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 회)
제 9 장
7
(2)
통강냉이를 안친 가마에서는 아직 씩씩 김오르는 소리만 났다. 통강냉이가 물그러지도록 익자면 한참이나 끓여야 한다.
이틀째나 죽물도 맛보지 못한
칠팔년세월 만난을 겪으며 피흘려 싸워왔던 항일전의 수만리길에 이런 난국이 가로막히다니…
길림에서부터 같이 싸움에 나선 사람들중에 남은것이
이제라도
그렇게 생각하자 조왈남은 저도 모르게 설음이 북받쳐 어깨를 떨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젊은이, 젊은이.》
등뒤에서 누군가 조용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찾았다.
조왈남은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수 없어 그대로 흐느끼면서 젖은 눈을 쳐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바깥에서 장작을 패고있던 산막의 로인이 장작을 한아름 안고 측은하게 내려다보고있었다.
《젊은이, 대체 무슨 일로 그리 슬퍼하오?》
조왈남은 황황히 눈물을 씻고 허옇게 센 눈섭밑에서 웅심깊게 빛나는 로인의 동정어린 눈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옷도 중국사람식으로 해입고 말도 중국말을 하기에 중국사람인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발음이 똑똑한 조선말로 묻는것이 아닌가.
조왈남은 어리둥절하여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있는데 늙은이는 안고있던 장작개비들을 내려놓고 그것을 깔고앉았다.
《속이지 않으면 못사는 이 세상을 같이 속이면서 살아가자니 중국사람 허울을 쓰고 지내오지만 나도 실은 조선사람이요. 내게도 젊은이또래의 자식이 있소. 젊은이가 우는걸 보니 남의 일같지 않아서 그러는데 상관없는 늙은이가 쓸데없이 참견한다구 생각지 말구 속상한 일이 있거든 이야기하오.》
조왈남은 늙은이의 두손을 끌어잡고 눈물을 떨구었다.
《
아무리 생각해야 빠져나갈 길은 없고 갈수록 형편이 막막하여 원통하구 기가 차서 그럽니다.》
《그게 적실한 소리요? 젊은이들이 동만에서 넘어온 조선인민혁명군부대라는게? 어서 한번 더 대답하오. 내 딱히 알고싶어 그러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동만에서 넘어온 조선인민혁명군부대입니다. 북만땅에서 두달동안 왜놈들을 족치며 큰 싸움을 벌렸습니다.
《아, 이렇게도 귀한분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늙은이는 한량없이 솟구쳐오르는 감격을 선소리처럼 토하고나서 하던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인가를 멀리 벗어난 심심산골 목재판이래두 동만유격대가 북만땅에서 왜놈치고있다는 소식은 바람처럼 날아오고있소. 어허, 못된놈의
세상, 못된놈의 왜놈종자들이 이제야 풍지박산이 나는갑다 이렇게 외우며 산판사람들이 떠들썩 했다오. 그게 오죽한 사변이라고 무심해들 있겠소.
그런데 동만에서 넘어온 유격대를
늙은이는 조왈남의 팔소매를 잡고 흔들어대면서 대답하기를 채근하였다.
조왈남의 눈에서는 눈물만 떨어질뿐 좀체로 입은 열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믿고 의지하고싶은 로인의 앞이래도
《
《이러지 마오. 제발 부탁이요. 늙은이의 소원이요.
그 순간 조왈남의 흐느낌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그 몸의 진동은 처절하기 이를데 없었다.
《
로인은 수염속에 입을 하 벌리고 산자가 얼기설기 드러난 천정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아궁에서는 불이 빨려드는소리가 후룩후룩 들리고 지게문으로 새여드는 바람이 로인의 허연 수염을 후르르 날렸다.
《이런 변이라구야.》
로인은 세상없는 고통을 가슴에 안은듯 절통하게 부르짖었다. 로인은 손으로 부엌봉당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뿌드득하고 무릎마디에서 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로인은 지축거리며 한걸음한걸음을 운명의 시간처럼 재이며 걸어갔다.
《원, 이런 변이라구야. 세상에 이런 변이 어디 있담.》
로인은 그저 한모양으로 같은 말을 몇십번이고 되풀이하였다.
《
김로인은 목이 메였다.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삿자리를 적시며 후둑후둑 떨어졌다. 생각할수록 기막히고 눈물겨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로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목메이는 설분이 터져나왔다.
《
한번 로인의 가슴을 열어헤치고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벌써 옷자락을 흥건히 적시고 삿자리밑으로 스며들어 봉당냄새를 일으켰다.
김로인은
방금전에 조왈남이가 더운 물로 닦아드린
《
김로인은 무엇을 딱히 어떻게 해야 하리라는 질정도 없이 한모양으로
로인은
로인은 새삼스레 가슴이 쓰리고 목이 메였다.
세상모르는 백성들은 한겨울의 추위를 피해 뜨뜻한 아래목에 몰켜앉아
김로인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아직 그대로 고여있는 로인의 눈에는 무서운 결기가 어려 번뜩이고있었다.
《젊은이.》
김로인은 생전에 한번 그래보지 못한 비장하고 강개한 결심을 품고 아궁앞에서 지금껏 눈물을 흘리고있는 조왈남을 찾았다.
로인의 목소리가 하도 청청하고 비장함에 깜짝 놀란 조왈남이 애써 울음을 참고 방으로 올라왔다.
《너무 걱정들 마오. 맥을 놓지 말고
《
조왈남은 로인의 두손을 움켜잡고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이제 한 삼사십분후이면 이 목재소주인놈이 이리로 올거요. 화등방이라는놈인데 그놈을 붙잡아가지구 무사히 빠져나갈 작정을 해야겠소.》
조왈남은 귀가 번쩍 띄였다. 그는 날개가 돋힌듯이 밖으로 뛰여가며 한흥권중대장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