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2 장
불타는 성
10
(1)
《이제야 오십니까. 안색이 퍽 좋지 않습니다.》
린석이 방에 들어서자 리씨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하였다. 지금 그들이 들어있는 객사의 한 구석방이였다.
《뭘 마실게 없나? 속이 타서 그러니 한잔 가져오라구.》
린석이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리씨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데 리씨가 아래목자리에서 하얀 단지를 끌어내였다.
《여기 있습니다. 술을 드시기 전에 이것부터 맛 좀 보시우.》
《그게 무언데?》
《십전대보탕입니다. 몸에 좋다고 하니 이제부터 몇달 잡숴보시우.》
《십전대보탕? 로친이 정신나갔나, 여기가 어디라구? 그런걸 할 짬이 있으면 나가서 의병들 도울 일이나 하라구.》
어느새 옛 버릇이 되살아났다. 그렇지 않아도 전장에서 뻐젓이 부부살림을 하고있는것이 죄스럽고 쑥스러워 사람들 보기가 무안한 린석이다.
그러나 리씨는 태연자약이다. 그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김이 문문 나는 단지에서 탕약을 공기에 담아 입앞에 갖다대였다.
《의병대장을 돕는 일은 의병대를 돕는 일이 아니우? 그렇지 않아두 군수장이랑 중군장이랑은 대장님이 앓아눕지 않게 잘 돌봐드리라구 신신당부합디다. 자, 어서 맛보시우. 한끼에 한공기씩 하루에 세번은 마셔야 합니다.》
《로친이 웬일이야. 제법 훈시까지 하는군?》
《령감이 벌써 환갑나이입니다. 그런데 신상에 병이 생기여 몸이 붓고 걷지를 못하면 되겠소? 그런 꼴로 의병들앞에 나서기 좋소. 왜놈들이 보면 또 뭐라고 하겠소?》
린석은 다시한번 놀랐다. 그는 다리가 자주 붓고 그때문에 걷기 불편한 때가 많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할 겨를이 없었고 말한댔자 쓸데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안해가 언제 알고 말을 걸어오는것이다.
《내가 다리를 몹시 절던가?》
《다리만 절면 좋게요. 얼굴을 노상 찡긋하고 성을 자주 내군 해요.》
《내가 그렇단 말이요?》
《그렇잖으문. 자, 어서 드시우.》
마침내 공기가 입술에 와닿았다. 그렇게 마셔서인지 맛이 좋았다. 씁쓸하면서도 달고 향기로왔다.
약치고 단약 없고 병치고 기분좋은 병 없다고 했지만 오늘은 약도 달고 기분도 좋았다. 하면서도 말만은 전혀 딴소리를 했다.
《에에, 약맛 쓰다. 이런걸 해주자고 예까지 따라왔나?》
《그렇잖으문요. 내가 아니면 누가 해줄 사람이 있겠어요?》
《허허, 이것 보아라. 나한테 딴 녀자가 없는줄 아나? 그만한 약 달여줄 녀자야 얼마든지 있지.》
《알구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백인들 못 구하겠소? 하지만 나만한 녀자는 다시 없을걸요. 내가 옛말 한마디 할게 들어보시리까?》
리씨가 약을 따르다말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소리내여 웃었다.
