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 회)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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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일진은 진실로 청해가 고마왔다.

《이보라구, 청해. 문득 성숙이의 말은 왜 끄집어내였어.》

차일진은 다시한번 청해가 성숙이의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차일진동지만 보면 성숙동무 생각이 나니까요.》

《하긴 내가 성숙동무의 도움을 많이 받은건 사실이지. 그러나 이젠 성숙이의 도움이 없이도 당당히 싸울수 있는 유격대원이란말이야.》

《그런 소린 말라요. 성숙동무가 죽을 기운을 써서 오늘같이 의젓이 가꾸어놓으니까 그 은공을 벌써 몰라보는군요. 동만에 나가면 모자벗고 사과를 하라요.》

《아니야, 난 그렇게는 못해. 내게도 자존심이 있거든.》

차일진은 기껏 버텨볼 심산이다. 그러면 청해에게서는 성숙이를 두둔하는 말이 끝없이 쏟아질것이다. 차일진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모른다.

그런데 청해에게서는 잠간 말이 끊어졌다. 맞춤한 잣송이를 발견하고 발볌발볌 가지를 더듬어나가느라 여념이 없었던것이다.

잣송이들이 땅에 떨어졌다. 차일진은 이쪽저쪽으로 뛰여다니며 잣송이를 주어모았다.

《어때요?》

《탐스러워. 콩알같이 여문 잣씨들이 통통히 배겼군.》

《그렇지요. 이걸루 이제 잣죽을 쑤어 장군님께 대접한다면… 야, 정말 좋겠네.》

《아무렴 좋구말구. 이 모든건 청해의 발기와 노력에 의한거지. 그런데두 성숙이가 있어야 잣죽을 쑤는듯이 생각하고있거든.》

《아니, 또 성숙동무를 거들어요? 정말 차일진동진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예요.》

《모르긴 왜 몰라. 사람이야 좋지. 성숙이와 나란히 세워놓는다면 그래도 이 차일진이편에 저울추가 기울걸.》

《힝, 정말 말할 재미가 없어요. 전번에 차일진동지가 장군님앞에서 비판받는걸 듣지 못한줄 알아요. 괜히 코떼우지 말고 겸손히 처신하라요.》

순진하기 이를데 없는 청해는 차일진의 꼬임수에 끌려들어 제법 흥분한 소리로 맞불질을 하였다. 그들은 이러니저러니 한참 론쟁을 하였다.

《가만, 차일진동지, 저기 적들이…》

청해는 나무줄기를 안고 몸을 돌리면서 바쁜 소리로 말하였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적의 대부대가 불무지를 보고 밀려들고있어요. 몇백명인지 모르겠어요.》

차일진은 잣송이를 걷어안고 어쩌면 좋을지 몰라 갈팡거렸다. 원정대원들은 적들이 다가오는줄도 모르고 장군님의 언몸을 녹여드리느라 고깔불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무에서 날쌔게 뛰여내린 청해를 보자 차일진은 다급히 웨쳤다.

《청해, 내가 적을 유인할테니 빨리 원정대에 가서 알리라!》

《아니, 안돼요. 적은 내가 유인하겠어요. 차일진동지가 가서 알려요.》

《안돼. 적은 내가 유인해야 돼.》

《그러지 말라는데두요. 차일진동진 동만땅에 나가야 해요. 성숙동무랑 기다리지 않어요?》

차일진의 가슴은 뭉클하였다.

청해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의 말은 차일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을 고이게 하고도 남았다.

《그따위 얼빠진 소리를 다시는 말라구. 청해, 어서 떠나라!》

《아니예요. 그래서는 안된다는데두요. 내가 나팔로 적을 유인하겠어요. 나팔소리를 들어야 사령부가 있는줄 알고 따라올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불무지연기를 보고 달려드는 놈들을 따돌릴수 없어요.》

짤막한 한순간이였지만 청해의 말은 어쩔수 없이 차일진의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지금은 나팔소리를 들어야 적들이 방향을 돌릴것이다. 몇방의 총소리로는 어방도 없다.

