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 2 장
불타는 성
9
(3)
이번에는 백산이 아연해졌다. 성을 내놓다니, 어떻게 차지한 성이기에 세사람의 생명과 바꾼단 말인가, 바로 그 세사람이야말로 성을 빼앗는데 피 한방울 바친것 없고 오히려 방해만 놓지 않았는가, 그들보다 더 귀하고 아까운 사람들이 이 성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하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고 하여 저 홍정식이네들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역시 류린석대장이나 안승우군수장에게는 다같이 귀중한 인물들이다. 물론 자기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좋지 않다는것때문에 더구나 그들을 제물로 바칠수 없지 않는가. 평시에 의가 좋지 않았다 하여 자기네 사람이 왜놈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라고 내버려둘수 없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저들이 어떻게 잡히게 되였는가?》
백산이 물었다. 와다나베는 그것이 깨고소한듯 히죽 웃었다.
《너희네 조선족들이 우리 황국신민의 지혜를 따를수 있는가.》
《내가 그들을 만나게 해달라.》
와다나베는 백산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그것만은 승인한다는듯 뒤쪽에 대고 손짓을 했다. 이윽하여 포승줄에 묶이운 세사람이 함께 끌려왔다.
백산은 말에서 내렸다. 놈들에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한 흔적이 력연한 세 얼굴이 비장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있었다.
《어떻게 붙잡히게 되였소?》
《잘못했소. 우리가 최대감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야마무라를 찾아갔는데 그놈이 무기값을 돌려주겠다고 하면서…》
홍정식이 재빨리 설명을 했다. 그러나 백산은 벌써 그들의 생각을 앞질렀다.
《야마무라가 고자질을 했지? 그놈이 틀림없소.》
《체포될 때에는 함께 있었는데 그다음엔 모르겠소. 왜놈종자를 믿은 우리가 못난것들이지. 죽어 마땅하오만 원통하기 그지없소.》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당신들을 살리자면 저 성을 내놓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하오.》
《우릴 제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해주시오. 아니, 선봉장님이 우리 목을 베주고 가오. 저 왜놈의 손에는 죽지 않겠소. 절대로 그렇게는 못죽겠소.》
순간 백산은 가슴을 찌르는듯 한 아픔을 느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자기를 죽인다고 칼을 빼들었던 정식이다. 또 얼마전에는 왜놈도 사람마다 다르다며 야마무라에게 환상을 가졌던 그다. 그러던 그가 지금 자기를 쏴달라고 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오직 그가 같은 조선사람이기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피줄을 타고나며 일단 타고난 다음에는 제 마음에 드는데 따라 변경하지도 골라잡지도 못한다. 곧 영원히 하나로 되여야만 하는것이다.
《최대감의 봉서는 어떻게 되였는가?》
《빼앗겼소. 그러나 내용은 알고있소.》
《그에 대해서 꼭 듣게 되길 바라오.》
백산은 이렇게 말하고 바람처럼 말우에 뛰여올랐다.
《와다나베, 래일 이맘때 다시 만나자. 그때 대답을 주겠다.》
《무엇이? 우린 기다릴수 없다. 이다찌중좌님은 참지 못하는 성미시다.》
《참으라고 하라. 그렇게 덤비다가는 성 하나를 공짜로 얻는 기회를 놓칠수 있다. 저들의 목숨을 당신들이 쥐고있는데 바쁠것이 있는가?》
《네놈들이 밤에 또 기습하려고 하는가?》
《저것들은 이미 우리를 배반했다. 봉서도 빼앗기고 비밀도 다 루설했다. 그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다만 나는 우리 대장님의 동의를 얻자고 할뿐이다.》
《좋다. 명심할것은 너희들이 또 무모하게 도발을 걸어 헛된 죽음을 말라는것이다. 우리는 필요하면 성을 무자비하게 폭파하고 일시에 점거할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사람이 죽는것을 바라지 않는다. 의병들이라고 하여 왜 다 나쁜 사람이겠는가. 그에 대해서는 나도 이다찌중좌님께 충분히 납득시키겠다.》
백산은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하고 성에 되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질벅하니 젖어있었다.
린석 이하 모든 의병장들이 그를 뜨겁게 맞이했다. 그때까지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린석은 성문밖까지 마중나와 백산을 뜨겁게 포옹했다.
《수골 했네. 그래 저것들이 뭐라고 하던가?》
백산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것이 아니였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앞에 놓여있었다.
《정식이 그녀석이 끝내 그 모양이 되였단 말이지. 최대감의 편지까지 빼앗기구?》
린석이 듣고나서 격분하여 소리쳤다.
