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제 2 장

불타는 성

11

(2)

 

그러나 그때 최익현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있었다. 지어 편지에 씌여진 글줄조차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전번에 대감께서 상감님을 만나뵈웁고 썼다는 편지가 도중에 왜놈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 놀라운 소식을 전하지 않을수 없어 다시금 붓을 들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대감께서는 무슨 소식을 적어보냈던지, 그리고 그 일로 하여 대감님의 신상에 화가 미치지나 않았는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전전긍긍하던중 오늘은 또 뜻밖에도 왕이 아관파천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놀라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알수 없고 그렇다 하며는 우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도 알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본데 의하면 왜군과 관군이 점점 더 충주로 모여들고있습니다. 대감께서 관군을 돌려 왜놈과 싸우게 하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되였는지 또 임금께서 전국의 의병을 불러일으킬 방책을 세워주시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되였는지 그 모든것을 이 시골에서는 알수가 없습니다. …》

린석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것이 다 물거품이 되였다. 어느 하나도 익현으로서는 똑바른 대답을 줄수 없다. 하물며 잃어진 편지쯤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랴.

지금 익현의 고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자기로서는 린석에게 아무 대답도 줄수 없다는것이다.

그랬다. 그때 왕을 만나고난 익현은 그래도 제딴에 큰일을 했다는 기쁨과 기대에 넘쳐있었다. 이제 임금의 어지로 린석이 8도의병총재가 되고 그렇게 되면 전국의 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게 되리라는 희열이였다. 린석이 그만한 일은 맡아수행하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소식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가도 이제쯤 내리셔야 할 어지가 내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 왕은 익현과 만나 한 말과는 전혀 딴 생각을 하고있었던것이다.

사실 그 나날에 최익현은 많은것을 모르고있었다. 왕이 자기에게 속에 없는 거짓말을 했으며 만난자체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있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오직 그의 열정적이고 사리정연한 론리에 마주앉기는 했고 듣기도 했지만 생각은 전혀 딴데 가있었다. 총체적으로는 왜인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것이였다. 그것들이 이제 또 자기에게 손을 뻗치지 않을것인가 하는…

그것은 이미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부터 생겨난 의식이기도 하였다. 명성황후가 지꿎게 그를 설복했던것이다.

일본은 비록 크지 않은 섬나라이기는 하지만 근간에 서방나라들과 교섭하고 통상을 하여 문명을 이룩하였다. 그들이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전라도민란을 손쉽게 진압하고 대국이라 자칭하던 청국을 파리때려잡듯 메치는것을 보라, 그것들이 조선이라고 가만두겠는가.

조선은 령토에서나 인구수에서나 크지 못한 나라다. 작은 나라가 나라로서 존재해있자면 의지할데가 있어야 한다. 그 의지할데가 어디인가.

로씨야다. 로씨야는 방대한 령토가 뻗쳐있고 강대한 군력을 가지고있는 나라다. 이제 동북지방에서 그들이 일본과 대결할것인데 그때에는 일본이 불피코 패할것이다.

그때 가서 로씨야가 우리의 자주권을 인정해주면 다른 나라들도 아니할수 없을것이다. 그러자면 미리부터 로씨야와 사업을 잘해야 한다. …

명성황후가 그를 위해 작으나크나 일은 해놓았다. 결국 그가 죽은것도 일본을 밀어내고 로씨야에 붙은데 있다. 이제 그 죽음을 헛되이 할것인가.

아닌게아니라 명성황후의 죽음으로 로씨야는 큰 덕을 보았다. 그가 죽음으로 하여 그전까지는 그래도 일본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환상을 가지고있던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등을 돌려대고 로씨야쪽으로 돌아섰던것이다. 그리하여 궁중에는 강력한 친로세력이 형성되였다.

로씨야공사 웨베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궁중의 친로세력을 리용하여 왕을 자기네 공사관으로 유인할 흉계를 꾸민것이다. 왕을 쥔다는것은 그대로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를 쥐는것이나 같은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춘생문사건때 미국에 조선을 떼우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던 웨베르였다.

춘생문사건이란 명성황후살해이후 미국공사 알렌, 언더우드, 아펜실러 등 현지조선침략의 하수인들이 미국인 덴니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사촉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미제의 상투적인 국가전복음모였다. 미제의 이러한 음모는 거사가 집행되던 당일날 궁중의 량심적인 관리들과 경각성높은 시위대병사들에 의하여 사전에 알려지게 되면서 도중에 중단되고말았다. 그것이 경복궁의 동북쪽문인 춘생문에서 벌어졌다고 하여 《춘생문사건》이라고 하는데 생각만 하여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로 후회가 되는 웨베르였다.

로씨야가 무엇때문에 그들에게 선코를 떼운단 말인가. 미국은 대양건너 멀리에 있는 나라요, 일본은 바다 한가운데 처박힌 섬나라다. 하물며 장차 그들과 세계제패를 위한 싸움을 벌려야 할 로씨야가 아닌가.

그후부터 웨베르는 고종을 끌어당기기 위한 맹활동을 벌렸다. 때마침 사처에 의병이 터졌다. 그는 우선 《공사관호위》라는 구실로 인천에 있던 해병들가운데서 150명을 서울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궁중의 친로세력들을 리용하여 왕과 왕세자에게 자기 의사를 부단히 강요하였다. 그들이 자기네 공사관으로 넘어오기만 하면 신변안전을 절대적으로 담보할뿐아니라 독립국가의 존엄은 물론 군주로서의 실권을 보장해준다는것이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2월 11일 새벽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을 때 왕은 문앞에 갖다댄 큰가마에 슬며시 들어앉았다. 그가 드문히 타군하던 보련이 아니라 새로 꾸미기는 했지만 일반궁녀나 공주들이 타는 덩이다.

