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회)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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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땀으로 얼룩진 눈길을 헤가르며 한치한치 톺아나가야 하는 간고한 행군은 옹근 한달동안을 이어 계속되였다.

북만땅에는 례년에 보기 드문 강설이 쏟아져내리였다.

인부들은 동지달을 넘기지 못하고 발구에 연장들과 허드레짐들을 걷어싣고 부랴부랴 산판들을 떠나갔다. 그리하여 천교령일대의 수백리안팎에는 인적이 끊기고 메마른 수림의 머리우로 간단없이 불어치는 눈바람소리만이 태고의 정적을 한결 더 짙게 하였다.

한흥권중대장은 시각마다 사위여가는듯 한 장군님의 안색을 살피며 벌써 몇번이나 사람들을 띄워 주위에 산판길이라도 없나 찾아보라고 하였으나 이미 한달이상 인부들의 통행이 끊기여 깊은 눈속에 죄다 묻혀버린 길을 찾아낼수가 없었다.

원정대는 천교령 동남지대로 통과하면서 몇번이나 산판길을 가로 지나왔으나 누구도 거기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바로 지척에 한달전에 연기를 뿜다만 인부들의 합숙이 있었으나 냄새로는 그것을 가늠할수가 없었다. 추위속에 모든것은 얼어붙고 자취를 감추고말았던것이다.

한흥권중대장은 오랜만에 원정대에 휴식명령을 내리고 장군님의 담가주변에 고깔불을 피워놓으라고 하였다. 대원들은 두사람씩 한조가 되여 재빨리 주변을 돌아가며 썩정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차일진은 원정대의 나팔수인 김청해와 한조가 되여 고깔불 하나를 피워놓았다. 장군님께서 성한 몸으로 원정대를 이끌고계실 때는 응석받이였고 그이께서 담가에 몸져누우신 후에는 내내 눈물만 짜고있어 한흥권중대장에게서 몇번이나 꾸중을 들었던 청해다. 그러나 지금은 열성스레 고깔불을 피워 장군님의 언몸을 녹여드리느라 그러지 않아도 잘 타는 불무지에 연신 입바람을 불어대고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빨간 색실로 곱게 장식을 한 나팔이 드리워있었다. 언제나 원정대에 씩씩한 돌격신호를 울리던 신호나팔, 장군님께서 촉한에 드신 후에는 그 나팔도 소리를 멈추고 불어치는 눈가루에 얻어맞은 소리만을 싸락싸락 울리고있었다.

눈우에 자꾸만 내리덮이는 커다란 개털모자를 시끄럽게 밀어올리며 불무지에 입바람을 불던 김청해가 살그머니 입속말로 차일진에게 속삭였다.

《차일진동지, 저 동만땅에 나간 오성숙동무랑 무사히 근거지에 도착했을가요?》

《뭐 누구라구?》

차일진은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성숙의 이름인지라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오성숙동무말이예요. 연길중대를 따라나간 녀대원말입니다.》

《무사히 가닿았겠지. 아무렴 우리처럼 고생이야 했을라구.》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성숙동문 괜히 떠나보낸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차일진은 소년나팔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하나싶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뽀얗게 재가 오른 그의 코언저리를 살펴보았다.

《오성숙동무가 여기 있었다면 장군님의 건강을 좀더 잘 보살펴드릴수가 있었을거예요. 우리에겐 오성숙동무만큼 지극한 사람이 없어요.》

《괜한소리, 한흥권중대장동무가 들어도 섭섭해할 말을 함부로 말라구.》

차일진은 불무지에 돌을 달구려고 장군님의 담가밑에서 식은 불돌을 꺼내였다.

《들으면 뭐래요. 성숙동무만 있으면 이런 때 잣죽이라도 쑤어 장군님께 대접하려고 했을거예요.》

《뭐 잣죽을?…》

차일진의 머리에는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 잣죽을 쑤어 대접해드리지 못한다 해도 우선 잣이라도 따서 마련해두었다가 다음번 휴식참에 잣죽을 쑨다면 오죽 좋으랴.

《이것 보라구, 청해. 우리 슬그머니 어디가서 잣이라도 몇송이 따볼가?》

《잣말이예요? 그것참 좋겠네. 그래 보자요.》

김청해는 중대장이 알아듣지 않았나 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흥권은 장군님의 담가 저편에서 눈우에 지도를 펴놓고 어딘가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연신 한숨을 내짓고있었다.