《편지가 어떤 내용이였는지 알기는 했대?》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편지가 놈들에게 들어간 이상 해당한 대책을 다 취했을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그들을 구원하는것과 함께 성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것이 급합니다.》
《그것들을 구원한다구? 흥, 무엇때문에? 그들보다 더 값진 사람들이 이 성을 위해 죽었는데 이제 내놓아? 하물며 의병대의 군자금까지 고해바친 그것들이 아닌가.》
린석이 성이 나서 고아대자 옆에 섰던 의병장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것들은 이미전부터 왜놈들과 내통하던 밀정이 틀림없소. 내버려둡시다.》
《제천에서 선봉장에게 칼을 빼들 때부터 그들은 의병대의 적이였소. 성하구 바꾸다니, 어방도 없지.》
의병장들이 떠들수록 안승우나 리춘영이들만은 얼굴을 수굿하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때 김백산이 나섰다.
《여러분네들의 말씀을 리해합니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제가 떠나려고 할 때 정식군은 저에게 자기들을 쏴달라고 하였습니다. 죽어도 저 더러운 왜놈에게가 아니라 조선사람의 손에서 죽겠다는것이였습니다.… 사람이 전에는 어떻게 살았든 최후의 순간에 이렇게 나올수 있는것은 오직 한겨레, 같은 조선사람의 피줄을 타고난때문입니다. 우린 어떻게 하나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제가 구태여 하루밤이라는 시간을 얻어낸것도 바로 그때문이였습니다.》
좌중의 분위기가 일시에 달라졌다. 그들 역시 모두가 한겨레이며 모두에게 하나의 피줄이 통하고있음을 느낀 모양이였다. 류린석마저도 지금 몸에 흐르고있는 피가 그와 한줄기로 이어져있는듯 백산을 이윽토록 쳐다보았다.
《또 밤사냥을 하자는것인가? 하지만 놈들도 그쯤한 예견은 하고도 남음이 있을터인데?》
어느새 기분이 눅잦혀진 린석이 물었다. 역시 어쩔수없이 그에게로 향해가는 믿음이였다.
《물론 종전처럼 부분적으로, 산발적인 방법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전부대가 일거에 총공격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둠속에서 총을 쏘지 못하는 왜놈들에 비하여 도창무기로 단병접전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 의병대에게 백번 유리한 방법입니다.》
《히야, 그것 참 멋진 전법이군. 그걸 왜 이제야 내놓나?》
《해봅시다. 그렇게 하면 될수 있습니다.》
백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의병장들이 찬성해나섰다. 참으로 대담하고 기발한 생각이라는것이였다.
린석의 경우도 다를바 없었다. 전부대가 일시에 야간공격을 한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도 신기했지만 왜놈들에게는 상상밖의 일일것이다. 벌써부터 신심이 넘쳤다.
과연 그날 밤 공격전투가 조직되였다. 김백산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대의 기본력량이 놈들의 진지를 멀리 에돌아 은밀히 기동하였다. 그사이 일부 부대들은 앞쪽에서 말을 타고 좌우로 달리기도 하고 조총도 쏘아대며 소란을 피웠다. 그때마다 놈들은 어방대고 보총이며 기관총을 쏘아대며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다.
바로 이것을 노린 의병대는 새벽녘이 되자 일시에 놈들의 병영으로 달려들었다. 그때에야 곤죽이 되도록 잠에 들었던 놈들은 벼락처럼 달려들어 창칼을 휘둘러대는 의병들에게 죽탕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동안 외지에 나와 싸움에 시달릴대로 시달렸던 왜병들은 이렇다하게 총도 몇방 못 쏴보고 허우적거리다가 뒈져갔다. 그런 속에 홍정식이네들을 빼내오기 위한 기습조는 예상보다 훨씬 쉽게 손끝 하나 다친데 없이 무사히 전원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다른 전과도 예상외로 컸다. 그것이 린석으로 하여금 하늘에라도 날아오를듯 기분을 들띄워주었다. 보라, 싸우면 이길수 있다, 저놈들이 다시는 의병대를 얕보지 못할것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성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린석은 결코 들떠있지만 않았다. 그날 정식이네들이 불려올 시각 그는 전에없이 선화당안팎에 많은 의병들을 배치하고
그들이 대문가에 나타나자 린석의 눈살이 대뜸 곧추 서고 많지 않은 수염이 자개풍을 일듯 움씰거렸다.
《괘씸한 놈들, 어디에 갔댔느냐?》
고개를 수굿하고 들이대는 소리가 땅속에서 울리듯 웅글었다.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에 형의가 하나씩 차례지고 바줄이 몸에 감기고 형리들의 매때릴 준비가 완성되였다.
린석의 목소리가 더 웅글어갔다.
《왜 대답이 없느냐. 어디에 갔댔어?》
《저, 적진에… 속히워서 붙잡혀갔댔습니다.》
《무슨 말을 했지? 놈들에게 우리 실정을 다 고자질했겠다?》
《특별히 말한것은 없습니다. 그들도 이미 다 알고있었습니다. 다만 최익현대감이 보낸…》
《편지를 빼앗겼지? 저런 괘씸한 놈 보았나. 네가 그 편지내용을 알고있느냐?》
《대감께서 봉인하시기 전에 그것을 저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촌각이 급하다고 하면서도…》
그가 편지내용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린석을 더 격분하게 하였다.