그것이 왕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왕이 보련이 아닌 궁녀의 가마를 타다니… 눈물이 났다. 아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 처지가 너무도 가련했다.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하는것이다.

그것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이후부터 줄곧 느껴온 불안이였다. 그를 죽여놓고도 이렇다하게 큰 저항을 받아보지 않은 일본은 다음부터 줄곧 왕을 노리고있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때라도 손을 대겠다는 자세였다.

왕이 그것을 모를리 없다. 그렇다고 이미 로씨야쪽으로 기울어진 형세를 되돌릴수 없고 더구나는 자기 안해를 죽인 왜놈들과 손을 잡을수 없었다. 싸우자고 해도 싸울수 없다. 그럴 힘이 없는것이다. 전번에 최익현이 의병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그것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의병이란 무지한 농군들의 란동으로밖에 리해가 되지 않는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가마에 앉은것이다. 아무래도 그중 믿을데가 로씨야밖에 없다고 생각돼서였다.

밝은 낮에는 갈수가 없다. 알기만 하면 궁중의 대소관리들이 뛰여나오고 거리의 백성들이 길목을 막아설것이기때문이다.

이제는 형체를 가려볼만큼 날이 밝았다. 그때 소리없이 가마가 들리며 활짝 열려진 영추문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도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궁문을 지키던 파수군들조차 별로 눈을 팔지 않았다. 궁녀가 새벽녘에 궁밖으로 나가는것이야 응당히 있을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때 가마안에 임금이 타고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다. 지어 그안에는 왕뿐아니라 새로 왕비로 된 이전의 상궁 엄씨 그리고 왕세자 리척까지도 타고있었으나 그 역시 알지 못했다.

바로 그렇게 빠져나간 궁녀의 가마가 한때 세상을 그토록 소란케 한 아관파천의 단행자로 지탄되게 될줄 누가 알았으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비겁하다고 해야 할지, 한나라의 최고집권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제 궁실을 버리고 자국주재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을 가는 거사가 어쨌든 성공적으로 거행되였다.…

최익현이 아관파천소식을 들은것은 바로 그날 아침이였다. 충격적인 소식에 격한 그는 그길로 의정부청사로 달려갔다. 김홍집총리를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자는것이였다. 그가 한 나라의 대신일진대 임금이 없어진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할것이 아닌가.

그러나 홍집은 청사에 없었다. 어제 밤 숙직을 서고 집에 들어갔다는것이였다. 하는수없이 초헌을 돌려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집에 도착하니 그 부인과 딸이 마주 달려나오며 눈물부터 쏟아붓는것이다.

《대감나리, 이 일을 어쩌면 좋소. 그 어른이 임금께서 부르신다며 아라사공사관으로 가셨다오. 글쎄 그 길이 죽으러 가는 길이라고 제입으로 말하면서 말짱히 새옷을 갈아입고 나가셨소. …》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로씨야공사관으로 가는 길이 죽으러 가는 길이라구?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갔다구?…

다시 걸음을 돌렸다. 로씨야공사관이 있는 대정동으로 걸음을 빨리, 빨리…

그제야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저 친로파놈들이 기어이 우리를 떠밀어냈구나 하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저들끼리 새 정부를 세웠단 말이지, 벌써 친로파정부가 세워졌단 말이지. 그러니 김홍집령상이 위급하다. 그야말로 친일친로를 다 반대한 사람이 아닌가.

정부의 요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친청, 친일, 친로 하면서 저마다 제가 의지할데만 찾던 때다. 그런 속에서도 제힘으로 나라를 구원하고 어떻게 하나 국권을 세워보자고 애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홍집이다. 그는 벌써 젊은 시절에 이름있는 관리로 지목되여 내우외환이 거듭되는 때에 많이 외교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왕의 총애를 얻었다. 한창나이때 그는 벌써 좌의정, 우의정, 판중추부사의 관직을 다 지니고 쉰두살에는 벌써 내각총리, 군국기무처총재를 겸임하며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사업을 꾸준히 밀고나갔다.

최익현이 그를 특별히 존중하는것은 내심 변함없이 간직하고있는 반일사상이다. 그는 왜놈들이 《내정개혁》안을 강요할 때에도 내각회의에서 떳떳하게 《오늘 상하가 원쑤갚을 생각을 잊지 말아야만 비로소 왜적의 침입을 막고 오늘의 난국에서 벗어나 나라의 존엄을 지켜낼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바로 며칠전에는 정부군의 의병대《토벌》을 반대하여 군부대신 조희연과 대판 언쟁을 벌렸다.

군부대신이면 응당 총리의 지시에 복종해야 하겠으나 희연은 군사에 관한 일은 일본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며 땅땅 맞선것이다. 그로 하여 홍집은 더더욱 일본사람들의 눈에 나게 되였는데 외형상 숙어드는체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항상 일본을 따라앞서야 한다는 지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지금 위태한 지경에 처했다. 아까운 사람을 빨리 구원해야 한다.…

익현이 이런 생각을 하며 초헌을 내몰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벌써 일이 다 끝난 뒤였던것이다.…

그날 로씨야공사관에 들어가 친로파세력들로 정부구성을 발표한 왕은 즉시 나머지 세력들을 불렀다. 전직에는 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나 현직에는 아무데도 속하지 않는 친일분자들이였다.

조희연, 유길준, 장박… 그런 사람들속에 섞이여 김홍집도 함께 가고있었다. 모두가 그곳에 가면 죽을수 있다는것을 알고있는 사람들이였다. 외딴 곳에 가서 조직된《정부》가 본궁에 남아있는 권세있는 기존세력들의 반발을 받으리라는 뻔한 사실앞에서 속수무책하고있을리는 만무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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