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회)
제 2 장
불타는 성
12
(3)
《대감님, 이것이 진실로 우리 임금이십니까. 아직도 그를 나라님으로 섬겨야 합니까?》
불시에 린석이 부르짖었다. 언제 한번도 린석이 왕에 대하여 그렇게 해본적이 없던 일이였다.
《이것이, 이것이… 온 나라 신민은 죽든살든, 나라가 외적에게 침입을 당하든말든, 백성들이야 그들과 싸우든말든 상관없이 저 혼자만 편안히 숨어가 있는 사람을 왕이라고 받들어야 합니까?》
그 불같이 뜨겁고 살같이 예리한 린석의 호소에 익현이 와락 달려들어 어깨를 그러안았다. 그리고 둥그런 이마에 지끈 불이 일도록 마주대고 오래도록 문대겼다. 두사람의 눈에서 다같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였다. 이제부터 그들이 가장 공경해마지 않으며 무조건 숭배해온 저 임금이 나의 임금이 아니며 내가 섬길바가 아니라는것을 인식하게 된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껏 그들이 믿고 의지해온 정신적지주를 잃어버린것이다. 그 막막하고 헛헛한 정신적허탈을 무엇으로 보충할것인가.
《아니, 아직은 그것도 다가 아니야, 다가.…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말을 할수 없다는데 있어. 말을 하면 죄가 되거던.》
익현이 더더욱 린석을 끄당기며 말하였다.
《하지만 언제인가는 임금이 〈말을 하는자에게 벌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네는 몰라. 그것은 겉치레로 하는 말이고 예로부터 〈말하는자 너는 죽어야 한다.〉고 했어. 내가 이제 그렇게 되여야 해.…》
대화는 끊어지고 다시 뜨거운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발심, 배신의 고통이 그들로 하여금 더더욱 떨어질수 없게 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더 마주하고있다가야 그들은 머리를 들었다.
《대감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침내 린석이 물었다. 그때에는 익현도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내가 이미 말했지. 편지에도 썼구. 대군이 갈것인데 성을 내놓고 곧 철수하라구…》
《하지만 어떻게 저만치 펼쳤던 나래를 거두고 물러설수 있겠습니까.》
《그 이상은 나도 모르겠네. 래일 당장 이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를판에 의병대가 다 뭔가. 명백한것은 누구도 믿지 말라는것이야. 이 세상 누구도 믿을것이 없어. 오직 자기 힘만 믿고 자재자량하라구. 제힘을 믿고 자기 생각대로…》
익현으로서도 그 이상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로써 명줄처럼 믿고 매달리며 싸움을 벌렸던 줄이 끊어져버린것이다.
다음날 아침 린석은 구슬프고 허전한 마음으로 서울을 떠났다. 익현이 깨끗하고 가뜬하게 차린 새하얀 창옷에 흰 수염발을 날리며 대문밖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것이 린석이 최익현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였다. 물론 그것이 마지막으로 될줄은 아직 몰랐다. 다만 그는 그처럼 학식있고 도고하며 인망이 높던 최익현이 어떻게 하여 저렇듯 체소한 로인의 모습으로 변하였을가 하는 의혹만 품었을뿐이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최익현의 전부의 모습이 아니였다. 그때로부터 10년세월이 지난 1905년 이 나라에 《을사5조약》의 날조로 망국의 비운이 드리우자 그는 일흔살 나이에 정계를 박차고 단연 반일의병투쟁에 뛰여들었다. 전라북도의 례천, 태인, 순창, 담양의 넓은 지방에서 왜놈들을 마음껏 족치며 호랑이같은 자기 기질을 마음껏 떨치기도 하였다. 끝내는 왜놈들에게 붙잡혀 쯔시마까지 끌려가기는 했으나 놈들의 온갖 기만과 회유고문도 뿌리치고 주는 옷도 입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으며 순국하는것으로 조선민족의 절개와 지조를 끝까지 지키였다.
그것을 알길 없는 린석은 끝없이 갈마드는 괴로움과 절망에 빠져 허적이며 말을 때려몰았다.
이제 더는 바라볼것도 의지할데도 없다는 생각에 가끔 말을 멈추고 멍청히 먼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하다가는 끝내 말에서 떨어져 풀숲을 딩굴며 소리쳐울었다.