《그런즉 전하께서 하신 말씀도, 최대감이 두 대신에 대하여 전하께 상주하신 내용도 다 왜놈들의 손에 들어갔단 말이지? 저런 쳐죽일 놈들…》
린석이 참지 못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데 그대로 칼이라도 잡히면 당장 목을 칠 기상이였다.
하다가 아무것도 보이는것이 없자 다시 피대를 돋구었다.
《너의 죄과로 말하면 이미전에 처형해야 할것이였지만 부친 홍재우의 이름을 보아서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효과가 없게 되였다. 네가 왜놈과 친하여 스스로 화를 청한것이니 하늘이 만들어준 화는 피할수 있어도 자기가 만든 화는 피할수 없는것이다. 할말이 있느냐?》
세사람이 한꺼번에 머리를 조아렸다.
린석이 이번에는 옆에 앉은 안승우와 리춘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중군은 이의가 없는가? 군수장은? …》
역시 대답을 못했다. 이것은 그들을 사형하는데 찬성한다는것이다. 그들로서는 할말이 없게 된것이다. 이로써 홍정식이네들의 운명은 결정된것이나 다름없게 되였다.
바로 그때 대뜰 한끝에 앉았던 백산이 무릎을 꿇고 상체를 들었다.
《창의대장님, 감히 제의를 하는바 다시한번 생각을 깊이 해주기 바랍니다. 그들이 과오를 범한것은 사실이지만 노기를 푸시고 한번만 용서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용서? 저것들한테는 이미 용서도 몇번이나 해주었는데 또 무슨 용서인가?》
《대장님, 우리가 그들을 적들의 손에서 구원해내올 때에야 이미 용서를 해주어서 한 일인데 이제 구태여 죽일것이 무엇입니까. 중요한것은 이제 기회를 주어서 죄과를 씻도록 하는것입니다.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수 있습니다.》
린석은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원래 처음 그의 생각도 정식이네들을 사형에까지 처하자는것이 아니였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에 왕이 했다는 말도 있고 대신들에 대한 의논도 있었다 하는데 그 모든것이 왜놈들의 손에 들어갔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당장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것 같았다. 그래서 불호령도 내린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선봉장이 사정을 한다. 그야말로 정식이네들과 옹이 맺힌 앙앙불락의 사이가 아니였던가.
《왜놈의 위험성에 대해서야 선봉장이 이미 루차 경고한바가 아니였던가?》
린석이 다시 소리쳤다. 그때에는 이미 백산이 아니라 정식을 바라보고있었다.
정식이 그 소리에 놀라 머리를 굽혀 인정했다. 가슴이 터지지만 할수 없었다. 백산에 대해서만도 그가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런데 지금은 벌써 몇번째나 구원을 받는다.
《좋다. 너희들의 소원을 말해보라.》
《저희들이 죽을 죄를 지은것은 사실입니다. 왜놈의 종자를 사람으로 믿고 왜놈도 사람나름이라고 생각한것이 첫째 잘못입니다. 그리고 그놈들의 가짜총 몇자루에 속아 숱한 군자금을 들이민것이 둘째 잘못입니다. 이번에 서울을 떠나올 때 최대감께서는 편지를 빨리 전달하라고 하면서 그 중임을 저희들에게 맡겨주었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없애버려야 하겠는데 그만 놈들에게 빼앗겼으니 그것이 셋째 잘못입니다. 이 모든것을 합치면 당장 목을 벨 죄당참수에 해당된다고 인정하며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방금 선봉장님이 말한바처럼 한번만 기회를 주어 용서를 해준다면 기어이 야마무라놈을 복수하고 돈도 찾은 다음 다시 와서 벌을 받겠습니다.》
《벌을 받겠다구?》 린석이 되받아외우고 허허 소리내여웃었다.
《네가 진실로 잘못을 깨닫고 복수까지 한다면 칭찬을 받아야지 벌을 받을게 있느냐. 다만 그것이 헛맹세이거나 눈가림으로 요행수를 바라고 하는 말일것 같으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될것이다.
예로부터 부모의 령은 거역해도 나라를 파는 역적은 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너는 부모의 령도 거역했고 나라를 파는 죄까지도 저질렀다. 그렇지만 이제 너를 놓아주려고 하는것은 오직 너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자고 해서이다. 이 말뜻을 알수 있겠느냐?》
《가슴에 새겨두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물러들 가라. 너희들이 스스로 찾아오기 전에는 내가 먼저 찾지 않을테다.》
말이 끝나자 홍정식이네들은 뜰우에뿐만아니라 좌우에 늘어선 의병들을 향하여 거듭 인사를 하며 밖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