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 회)

제 2 장

불타는 성

9

(2)

 

리춘영과 안승우들이 들어왔다. 춘영이 먼저 벌어진 사태를 짐작하고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부인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아마 부인님도 나라위한 싸움에 남녀로소를 가리지 말라고 한 대장님의 호소에 따른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에 또 안승우가 재치있게 맞장구를 쳤다.

《옳습니다. 이제 부인님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대장님이 제 집에서는 이 말을 하고 여럿앞에서는 저 말을 하는 사람으로 될터인데요. 이를테면 국사에 앞서 사사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된단 말입니다.》

《뭐, 내가 국사에 앞서 사사를 내세워?…》

린석은 그 말을 한번 더 외워보고 소리내여 웃었다. 음미를 해보니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리씨의 모습이 새롭게 안겨왔다.

무엇이 저리도 웅심깊고 가슴뜨거운 정을 지니게 하는것일가. 어찌하여 녀자들은 사나이들에 대하여 그렇게도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순정으로 한생을 바치는것일가.

생각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무엇이든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살고싶어지는것이다. 안해에 대하여, 의병들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이튿날 새벽 린석은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잠을 깨였다.

잠귀밝은 리씨가 먼저 알아보고 중군 리춘영이 그를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선봉장도 같이 왔다가 금방 돌아갔는데 무슨 일이 있는것 같다고 했다.

린석은 급히 선화당으로 나갔다. 아닌게아니라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있었다. 넓은 선화당 뜰안에 때아닌 초불이 환하게 켜져있는데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 서성거리고있었다. 보다 놀라운것은 대뜰우에 십여자루의 보총과 함께 탄약상자까지 몇개 쌓여있는것이였다.

《으흠? 이게 어디서 난것들인가?》

《선봉대사람들이 어제 밤 적진을 습격하고 빼앗아온것들입니다.》

리춘영이 대답했다. 놀라서 둘러보니 김백산이하 10여명의 대원들이 나란히 렬을 맞춰 서있었다.

《어제 밤? 그런즉 자네들이 밤사냥을 했단 말인가?》

하고는 덥석 달려가 백산을 그러안았다. 다른 의병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이 사람들이 큰일을 했구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였나?》

《우리 선봉장님이 생각해냈습니다. 실은 어제 낮 부인님을 구원하러 적진까지 쳐들어갔다가 떠오른 생각이였는데… 저희들이 보기에도 적들은 보잘것 없습니다. 먼저 치면 이길수 있습니다.》

한 의병대원이 의기양양해서 말하였다. 여럿이 그에 함께 응했다. 나중에 백산이 송구한 자세로 두손을 마주잡고 뜨적뜨적 몇마디 했다.

《다른것이 아니고 우리가 오래동안 성안에 갇혀있다나니 사람들이 의기소침해지고 정황도 불리해지기때문에… 한번 시험해본것입니다. 그러고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린석의 생각을 또 한번 흔들어놓았다.

놈들과 싸우는데는 그런 전법도 있으며 해볼만 한 싸움이라는것이였다. 아니, 이제는 그렇게 해야 할 때가 되였다.…

그리하여 다음부터는 더 자주 야간습격전투가 조직되였다. 여기에는 김백산부대뿐아니라 다른 여러 부대들에서 선발된 인원이나 혹은 부대별로 저마다 작전을 벌려 진행하는 여러가지 싸움법이 적용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싸움도 오래는 계속할수 없었다.

놈들이 밤마다 철통같은 경비진을 치는가 하면 야간무력을 급격히 강화하였다가 습격조가 나타나면 무자비한 집중사격을 가하였기때문이였다. 그로 하여 의병대쪽에서도 적지 않은 사상자들이 났다.

그렇게 긴장한 나날이 흘러가던 어느날 린석이 선화당에서 사람들과 차후 일을 의논하고 앉았는데 오째가 급히 뛰여들어오며 선봉장이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뜻밖의 일이 생겼으니 대장이 직접 나와 정황을 처리하라는것이였다.

린석이 급히 남풍루에 올라가니 백산이 성아래의 누구와 큰소리로 욕하며 대화를 나누다가 그를 보자 정황을 설명했다.

《저놈들이 담판을 제기해왔습니다. 우리와 의논할 일이 있으니 대표가 나오라는것입니다.》

린석은 란간으로 다가갔다. 아닌게아니라 성에서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말을 타고 총대끝에 흰기를 단 장교 하나가 몇놈의 군졸을 달고 와서 큰소리로 떠들어대고있었다.

《이것은 너희들의 운명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다. 만약 담판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대로 결심하겠다.》

《무엇을 응하라는 말이냐?》

우리쪽에서 의병들이 따지였다.

그러자 장교놈이 멀리 저들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길 보라. 홍정식이를 알지? 그것들이 지금 우리쪽에 와있다. 무기장사를 하던 야마무라와 함께 붙잡혔다. 담판에 응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죽여버리겠다.》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몇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하여 모여있는것을 보았다.