아, 조선아. 너는 장차 어디로 갈것이냐. 제 나라의 임금조차 없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한단 말이냐. 나는 이제부터 어디에 의지하여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흩어진 머리를 쥐여뜯고 백년로송에 몸을 들이받으며 안타까이 부르짖었으나 어디서도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죽고싶었다. 당장 죽자고 아찔한 벼랑끝에 다가서기도 하였다. 죽고나면 모든것이 깨끗할것이 아닌가. 허탈, 절망, 기약없는 생명은 죽은 목숨이나 같지 않는가.…
그때 문득 두고온 성 생각이 났다. 충주성이다. 거기서는 오늘도 싸움이 일고있을것이다. 함께 피를 다물고 왜놈들과의 결사전에 나섰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있는지.
그것이 그를 다시 말에 오르게 하였다. 이를 악물고 말을 때려몰게 하였다. 저녁무렵이 되여 멀리에서 바라보니 성이 불타고있었다. 온 성이 하나의 커다란 불뭉치가 되여 기염을 토하고있었다. 간신히 포위를 뚫고 당도하니 고색창연했던 선화당과 객사를 비롯한 관청들, 창고들, 항간의 려염집들이 모두 불타고있다.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누가 누군지 알아볼수가 없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에 탄 옷, 흩어진 머리칼, 시뻘겋게 입은 상처, 불에 끄슬린 연기로 하여 모두 딴 사람이 되였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게 어떻게…》
그가 누구에게라없이 물었다.
《놈들이 총공격을 해왔습니다. 이틀동안… 그러나 우린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듣고보니 승우의 목소리다. 다 흩어진 상투바람에 웃동조차 입은것이 없는 몸이다.
(아, 승우 자네가 이런 사람이였던가. 그러면 그렇겠지. 자네라고 매번 조용하고 새침해있을라구…)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보였다. 하나처럼 불덩이같이 뜨겁고 강렬해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할수가 없다. 아니, 그 반대로 하여야 한다. 바로 그들을 위해서, 이들의 생명을 위하여 다른 말을 해야만 한다.
《이제 더 많은 대군이 밀려올거요. 성을 내주고 철수해야 하겠소. 이제 당장…》
말이 끝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항변이 튀여나왔다.
《대장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까지 지켜온 성을 왜 내준단 말입니까?》
《그게 누구의 명입니까. 나라에서 누가 시켰습니까?》
아니다. 누구도 시킨 사람은 없다. 최익현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것은 린석 혼자의 결심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무모한 희생을 피하고 제천으로 되돌아가자는것이다.
《싸움에서는 때로 후퇴하는 때가 있는것이요.》
고요가 깃들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이제는 그들도 린석을 기둥처럼 믿는것이다. 그 말고 더는 의지할데가 없는것이다.
《나는 그네들이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울것이며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리라는것을 알고있소. 그러나 보다 큰 싸움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소.》
말을 마치고 어둠속을 더듬었다. 김백산을 찾는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하나 하재도 그의 동의를 얻는것이 버릇처럼 굳어졌다.
말이 없다. 그가 머리를 수굿하고 무언으로 공감을 표시하고있는것이다.
그날 밤 의병대는 성을 빠져나왔다. 또다시 싸움으로 북문을 열어제끼고 조용히 성을 떠나는것이다. 그렇게 성을 내주는 의병들의 눈에는 살점을 뜯기우는 고통과 괴로움이 어려있다. 이 성과 함께 얼마나 사연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새겼던가.…
린석이 먼저 문밖에 나와 대오를 점검할 때 마지막으로 리씨와 미영이 다가왔다. 리씨가 말없이 린석의 아래우를 훑어보더니 품에서 무엇인가 꺼내여 앞으로 내밀었다.
십전대보탕이다. 그 향기롭고 씁쓸한 냄새가 날아들자 순간에 굳어졌던 몸이 풀리였다.
《원 로친두, 이게 뭐라고 이런데서까지…》
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울었다. 이것이 내 조국이고 겨레이며 피줄이 아닌가.…
이렇게 성을 빠져나온 그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느면서 또다시 피어린 격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느라니 충주에서 제천까지 50리길을 사흘이나 걸리여서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