《청해, 그럼 내 얼른 갔다오지. 함께 적을 유인하자구.》

차일진이가 참나무숲에 채 이르기도전에 맞은편 등성이로 치달아오르는 나팔소리가 류랑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적들의 총탄이 그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원정대는 차일진의 련락을 채 받기도전에 나팔소리와 적의 총소리를 듣고 일제히 불무지를 눈속에 파묻고 일어섰다.

차일진은 가던 길을 돌따섰다. 원정대가 적의 기습을 눈치챈 이상 차일진은 그리로 갈 필요가 없었다. 어린 몸으로 적을 유인하고있는 청해를 도와야 하는것이다.

차일진은 눈속을 달리고 기고 딩굴기도 하면서 청해가 헤쳐가고있는 등성이로 치달아올랐다. 나팔소리는 힘차게 산발을 울리며 나무숲사이를 빠져나가고있었다. 적의 총탄은 비발치듯 수림속을 헤치고 날아들었다.

《장하다, 청해. 정말 장하다!》

차일진은 적의 총탄을 한몸으로 막을듯이 저만치 앞으로 헤쳐가고있는 청해를 뒤따라 허둥지둥 달리고있었다.

문득 힘차게 울리던 나팔소리가 뚝 끊어졌다.

《웬일인가?》

차일진은 열뜬 눈으로 앞을 굽어보았다. 적의 총에 맞은 청해가 엎어졌다 일어났다 하면서 비칠거리고있었다.

《청해야!》

차일진은 달려들어 청해의 몸을 받들어안았다. 가슴언저리로 흘러내리는 피가 군복자락을 벌겋게 적시고있었다. 청해의 얼굴은 종이장처럼 해쓱해졌다.

《청해, 청해!》

소년나팔수는 간신히 눈을 떴다. 그는 꿈결마냥 몽롱해지는 의식속에서 무어라 줄곧 외우며 손에 든 나팔을 입에 가져가려고 애썼다.

차일진은 청해를 둘쳐업고 달리면서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청해, 죽지 말고 살아야 해. 기어이 동만땅으로 나가야 해. 장군님 모시고 끝까지 혁명을 하자구!》

차일진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새겨들은듯 청해는 의식을 가다듬고 입에 나팔을 가져다대였다.

끊어졌던 나팔소리가 다시 울리였다. 차일진은 잔등에 솜같이 처져붙은 청해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나팔소리를 귀따갑게 들으면서 목메인 소리로 울부짖었다.

《청해, 어서 불라. 힘껏 불어.》

소년나팔수는 전신의 힘을 다해 불고 또 불었다.

《따따따 따따따…》

적을 향해 서리발처럼 날아가는 사령부의 돌격나팔소리다. 적은 기를 쓰고 따라왔다. 고개를 넘고 골짝바닥을 지나 다시 등성이로 치달아올랐다. 적은 악착스레 따라왔다.

나팔소리는 끊기지 않고 울려퍼졌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나팔소리는 뚝 멎고 차일진의 어깨너머로 나팔을 움켜쥔 청해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청해, 청해, 청해야!》

차일진은 달려가면서 등을 흔들어 그의 의식을 깨우려 하였으나 한번 멈춰버린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일진은 청해를 내려안고 다시금 안타깝게 그의 몸을 흔들며 소리쳐 불렀다.

어느 한순간 문득 청해가 눈을 떴다. 방금 의식을 잃고 나팔을 떨구어버린 청해같지 않게 령롱히 영채가 비낀 눈으로 차일진을 바라보고있었다.

《나팔.》

《응, 나팔은 여기 있어.》

차일진은 청해의 가슴우에 나팔을 놓아주었다.

《차일진동지, 적들은?…》

《념려 말라구. 우리가 적을 달고 고개들을 넘어왔으니 그새 원정대는 안전히 빠져나갔을거야.》

《됐어요. 그럼 됐어요…》

소년나팔수는 갑자기 숨가쁨을 느끼며 가슴을 들먹거렸다.

