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 회)
제 3 장
초목도 분노한다
3
(2)
《얼마나 머오?》
읍거리를 벗어났을 때 백산이 물었다. 미영은 그보다 한발 앞서며 요리조리 어둠속을 잘도 빠졌다.
《따라오라요. 뭐나 먼저 알면 재미없어요.》
산속으로 접어들자 나무들이 우중충 우거지고 우죽뿌죽한 바위들이 사방에서 다가들었다.
달빛은 어느새 없어지고 사방에 어둠만 가득찼다.
얼마 못 가서는 큰길도 사라지고 검은 실오리마냥 가는 길이 끊임없이 골짜기로 이어졌다. 그 좁은 길과 군데군데 보이는 흰눈을 헤치며 미영은 끊임없이 앞으로 갔다. 자그마한 몸을 곧추 세우고 타발타발 걷는 모습이 온갖 신기한 재주를 다 부린다는 옛말속의 요정같았다. 자기는 그 요정에 이끌리여 환상의 나락으로 들어가는 아이처럼 생각되였다.
《미영이, 이 길이 맞긴 맞소? 어떻게 이런데를 다 오게 되였소?》
마침내 백산이 물었다. 미영은 상긋이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자초지종 설명을 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해전에 아버지가 병에 걸렸는데 의원이 날보고 무슨무슨 약초를 구해오라고 하더군요. 그게 몇가지나 되였는데 당장 급하기는 해서 종과 함께 떠났댔어요. 그런데 그만 산속에서 서로 헤여져 길까지 잃고말았댔어요. 산은 깊고 나무가 무성해서 어디가 어딘지 한발자국도 앞을 내다볼수 없더군요. 무작정 산꼭대기로 올라가니 절간이 보이질 않겠어요. 가까스로 찾아가보니 빈 절간인데 벌써 날이 어두웠어요. 할수없이 그곳에서 밤을 새우게 됐지요. 밤이 깊자 사방에서 짐승들이 울부짖고 바람은 불고 얼마나 무서웠던지 평생 잊을수 없어요.…》
미영은 그날의 공포가 되살아나기라도 한듯 오싹 몸을 떨며 나무에 몸을 기대기까지 하였다.
《듣고보니 미영이는 아버지에 대한 정이 지극했었구만. 효성된 마음이 없고서야 그밤을 어떻게 견디여냈겠어.》
《그럼 지금은 정이 떠졌다는건가요?》
백산이 무심결에 한 말을 자자구구 새겨본듯 미영이 두눈이 올롱해서 묻는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요. 보건대 요새 아버지와 사이가 그닥 좋은것 같지 않아서… 지레짐작 했다면 용서하오.》
백산은 대범하게 말하느라 했지만 처녀의 가슴속에는 그것이 엉킨 실오리처럼 말려들었다. 버들잎처럼 휘여든 눈섭밑에서 키돋움을 하듯 간단없이 오르내리던 눈이 살풋이 내려감겼다.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오직 생기를 잃고 시든듯 감겨진 눈과 잠든 아이의 숨결처럼 가늘게 들리는 호흡소리를 통하여 그가
지금 분개하고있다는것을 륙감으로 느꼈다. 그것은
그러는 사이에 처녀는 눈을 뜨고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고있었다.
《선봉장님, 다시는 그런 말씀을 말아주세요. 누구도 저와 아버지사이는 갈라놓지 못해요.》
목소리가 예상외로 부드럽고 잔잔했다. 그러나 백산에게는 처녀의 가슴속에서 세차게 굽이치는 피의 흐름과 격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누구도》라는 그 말속에는 자기도 있다는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던것이다. 아니, 꼭 자기를 겨냥해서 한 말일수도 있다. 미영이 자기를 버리면 버렸지 아버지와 갈라질수야 있는가.
그것은 백번 옳다. 자기가 무엇이기에 또 무슨 렴치로 부녀의 사이를 갈라놓는단 말인가.
