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회)

제 3 장

초목도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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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군요. 무사했어요?》

행복에 겨운 미영의 목소리였다. 백산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영은… 몸이 일없소?》

《무사해요. 아무 일도… 선봉장님이 지켜줬어요.》

미영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어리였다. 하면서 그 위급했던 순간에 자기를 어떻게 그러잡고 품에 안았던가를 이야기하였다. 자기도 몰랐던 그 모든것을 어떻게 알고 기억했는지 알수가 없다.

《녀자는 아무리 급해도 정신을 잃는 법이 없고 리해타산을 할 정신적여유를 가진댔어요. 앞으로 어느 때든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어요.》 하고는 아까처럼 또 행복의 웃음을 지었다.

백산은 눈을 감았다. 무한한 행복감이 그로 하여금 몸을 옴짝할수 없게 묶어놓았다. 이제는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밀려드는 행복의 파도가 그를 그냥 눈속에서 헤여날수 없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쪽에서는 마음의 동요가 소용돌이를 하고있었다.

(아니다,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나는 꿈을 꾸고있다.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

생각을 하고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다시 뼈마디가 우직거리고 팔다리가 쑤셨지만 일어나야만 했다.

《아직 얼마를 더 가야 하오?》

《다 왔어요. 산아래로 내려가면 돼요.》

미영이 다가와 어깨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백산은 그를 조심스럽게 밀면서 앞장서 걸었다.

그곳은 제천에서 20여리 상거한 백운산밑의 절간이였다. 불교가 한창 성하던 고려때 지은 절인데 세월이 많이 흐르며 건물이 낡아지고 중들마저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 떠나가버린 후 버림받은채로 오래동안 비여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절은 몇채가 무너지고 몇채는 그냥 남아있었는데 차디찬 어둠속에서 절이 통채로 윙윙 소리내며 우는듯 했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첫 대문칸에는 염라대왕을 노엽힌데 격노한 굴왕신같은 괴물들이 입을 한껏 벌리고 치째진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있는듯 했다. 달빛에 어렴풋이 비친 그 모습에 놀란 미영이 백산의 팔에 매달리자 이번에는 대웅전앞의 높은 석탑에서 풍경들이 바람에 날리며 왈랑절랑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미영은 아예 백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꼭 매달리다싶이 하였다.

백산은 그러는 미영을 달래이며 대웅전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갖신을 신은 발에도 알릴만큼 바닥이 부드럽고 폭신한감이 느껴졌다. 한발자국한발자국 들어갈수록 부드러운 촉감이 기분좋게 계속되였다. 순간 백산은 미영을 뿌리치고 두손으로 방바닥을 더듬었다.

틀림이 없었다. 더듬을수록 손바닥이 잠기도록 먼지가 두텁게 깔리였다.

이것이다, 이것.… 이것이 여기에 있었구나, 화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염초가. …

비록 하찮은것 같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것으로 화약을 만들어 일찍부터 외적과 싸워이기지 않았는가. 이제 또 우리가 이것으로 불꽃을 튕기며 왜적을 쳐없애리라.

생각을 하고난 백산은 불시에 뿌리쳤던 미영의 손을 잡았다.

《미영씨, 고맙소. 이 모든게 다 미영의 덕이요.》

그리고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무슨 사, 무슨 전 하는 건물들을 돌아보았다. 무너진 건물에도 그것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다 돌아보고난 백산은 밖으로 나왔다. 당장 돌아가서 사람들을 동원하자고 해서였다. 절에서 먼저 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미영이 나무에 몸을 기댄채 꼼짝않고 서있었다.

《저는 못 가겠어요. 힘들어요.》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제야 백산은 달빛에 비치인 그의 해쓱한 얼굴을 보았다. 불시에 그를 쉬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빈방 하나가 나졌다. 중들이 살던 승방이다. 그곳에 문짝이 제대로 붙어있고 종이는 바르지 않았으나 대신 창살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어 방도 어둡지 않았다.

《그렇게 막 밟으면 어떻게 해요.》

백산이 방을 돌아보는데 미영이 날래게 달려나가 솔가지를 한줌 꺾어들고 들어왔다. 그것으로 방바닥의 먼지를 한구석으로 모으고 아래목쪽에는 보자기를 펴놓았다.

《춥지 않아요? 한모금 하세요.》

뜻밖에도 그가 품에서 병마구리 하나를 꺼내놓았다. 또 무엇인가 구수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안주감도 나왔다.