《가자요.》

김청해는 눈을 끔쩍하였다.

《그래.》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난 그들은 슬금슬금 옆으로 기여 참나무뒤에 몸을 숨졌다가 큰 잣나무가 바라보이는 밋밋한 등성이를 치달아올랐다. 잣나무밑에 이른 그들은 배낭을 벗어놓고 나무우에 기여오를 차비를 하였다. 처음은 차일진이가 나무에 오르려다 발을 붙일데가 없어 그만두고 차일진의 어깨를 밟고 청해가 올라갔다.

그새 행군에 지치고 굶주리기도 한 청해였지만 날쌔게 이 가지 저 가지를 휘여잡고 몸을 뽑아가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

《이봐, 조심하라구.》

《괜찮아요. 야, 저 잣송이. 새끼토끼처럼 통통히 여물었네.》

어느새 차일진의 눈앞에 잣송이 하나가 뚤렁 떨어졌다. 차일진은 눈을 헤치고 잣송이를 집어들었다. 까만갈색 반점으로 한벌 뒤덮인 잣송이를 손에 들고보니 다시한번 성숙이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청해의 말과 같이 성숙이가 이 원정대오에 함께 있었더면 정말 장군님의 건강도 좀더 잘 보살펴드릴수 있었을것이다. 얼마나 지극하고 성실하고 꾸준한 동무였는가. 그같은 녀성은 근거지땅에도 흔치 않았다.

언제나 가식이 없고 변덕을 모르며 순하게 생긴 두눈에 부드러운 생기를 띠고 자기의 힘을 바쳐 도울 일이 없나 하여 항상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친근한 눈매를 차일진은 잊을수 없었다.

남을 돕는데서 행복을 느끼고 일감을 찾아쥐여야 마음을 놓군하는 일로 빚어진 그 녀성을 차일진이 얼마나 사랑하고있었는지 남들은 다 알수가 없다.

바쁜 행군길에 깎지 못한 수염을 만져볼 때도 차일진은 성숙이를 생각하군 하였다. 차일진은 자기의 몸을 돌아보고 지나온 길을 더듬어볼 때면 성숙이의 존재를 매양 느끼고 기쁨과 행복으로 눈굽이 후더워졌으며 앞날에 있을 상봉을 생각하며 가슴을 조이기도 하였다.

성숙이, 그 진실하고 참된 녀성은 차일진의 살속에, 뼈속에 깊이 스며들고 녹아붙어 이제는 그와 분리하여 자기를 의식할수 없는 하나의 귀한 존재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라난 차일진에게는 성숙이의 그 지극한 보살핌과 살뜰한 애정이 그대로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숙의 존재를 몸가까이 느낄 때면 차일진은 마음이 놓이고 근심걱정이 덜어져 누우면 편안히 잠을 자고 눈을 뜨면 남다른 기쁨을 느꼈으며 견딜수 없는 육체의 피로가 덮쳐드는 때에도 락망을 모르는 우스개소리가 줄곧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던것이다.

그러한 성숙이를 어쩌면 그렇게도 섭섭하게 보낼수 있었던가? 차일진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느닷없이 가슴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듯 한 허전함과 후회를 금할수 없었다.

성숙이와 마지막으로 헤여지던 녕안촌의 동구길, 한쪽에는 반나마 허물어진 나무가리가 있고 맞은쪽에는 왕청중대의 녀대원들이 국수를 누르느라 벅작거리는 귀틀막이 있었던 구부러진 동구길로 성숙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달려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아픈 상처를 안고 성숙이는 천리길을 걸어갔을것이다. 자욱자욱 피를 흘리며 밟아왔던 그 길을 이번에는 눈물로 적시며 가야 했을 성숙이를 차일진은 다시다시 생각한다.

동만땅에 나가 성숙이를 대하면 무릎을 꿇고 그앞에 사정을 말하리라. 아니, 아니지. 사정을 말하기에 앞서 장군님께서 충고를 듣던 일 그리고 다시금 성숙이를 생각하며 마음을 괴롭히던 일들을 말하리라.

(청해, 고맙다. 이런 일에서조차 성숙이를 생각하며 성숙이의 참된 미덕을 말해준 청해를 내 쉽게는 잊을수 없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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