《옛날 어느 고을에 당신처럼 병도 있고 첩도 하나 달고있는 량반이 한사람 살고있었대요. 그 량반이 병을 고치자고 본처에게 약을 달이게 했는데 매번 그 량이 같지 않더랍디다. 그래서 이번에는 첩에게 약을 주면서 달이라고 했더니 아닌게아니라 번마다 량이 꼭같더라지요. 그것이 하도 신기하고 사랑스러워서 몰래 문구멍을 내고 훔쳐보았더니 글쎄… 이것 보라요. 그 녀자가 량이 많으면 쏟아내고 적으면 물을 붓고해서 꼭같이 맞춰놓더랍니다. 첩이란것은 다 그래요.》
리씨가 말을 해서 이번에는 린석도 허허 따라웃었다. 그 말에 의미심장한데가 있었던것이다. 린석이 첩을 두지 않아서 그게 어떤것인지는 다 모를지라도 리씨의 진심만은 뜨겁게 안겨왔다. 그것이 가슴을 흥그럽게 하면서 시라도 한수 지어보고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요즘의 전국만 보아도 그럴만하다. 놈들이 련속 얻어맞으면서도 잠잠한것을 보면 역시 힘이 딸리는 모양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싸움은 단순히 병기나 기술의 우세로만 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이다. 이것을 의병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여기 충주뿐아니라 전국의 의병들에게 알려주어 힘이 되고 용기가 되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밤도와 썼다.
의병들에게
마음과 힘 다하는것 오직 우리 도리일세
병기가 좋고나쁨 그다음에 론할거지
애국정성 지극한가 다만 못내 근심되고
형세의 강약으로 어렵다 하지 말라
례의로 전통이은 이름높은 우리 조선
기만만 일삼는 저따위 섬오랑캐
흥망과 성쇠를 하늘에만 기탁하랴
사람이 제 할일을 힘껏 해야 하느니
다음날 아침에 그것을 가지고나가 여러 사람들에게 읽게 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즉시 여러통 복사하여 부대들에 나누어주고 다른 의병대들에도 보내게 하였다.
그렇게 하고났을 때 중군 리춘영이 문득 제기하였다.
《알아본데 의하면 전번 야간공격전투이후 놈들은 포위를 풀고 지금 달천에 집결되여있다고 합니다. 특히 〈토벌대〉대장 이다찌놈은 그날 달천으로 도망하여 서울에 원병을 요구하고는 소식을 기다리며 온탕치료로 시간을 보내고있답니다. 이번에 그놈을 요정내자고 합니다.》
린석은 묵묵히 듣고있었다. 그것은 그도 이미 모르는바가 아니였다. 그런데 먼저 그곳을 치자는데는 새로운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를테면 공격에로 나가겠다는것이다.
사실 공격에 대한 론의는 그때까지도 없지 않은것이 아니였다. 따지고들면 서상렬이 떠나간 다음에도 암암리에 론의가 계속되고있었다. 김백산이 그랬고 사석이 그랬다. 특히 그들은 충주 30리밖에 있는 가흥을 치자고 몇번이나 제기해왔다. 그곳 한강나루터에 서울로 실어가는 식량이 수만석이나 쌓여있다는것이였다.
듣기에 귀맛이 당기는노릇이였다. 몇차례 론의도 있었다. 문제는 방어냐, 공격이냐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번져지지 않았다. 린석이 반대했던것이다. 본질은 공격에로 나가자는것인데 그자체가 위험천만한노릇이기때문이였다. 쌀 몇섬을 위해 여차하다가는 충주성전체를 위험에 빠뜨릴수 있기때문이였다. 그래서 공격에 대한 문제가 더 론의되지 않고있었는데 이번에 춘영이 달천에 대한 공격문제를 제기한것이다.
《제가 이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것은 우선 저 이다찌놈이 〈토벌〉의 괴수이고 개별적으로는 우리 대장님의 적수이기때문입니다. 바로 그놈을 요정내는것이 놈들의 기수를 꺾어버리고 사기를 저락시키는 기본요인으로 되기때문입니다.
다른 한가지 리유는 전시에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있는것이 전술적으로 불리하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도 한때 반대했던것인데 이제는 형세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너무 성에만 의지하고있습니다. 새도 오래동안 한 나무에 앉아있으면 살에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공격에로 나갑시다. 전번 야간습격전투때처럼 대담하게 나가면 이길수 있습니다.》
그의 열렬한 호소가 만사람의 찬동을 자아냈다.