순간 린석은 자기도 모르게 온몸이 저려오는것을 느꼈다. 홍정식이야말로 그가 기다리고기다리던 사람이였던것이다. 바로 얼마전에 최익현에게 성의 운명과 관련한 문제를 건의하여 편지로 써보냈던것이다. 또 그에게는 총에 대한 거래도 총화지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지워져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되여 적들에게 붙잡혔는가, 주었던 임무는 어떻게 되였는가, 이제 담판에 나서면 적들이 어떤 요구를 제기해올것이며 그에 어떻게 응해나설것인가 하는 의혹들이 동시에 안겨들었다.

그러나 린석으로서는 어느 하나도 질정할수가 없었다. 이런 정황이 그에게는 난생처음이였던것이다. 우선 누구를 대표로 내보낼것인가 하는것부터가 중요하였다.

론의가 벌어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그만한 중임을 맡아 처리할만 한 자신이 없는데로부터 오는 소심성들에서였다.

그때 중군 리춘영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밖에는…》

《으응? 자네가… 저것들이 풍월이나 읊자고 하지는 않을것인데?》

린석이 부지중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해버린 말이 그대로 적중한데 놀랐다. 과연 지금이 어느때인가. 성의 운명을 책임지고 나가야 할 때이다. 그에 비하여 춘영은 너무도 연약하고 선비답다. 대신할 사람이 없겠는가 둘러보았다. 안승우가 자기도 생각이 있었는듯 바라보다가 풍월소리에 기가 죽어 몸을 옴츠렸다.

문득 백산이 눈에 띄웠다. 그가 차렷자세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를 쳐다보고있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마음이 끌리였다.

《선봉장, 생각이 어떤가?》

《제가 될수 있다면 맞서보겠습니다.》

속이 시원하리만큼 대답이 성근하게 나왔다.

《고맙네. 그대가 나가게. 이제부터 성의 운명을 그대에게 맡긴셈이네. 정황이 어떻게 생기든 자네의 결심대로 자재자량하게.》

린석이 와락 두어깨를 두드리며 힘주어 말하였다.

백산도 믿음에 보답하는 자세로 몸을 곧추 폈다.

《있는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윽고 말을 타고 성문을 빠져나갔다. 역시 말을 탄 의병들이 량쪽에서 몇명씩 따랐다.

담판장에는 놈들이 이미 나와있었다. 량쪽진지의 중간지점이였다. 량켠이 모두가 총을 메였다.

《너는 누구인가?》

말탄 왜놈장교가 물었다.

백산은 그가 와다나베대위놈이라는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저 갑오년 그때 론산에서 화승총을 겨누고 똑바로 쳐다보았던 바로 그놈이였다. 성을 빼앗을 때 마차우에서 기관총을 쏴대던 놈도 바로 이놈이였다.

《선봉장 김백산이다. 너는 누구냐?》

《선봉장? 그런가. 나는 대위 와다나베다. 네가 꽤나 싸움을 잘한다지?》

《용건을 말하라. 무엇때문에 담판을 요구하는가?》

《선봉장, 우린 너희 형편을 잘 알고있다. 대장 류린석이나 중군 리춘영이, 군수장 안승우, 또 새로 난 군사장 리필희란 사람도. 그게 전부가 아니야. 지금 성안에는 식량도 탄약도 다 떨어졌지. 우리와 계속 싸워볼 작정인가?》

《우리는 싸움을 요구하고있다. 너희들것을 빼앗아오지 않았는가?》

《새다리의 피를 보고 큰 자랑처럼 생각하는가. 우리에겐 그따위 말고도 무기가 얼마든지 많다.》

《더 가져다놓으라. 우리가 또 빼앗아오겠다.》

《무엇이 어째? 건방진 자식…》

와다나베가 말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손부터 권총집에 가져갔다. 거의 같은 순간에 백산은 옆에서 칼을 빼여들었다. 일순간에 적아는 다치면 터질듯 한 긴장상태로 눈과 눈의 대결에 진입했다.

주인과 강도와의 대결, 처음에는 오만하다가도 비굴하게 눈길을 먼저 떨구는것이 강도의 취약성이다.

와다나베는 속이 뒤틀렸지만 권총을 도로 집안에 밀어넣었다. 대신 눈에는 노기가 더 번뜩이였는데 보매 그도 자기를 알아본것이 분명하였다. 하면서도 속심은 터놓지 않고 중얼거렸다.

《긴말을 하지 않고 이다찌중좌님의 명령을 전달하겠다. 우리는 홍정식이네를 너희들이 중히 여기고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우리는 그들의 무기거래의 비밀과 그 자금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있다. 우리 군법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총살감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들이 성을 내놓기만 하면 그들을 모두 살려줄뿐아니라 군자금도 모두 돌려주겠다.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모두 쏴죽이겠다. 결심을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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