《따로 준비를 못했어요.… 리해해주세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백산은 또다시 꿈속에 잠겨든듯 했다. 아까 그 꿈의 련속이였다. 그럴수 없다고 했던 모든것을 부정하며 새로이 긍정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녀자인가. 녀자이면 다 이런가. 마음이 어쩌면 이렇듯 아름답고 살뜰할가. 여기에 어떻게 화답을 해야 하는가.

사람은 정에 산다. 정을 바치고 정에 끌리는것이 사람이다. 고이는 정, 넘치는 정을 쏟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정을 품은 사람이라고 할수 있으랴.

그는 손을 잡았다. 무릎을 감싸쥐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처녀의 부드럽고 포근하고 따뜻한 그 손등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불덩이라도 닿은듯 처녀는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용히 달빛이 흐르는 창가로 다가갔다. 두손을 가슴에 모아잡고 달빛을 우러르는 그의 눈가에 방울방울 눈물이 고여나오며 파르르 떨었다. 둥그런 하얀 달이 나무가지에 걸리여 쪼각난채 갈래갈래 흩어졌다.

이것은 무엇인가. 미영이 왜 우는것일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문득 자기 손에 눈을 주었다. 그 투박하고 거칠게 갈라진 손, 이것으로 그를 가까이한때문일가. 저 신선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하는데 문득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여덟 아름다운 처녀가

그리운 님과 마주서서

수집어서 말 못한채 작별하고

집으로 달려와선

대문중문 다 잠그고

배꽃에 비친 달을 우러러 눈물짓네

 

백산은 영문을 알수 없었다. 시를 듣고도 순결하고 결백한 처녀의 마음에 대한 동경일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영이 먼저 말을 떼였다.

《옛 사람이 지은 시예요. 한다하는 량반이였는데 그가 량반들의 겉치레나 범절의 구속을 몹시 싫어했대요. 아마 그래서 이런 시도 지었던거지요?》

백산은 그것도 알지 못했다. 미영이 왜 지금 구태여 그 말을 하는지 대답을 찾지 못해 주밋거리는데 눈에는 금방이라도 시울을 넘어 천길나락으로 떨어질듯 눈물이 그득히 고여나오고있었다.

《미영씨, 언제도 말했지만 난 시를 모르오. 때로는 모르는것이 아는것보다 더 유리할 때가 있다더구만.》

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후 갑자기 몸을 옹송그리고 벽쪽으로 몸을 기대여앉으며 말했다.

《추워요. 난 추워… 아, 몸이 떨려요.》

《춥다구? 진작 말할게지. 자, 이걸 덮소.》

백산이 곰털저고리를 벗어 그의 등에 씌워주었다. 미영이 매양 부럽게 바라보던 바로 그 덧옷이였다. 그런데 그것이 몸에 와닿자 미영은 와뜰 놀라듯 몸을 피하는것이였다.

《안예요. 그래선 안돼요. 절대… 어서 입으라요.》

백산은 털옷을 든채 멍청히 섰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아,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왜 이러고 섰는가.

그러나 그것은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그의 몸을 돌처럼 굳어지게 했다.

(선봉장님,… 누구도 저와 아버지사이는 갈라놓지 못해요.…)

좀전에 미영이가 했던 말이였다.

바로 그것이였다. 이제 그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영원히 헤여날수 없는 구렁텅이로 떨어지고말것이라는것이였다. 그것이 오싹 진저리가 나도록 몸을 싸늘하게 식혀주었다.

순간 그는 만사를 잊고 밖으로 튀여나왔다. 싸늘한 달빛이 그를 마중하였다. 그러자 구름처럼 높이 떴던 몸이 그제야 땅에 내려앉았다. 발에 걸채이는 무엇도 감각하였다.

길다란 나무가지였다. 어느 사냥군 아니면 약초채취군이 불을 지폈던 나무인듯 승방의 아궁까지 길게 드리워있었다. 그것이 다시한번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미영이 춥다고 했지. 불을 때주자. 그것만이 지금 그를 도와줄수 있는 길이다.

둘러보니 어디나 나무는 많았다. 누가 여기에 살림이라도 폈던듯 더미로 쌓아놓기도 했다.

그것을 아궁이에 처넣고 부시깃을 쳤다. 잠시후에는 아궁이 미여지게 불이 쏟아져나왔다. 그렇게 하고 방에 들어가보니 미영은 이미 잠들어있었다.

아래목은 벌써 손이 뜨거울 정도로 달아있었다.

백산은 미영에게 자기 털옷을 덮어주고는 아궁이앞에 쭈그리고앉아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여보니 어느새 그 곰털옷은 자기에게 씌워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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