《우리가 딴 잣송이로 꼭 잣죽을 쑤어 장군님께 대접하라요. 그리고… 저 동만땅에 나가면 성숙동무에게 빌라요. 꼭 빌어야 해요.…》

《그러지, 그러구말구. 누구의 부탁이라구 지키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청해는 일어서야 해. 눈을 감아서는 안돼. 눈을 감지 말라구!》

소년나팔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숨은 멈춰졌다. 커다랗게 뜬 소년나팔수의 눈은 순식간에 거울처럼 번들거리며 하늘의 그 어느 한점을 지키고있었다. 얼기설기 얼크러진 수림과 그 사이로 트인 푸른 하늘이 소년나팔수의 눈망울에 드리워있었다.

《청해야!》

차일진의 애절히 부르짖는 목소리가 바람없이 잠풍해진 수림속으로 울려퍼졌다. 방금전까지 나팔을 움켜쥐고 적을 유인하던 사령부의 나팔수,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유격대의 돌격나팔소리를 울리던 어린 혁명가는 그처럼 애타게 몸부림치는 차일진의 울부짖음소리에도 응대없이 생의 마지막순간에 지켜보던 하늘의 먼 한끝을 고집스레 지키고있었다. 그 하늘의 한끝에 기어이 가닿아야 할 근거지땅이 나타나있었던가 아니면 장군님 모시고 언젠가는 가보리라던 그리운 조국의 모습이 생생히 비끼여있었는가.

《청해야, 너를 두고 내 어찌 혼자 간단말이냐? 너의 나팔만을 손에 들고 내 어찌 장군님앞에 나설수 있단말이냐? 동만땅, 그 그리운 사람들의 품으로 나는 돌아가지 못한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라!》

차일진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흑흑 삼켜가며 이미 굳어지기 시작하는 소년나팔수의 몸을 눈우에 반듯이 눕혔다. 그리고 이제 곧 뒤따라올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의 몸을 다리로부터 조용히 눈으로 묻기 시작하였다. 팔과 다리를 눈속에 묻고 가슴언저리로 눈을 떠올리는 차일진의 온몸은 헤아릴수 없는 슬픔과 억울함에 눌려 푸들푸들 떨렸다.

이제는 눈을 감지 못한 하얀 얼굴만이 희디흰 눈속에 그림같이 나타나있었다. 생의 기쁨과 희열로 반짝이던 어린 혁명가의 귀중한 마지막 한점을 영영 눈속에 묻는다고 생각하자 차일진은 가슴이 터질듯이 아파났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놈들에게 욕을 당할것이다.

《아- 아-》

차일진은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한데 그러모은듯이 처절히 뒤틀리고 혼탕이 된 비장한 목소리로, 가슴속의 비애를 퍼날리며 귀중한 어린 혁명가의 얼굴에 마지막 눈을 퍼올렸다.

《청해야, 우리 기어이 살아 혁명을 하마. 봄이 되면 천리길이라도 헤치고 달려와 너의 몸을 근거지땅에 날라가겠다. 후에는 광복된 조국땅에 날라가 혁명을 위해 나팔을 불다 숨진 너의 모습을 인민의 가슴속에 길이길이 심어주리라!》

차일진은 어린 혁명가의 나팔을 들고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잣송이를 모아 가슴앞에 그러안고 일어섰다. 세상은 너무도 휑하고 빈것 같이 느껴졌다. 머리우에 얼크러진 수림은 썩정가지마냥 거멓게 고삭아보였다.

수림의 상가지를 휩쓸고 지나는 바람소리는 그 누구의 애절한 통곡소리마냥 가슴속에 매달렸다. 수림의 틈사리로 올려다보이는 저 푸른 공간은 어쩌면 저렇게도 유리알처럼 번들거리기만 하는가?

차일진에게는 세상의 모든것이 숨을 죽이고 비장한 이 순간을 위해 깊이 머리를 숙이고있는듯이 생각되였다.

《청해, 이 밝고 명랑한 이름은 우리의 기억속에서만 남아있게 되였구나. 소란한 시절에 태여나 채 여물지 못한 팔다리로 가시돋힌 험한 세상을 헤가르다 문득 숨진 이 어린 생명을 위해 우리는 울고 또 울어야 하리라.》

그리고 차일진은 슬피슬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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