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회)

제 9 장

5

(3)

 

차일진은 얼결에 정신을 깨고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방금 뒤쫓아오던 적의 무리는 어디로 갔는가? 혹시 원정대의 위치를 알아채고 다시금 다쫓아가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때 고지우에서 적탄이 쏟아져내렸다.

차일진은 이상하게 몸이 앞으로 구부러들면서 눈속에 총을 떨어뜨렸다.

그는 아무런 타격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음향도 가려듣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이상하게 어리둥절해지고 솜뭉치처럼 몸이 노그라들며 눈우에 팔을 벌리고 자보고싶은 욕망이 일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차일진은 소스라쳐 몸을 솟구었다.

어깨로부터 어떤 세찬 아픔이 불현듯 솟아나 가슴언저리로 줄달음쳐왔다.

차일진은 가까스로 손을 내밀어 총을 움켜잡았다.

선뜩한 총신의 촉감이 화끈 단 손바닥에 마쳐오자 차일진은 아주 뚜렷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경사면을 쏟아져내리는 적을 보았고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적들과 결사전을 벌릴 최후의 비장한 각오를 가졌다.

결심은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벌써 어쩔수 없이 운명적인것으로 차일진의 의식에 박혀있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속에서는 과거로 향한 어떤 화폭들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차일진은 비록 길지는 않으나 곡절많게 살아온 자기의 생애가 떠올랐으며 그것을 진지하게 총화를 지어야 하는 생의 마지막단계에 이르렀음을 문득 의식하였다.

순간 무어라 말 못할 쓰릿한 향수가 가슴을 허볐다.

차일진의 눈에는 핑그르 눈물이 어렸다.

근거지에서의 그의 생활은 남처럼 그렇게 떳떳치 못했다. 혁명근거지, 위대한 혁명이 울짱을 박아 꾸려놓은 그 땅에서 시대의 거창한 사변을 주시하고 몸소 겪기도 하면서 한해동안 살아오기는 하였으나 자기의 피와 땀을 바쳐 꾸려놓은 생활이 그 땅에 무엇을 남겨놓았던가?

그가 참답게 혁명가로 떳떳이 걸었다고 할만한것은 북만원정의 석달동안이였을것이다. 그 길에 무수히 바쳐진 장군님의 로고와 믿음과 사랑!…

그것은 한사람의 혁명가를 자래우는데 바쳐지는 장군님의 힘이 얼마나 크고 막대한것인가를 그의 눈앞에 펼쳐놓은 사변으로 되였다. 그리하여 차일진은 장군님과 떼여놓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할수 없었다.

너무도 깊이 혈연적으로 유착된 그 감정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더듬노라면 차일진은 죽어서도 그이의 곁을 떠날수 없다는 몸부림이 일어난다.

차일진은 이제 자기가 장군님의 신변을 지켜 죽음을 맞받아나가야 할것이지만 이것으로 그이의 곁을 영영 떠나게 되리라는것을 생각하면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여 울고도싶어진다.

《장군님!》

차일진은 무의식중에 소리를 지르며 원정대가 사라져간 그 숲의 자드락을 향해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 순간에 차일진은 자기가 아직 어른도 다 되지 못한 아이적 마음으로 이 높고 거치른 북만의 등판에 홀로 떨어진것같이 생각되였으며 혁명의 운명을 걸머지고 준엄한 싸움의 길을 가고있다는 의식은 훨씬 뒤늦게야 천천히 떠올랐다.

차일진은 두팔을 뻗치고 적들을 유인하기로 결심한 골짜기를 향해 기였다. 혼자 가는 이 걸음이 어쩌면 이렇게도 숨가쁘고 초조히 서둘러만 지는가?

그는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모자가 없는 머리로부터 세찬 랭기를 감촉하며 눈을 떴다.

방금전에 그 거밋거밋하고 성근 숲이 나타났다.

사위는 이를데 없이 고요하였다.

여기가 어딘가?…

방금 그렇게도 세찬 총탄의 세례가 숲을 성글게 하며 우박처럼 쏟아져내리던 전장이라고는 생각할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눈앞에 바라보이는 그 성긴 숲과 썩정가지들이 널려있는 흰눈이며 눈속에 박혀있는 모자와 한쪽으로 군드러진 총이며가 모두 무엇때문에 이자리에 있으며 그리고 한번도 원정대와 떨어져있어본적이 없는 자신이 어찌하여 부대를 버리고 이 한적하고 고요하며 지어 적막하게도 느껴지는 이 숲속의 작은 공지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찬눈속에 내려짚은채 멍청히 앉아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 내가 적들을 유인하댔지.)

짧은 한순간의 생각이 그의 머리속으로 똑똑히 날아들었다.

차일진은 빨리 한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 적들을 멀리 끌고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눈속을 기여갔다. 풀대같이 가는 개암나무의 여린 가지가 눈속에 가로누워 차일진의 앞길을 방해하고있었다.