다만 한두사람이 그렇게 해서 력량을 분산시켰다가 성이 갑자기 불의의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우려를 표시했지만 인차 수그러들었다.
그리하여 달천에 대한 공격문제가 일단 락착이 되였다. 그러나 그 공격을 누가 맡아하겠는가 하는데서는 보다 론의가 심각해졌다. 중군장 리춘영이 자기가 나가겠다고 주장한때문이였다.
그것은 류린석에게도 뜻밖이였다. 그러다가 춘영이 잘못되면 어찌겠는가 하는 두려움부터 앞섰다.
싸움이란 그런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필승을 기하기 힘든것이 싸움인데 설사 이기는 싸움에서조차 누가 살고죽느냐 하는 문제는 누구도 장담할수 없는것이다. 그런데 춘영은 중군장인데 비하여 전투경험이 적다. 그를 저 사지판으로 선뜻 떠나보낼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춘영은 지꿎게 자기가 가겠다고 고집을 했다. 결국 그 문제는 락착을 짓지 못한채 모임을 마치고말았다.
후에 린석이 춘영을 따로 만났다. 그가 왜 기어코 주장을 하는지 알고싶어서였다.
춘영은 교사에게서 질문을 받는 교생처럼 고개를 수굿하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요사이 저에게 생각되는것이 많습니다. 싸움은 저 김백산과 같은 평백성들이 많이 하는데 나는 중군장으로서 하는 일없이 자리만 지키고있자니 그것이 가슴에 걸립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꼭 중군장이 싸움에 앞장서라는 법이야 없지 않나. 더구나 자네는 싸움을 혼자서 맡아 지휘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야.》
《다른 리유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 왜놈들이 포사격을 할 때 그 소리에 놀라 전률하였던적이 있습니다.…》
그가 언제인가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새기고나서 계속하였다.
《저는 그때 일을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병이며 중군장인가 하는 수치감에 늘 얼굴을 붉히군 합니다. 남에게 요구하고 호령하기 전에 자기부터 떳떳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그 수치를 씻자고 합니다.》
그것이 린석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는 춘영의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어깨를 힘껏 두드려주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니 고맙네. 나도 더 말리지 않겠네. 하지만 몸만은 주의해야 해. 중군장이라는것을 잊지 말라구.…》
이렇게 되여 리춘영이 달천싸움의 지휘자로 나서게 되였다.
린석이 그의 지휘능력과 전투경험이 부족한것을 고려하여 각 의병대들에서 우수한 싸움군들을 선발하여주었다. 특히 백산의 선봉대성원들이 많이 보충되였다. 도합 사오백에 달하는 큰 부대였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성문밖까지 따라나가 떠나는 그를 바래주었다. 그때 어쩐지 전번에 의병장들과 작별할 때 부른 《대동강》시가 떠올랐으나 부르지 않았다. 공연히 춘영의 마음을 들쑤셔놓아 심란해지지 않게 하자고 해서였다.
이렇게 성을 떠나간 리춘영은 부대를 이끌고 달천을 에둘러 숲속길로 접어들었다.
달천이란것은 충주성을 한옆으로 끼고도는 한강의 크지 않은 지류인데 거기에서 10리쯤 상거한 농촌마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충주성에서 얻어맞고 쫓겨난 왜군들이 바로 이 달천방향으로 후퇴를 하여 휴식을 하면서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있는것이다.
바로 이것을 내탐한 리춘영은 숲속길로 에돌아 놈들이 마음놓고 휴식하고있는 마을을 대낮에 들이쳤다. 한참 점심을 먹고 식곤에 취해 강변에 나와 휴식하고있던 왜병들이 숲속에서 갑자기 튀여나오며 만세를 웨치는 의병들의 기세에 혼비백산이 되였다. 번개처럼 달려들어 찌르고 베고 휘둘러대는 창칼의 공격에 왜병들은 미처 정신차릴새도 없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