쪽으로 향했다. 하다가 무뚝 그 자리에 멈춰서고말았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그의 발목을 칡넝쿨마냥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인즉 다른 사람이 아닌 미영의 아버지다. 아울러 의병대의 중군이며 지금은 제천반일의병대를 책임지고있다. 그와 맞선다는것은 곧 의병대에 분파를 몰아오고 분쟁을 형성한다는것을 의미한다. 녀자한사람, 저 미영이때문에 그렇게 할수 있을가.

아니, 미영이때문이 아니다. 나때문이다. 나 하나가 모든것을 참고 이기면 된다. 지금껏 그래왔던것처럼 의병대선봉장의 자세로 돌아와 오직 싸움에만 전념하면 된다. 미영을 다시 생각지 말며 쳐다보지도 말자.…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가슴은 더욱 쓰리고 아팠다. 결국 미영을 버려야 한다는것인데 그렇게 할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이제 그를 잊어버리고 어떻게 살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몸이 휘친거렸다. 가슴이 후둑거리고 팔다리가 떨렸다. 가까스로 곁에 선 나무에 몸을 기대였다. 머리를 들어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아득히 저 멀리에 보일듯말듯 하는 저 별들도 개개는 다 자기의 생명이 있다. 누가 보지도 않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는 저 별들도 자세히 살피느라면 제나름으로 웃고 즐기며 뜀뛰기를 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나는…

또다시 파고드는 모멸과 괴로움이 온몸에 실렸다. 과연 이대로 모든것이 끝나고마는가.…

그때 어디선가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이밤 어딘가 마실을 갔든가 아니면 심부름이라도 갔다오는 려염집아이의 발자국소리일것이다.

그런데 소리는 타박타박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있다. 와서는 자기곁에 와서 뚝 그쳤다.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바로 자기뒤에 서있는 미영을 보았다.

말없이 자기를 지켜보는 눈에 웃음이 어렸다. 아니, 정말 웃는지는 알수 없다. 지금 어느 겨를에 그가 웃을수 있단 말인가. 아마 그렇게 보였을것이다.

《어떻게 또 왔소?》

부지중 중얼거렸다.

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하다가 갑자기 달려와 백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온몸이 세찬 격정과 흐느낌으로 푸들푸들 떨렸다.

백산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영이 어떻게 여기로 다시 왔을가.

하지만 묻지 않았다. 다만 만난을 무릅쓰고 또다시 일게 될 파란도 각오하며 돌아왔으리라는것만은 짐작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그를 위해주어야 하는가.

하는데 그의 가슴을 파고들듯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얼음우에 대닢자리보아

님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얼음우에 대닢자리보아

님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든 님 오늘 밤 더디 새우시라

정든 님 오늘 밤 더디 새우시라

 

옛시였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 시였다. 이제 그가 또 시를 모른다고 할수 있을가.

그러나, 그러나… 그가 또 망설이는데 미영이 계속하였다.

《죄스러워요, 용서하세요, 모든게 저때문이예요. 저를 마음껏 욕해주세요.…》

목소리는 아득히 먼곳에서처럼 들려오다가 급기야 가슴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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