물론 사나이들이 녀자의 미모에 반하거나 언행에 끌리여 정을 품을수 있다. 또 녀자가 사나이들에게 반하여 한짝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녀자는 량반집 딸이고 자기는 상놈이다. 여기에는 엄연한 계선이 있고 등차가 있다.
자기가 아무리 뛰고뛰여도 그 계선을 지워버릴수 있고 그 차이를 뛰여넘을수 있겠는가.…
다음부터 그들은 내내 말없이 걸었다. 산은 점점 높아지고 길도 험해졌다. 그래도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령마루에 올라서서 걸음을 멈추었다. 길을 잃은것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새까만 어둠뿐인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성한 수림이 앞을 막아섰다.
《함께 찾아보자요.》
미영이 말하며 문득 손을 내밀었다. 어둠속에서 그의 하얀 손이 야광주처럼 빛을 뿌렸다. 백산은 방금전의 생각도 있은지라 주저하며 두손을 마주 비비다가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다음부터는 급한 경사받이인데 눈까지 쌓였다.
한순간 잘못하다가는 어느 골짜기 어느 미궁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지 알수 없다. 서로서로 손을 꼭 잡고 몸도 마음도 의지하며 함께 걸었다. 이제는 달빛도 산너머로 사라져 그들의 행동을 자연히 눈감아주고있다. 더더욱 쌓인 눈과 급한 경사가 그들에게 손을 더 바싹 잡도록 보채인다.
그럴수록 백산의 가슴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고 보채는듯싶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그는 앞서가던 미영이 갑자기 자기 손을 나꿔채는 감각을 느꼈다. 그와 함께 그가 웨치는 《앗.》 하는 비명을 들으며 옆의 나무가지를 붙잡았다. 그때에야 백산은 미영이 자기의 손에 매달려 깊이를 알수 없는 허공중에 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한 녀자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이를테면 녀자를 대하는 한 남자의 기개, 흔히 말하는 용감성이니 량심이니 의리니 도덕이니 하는 모든것을 한순간에 재고 평가할수 있는 계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기회조차 백산에게는 차례지지 않았다. 그가 힘을 주어 미영을 끄당기는 순간 손에 잡았던 나무가지가 뚝 부러지며 그마저 어쩔새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던것이다. 순간에 눈앞이 아뜩해지고 하늘땅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무가지들이 우직우직 부러지고 눈가루가 사방으로 휘뿌려졌으나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얼마를 굴었는지 한참만에 눈을 떴을 때 그가 처음 느낀것은 자기가 깊은 눈무지에 묻혀있다는 싸늘한 감각이였다.아울러 자기곁에,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있다는 사실이였다.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왜 눈속에 묻혀있는지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또 무엇인지 움직이였다. 그것은 분명 자기를 찾는 소리였다. (이게 누구인가. 왜 자꾸 나를 찾는것일가.)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명 말소리까지 들리였다.
《살았어요? 어디 상한데는 없어요? …》
백산은 정신을 차렸다. 목소리는 바로 턱밑에서 나고있었다. 한순간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 자기 볼에 와닿았다.
《선봉장님! 왜 말이 없어요?…》
미영의 목소리였다. 그가 바로 턱밑에서 더운 김을 풍기며 찾고있었다.
그때에야 그는 자기가 미영을 꼭 그러안고있다는것을 알았다. 그 위급했던 순간에 자기가 다름아닌 그를 품에 안고 벼랑을 굴었던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였다. 뜨거운 정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를 그러안고 저 벼랑을 딩굴면서도 놓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문득 충주성을 점령할 때 관찰사놈을 그러안고 말에서 떨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하많은 옛일중에 그것도 다름아닌 이런 시각에 역적의 몰골이 상기된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때도 지금처럼 붙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증오였다. 왜놈과 한짝이 되여 자기 사람을 죽인데 대한 복수였다.
사랑과 증오,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날수 있을가. 그것은 서로 상반되는 서로 다른 현상이 아닌가.…
하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량반집 규수를 사랑하다니. 아니,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할수 없다한것을 사랑에 비기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일어나려고 하였다. 팔다리가 뜨끔하고 어디선가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어쨌든 몸은 움직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