그는 가슴으로 개암나무가지를 떠밀고 손으로 밀어치우려고 허우적거리며 있는 힘껏 모지름을 썼다. 나무우에서 눈가루가 쏟아져 그의 몸에 덮씌웠다. 그 무게는 천만근으로 그의 몸을 내려눌렀다. 그의 코허리에서는 안경이 벗어졌다. 선뜩한 바람이 눈지방을 스치자 머리는 저절로 눈속에 떨어졌다.

그는 차거운 눈속에 얼굴을 박은채 까딱않고 누워있었다. 머리우에서는 방금 그의 몸에 눈을 쏟아버리고 홀가분히 허리를 편 개암나무가지들이 설그적설그적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리고있었다.

그는 혼몽한 의식속에서도 목메이는 어떤 슬픔과 한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울먹이며 팔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어느결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냥 허우적거리고있는 자기의 가슴앞을 자그마한 개암나무가지가 가로막고있고 그것을 넘지 못해 신고하고있었다.

차일진은 지나온 길을 굽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눈속에 떨어져있는 모자며 총이며 총탄의 우박을 맞고 눈우에 흩어져내린 썩정가지며가 모두 그대로 눈앞에 바라보였다.

차일진은 자기가 고작해야 두발자국도 되나마나한 거리를 기여왔으며 그다음은 여린 개암나무가지에 막혀 더 나가지 못하고있었음을 깨달았다.

차일진은 모든것이 이것으로 끝장나고있음을 의식하였다. 아, 겨우 스물네해를 살고 죽는 이 인생!… 차일진은 자기의 짧은 생애가 너무나 아까왔다. 혁명가의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보람찬것인가를 알게 되는 그 순간에 그는 이 모든것들과 영원한 작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이 아쉬움, 이 처절한 눈물겨운 비통함은 그가 세상앞에 떳떳이 머리를 들고 혁명가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되는 자기 긍지도 값높이 느끼게 하였다.

그리하여 차일진은 이 땅과 이 하늘, 지상의 모든것을 마지막으로 굽어보며 자기가 할수 있는 마지막 말을 조용히 뇌이였다.

《원정대는 어느만큼 갔을가? 적들과의 거리는 얼마나 멀어지고?

장군님께서 잠시라도 의식을 차리셨을가? 의식을 차리시면 이 차일진이 어디 있느냐고 찾아주실테지. 이렇게도 시름많은 차일진을 장군님께서 그리도 아껴주시다니…》

눈물은 귀밑으로 흘러내려 눈우에 조그마한 구멍을 파고 떨어져 들어갔다. 그것은 미구에 작은 얼음기둥을 만들며 눈속에서 솟아났다.

그처럼 날은 차고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져내렸다.

차일진은 장군님이 보고싶었다. 장군님을 한번 더 뵙지 않고는 영원히 눈을 감을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 그리하여 그의 눈은 점점 더 유리알같은 광채를 뿌리며 확대되였다.

머리우에 높이 드리워있던 하늘은 점점 낮아졌다. 푸른 공간은 어느덧 눈덮인 흰 대지와 맞붙어버렸다. 그는 견딜수 없이 숨이 가빠왔다.

진실로 어이없는 일이다. 한사람의 혁명가를 죽이는데 우주전체가 무장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차일진은 비장하게 몸부림치며 눈속에 그냥 떨어져내리는 고개를 쳐들고 원정대가 가고있을 뿌잇한 공간을 내다보았다.

원정대여, 장군님 모시고 잘 가시라. 원정대의 안정을 비는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 나라 인민뿐만도 아니리라. 저 해, 저 별들, 이 넓은 대지와 천고의 밀림, 잎새우의 흰눈까지 원정대의 안녕을 빌고있는것이다!

차일진은 최후의 비장한 한시각에 동통처럼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힘을 모아 벌떡 몸을 솟구었다.

장군님, 사령관동지!》

차일진이 마지막힘을 모아 부르짖는 목소리는 눈덮인 계곡에 떠올라 별로 크지도 못한 자그마한 산울림을 불러일으키다가 가라앉았다.

그다음엔 차일진의 눈앞에 모든것이 은빛색채로 나타났다.

산도 나무도 하늘도 땅도…

어쩌면 나무들은 그렇게도 찬연한 은빛광선에 둘러싸여 가지들과 잎새들을 늘어뜨리고 고요히 묵상의 세계에 잠겨있는것인가.

소름이 끼치도록 저렇게 차고 밝고 선명한 흰색채가 어쩌면 하늘땅의 모든것을 저렇게 뒤덮고있는가?

차일진은 자기의 몸도 은빛광채에 휘감겨있고 검은빛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그 신비한 세계우에 떠올라 안개마냥 가벼이 어디론가 흘러가고있음을 감촉하였다.

아? 흰 세계, 흰 세계, 흰 세계!…

차일진은 이 한 말을 그냥 중얼중얼 외웠다.

한달반동안에 걸치는 간고한 행군.

어디를 둘러보나 흰눈밖에 없는 북만의 광야를 헤치고 지나갔던 그 행군의 가지가지 모든 인상은 차일진의 의식에 사무치도록 흰빛으로만 남아 자기 생의 마지막 귀중한 추억을 더듬는 순간에조차 넓고 푸른 지상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아니라 그냥 온몸을 한기에 덜덜 떨게 하던 그 차디찬 흰빛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