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2 장
불타는 성
9
(1)
…그대의 당부대로 다시 임금을 만나보았다.
성을 끝까지 지키라. 이번에 군부와 내부 두 대신에 대한 론의도 있었으나 당장은 경군을 파견하지 않을것이다. 임금께서 그들의 이름을 찍어가며 실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였다. 해당한 대책이 따를것이다.
이번 기회에 보다 큰 전과를 세워 전국의 의병들을 크게 고무하길 바란다.…
익현은 린석에게 쓴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주었다. 그것을 찬찬히 밀봉하여 정식에게 넘겨주는 얼굴에는 자기 의무를 성실히 리행했다는 만족이 어려있었다.
《의암이 근심하지 않게 되도록 빨리 전달하게. 요는 성을 끝까지 견지하는것이야.》
《잘 알았습니다. 오늘중으로라도 떠날수 있습니다.》
홍정식이 씩씩한 소리로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이제는 빨리 충주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토록 중대한 소식을 어찌 하룬들 지체할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당장은 떠날수가 없었다. 야마무라와 무기거래문제가 아직도 미결로 남아있었던것이다.
그것이 요즘 홍정식에게는 큰 골치거리로 되고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말만 듣고 모든것이 뜻대로 될것 같아서 무조건 응했는데 지내보니 어느 하나도 되는것이 없었다. 특히 이번에 충주까지 갔다와서는 야마무라에 대한 신망이 완전히 없어졌다. 그가 비록 김백산이나 류린석의 앞에서는 야마무라를 옹호하는척 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서는 노상 그에 대한 불만과 질책으로 일관되여있었다. 그에 대하여 야마무라는 원래부터 자기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며 위험한 일이기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것, 이번 길에는 반드시 결속을 보자고 약속을 하였다.
이제 정식은 그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이번에 또 충주까지 헛걸음을 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리하여 홍정식은 출발에 앞서 함께 가게 되여있는 두명의 동료와 함께 야마무라를 찾아갔다. 그런데 아닌게아니라 야마무라가 매우 난처한 안색을 지으며 자기도 지금 약속된 사람을 기다리는중인데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고 중언부언하였다. 그것이 정식을 더 참을수 없게 하였다.
《야마무라씨, 정말 이럴내기요? 우리에겐 더 기다릴 시간이 없소. 당신도 충주의 형편을 잘 알지 않소?》
《될듯 하면서도 안되는게, 또 안될듯 하다가 되는게 장사일이지요. 며칠만 좀더…
다문 하루이틀만이라도 기다려보시지요. 예?》
《정 안되면 돈이라도 되돌려달라고 하시오. 우린 오늘중으로 충주로 떠나야 하오.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가야 한단 말이요.》
《중요한 소식이라니, 그게 무언데?…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않겠소?》
《안되오. 이건 충주성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요. 오늘 아니, 이제 당장이라도 떠나야 하오.》
《그렇다, 당장 말이지?…》
야마무라는 눈을 까박까박하며 생각을 굴리더니 정식이네들을 이끌었다.
《좋네, 그럼 내가 돈을 찾아오지. 그동안은 좀 기다려주어야 하겠네. 저 양료리집으로 가세.》
그들이 자주 다니던 서양음식점이였다. 거기서 야마무라가 술과 몇가지 음식을 청하여놓고 자기는 돈을 찾으러 간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생각보다는 훨씬 앞당겨 야마무라가 나타났다. 가슴에는 돈봉투라고 하는 보자기같은것이 불룩하니 나왔는데 그것이 몹시 소중한듯 자주 그쪽에 대고 손을 들이밀었다 꺼냈다 했다.
《아쉽지만 할수 없지요. 전량을 돌려줍니다, 한푼도 곯지 않게… 난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의 체면을 지켜서 내가 충주로 가 직접 돌려주자고 합니다. 이번에도 내가 함께 동행하는것이 신변안전이나 이모저모에서 유리할겁니다.》
야마무라가 아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다는듯 혀꼬부라진 소리를 거듭 내뱉았다. 홍정식이 시간이 촉박하여 몇번이나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야마무라는 술을 또 청하며 그들을 주저앉혔다.
그렇게 두어식경이 지났을 때다. 갑자기 문밖에서 요란한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왜놈헌병들이 들이닥쳤다. 놈들은 다짜고짜 정식이네 식탁에 들이닥쳐 무슨 증명서같은것을 요구하더니 식당밖으로 끌어내갔다. 야마무라가 이게 무슨짓들이냐고 왜말로 항의하자 한 헌병놈이 그의 등을 총탁으로 내려치며 네놈이 조선놈들과 내통하며 우리 총을 팔아먹었지, 조선놈들을 시켜 제국군대를 쏘게 해?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후하여 그들은 조선주둔 일본군헌병대에 붙잡힌 몸이 되였고 최익현이 써준 편지도 그대로 압수되고말았다.
그것을 알길 없는 충주성에서는 이제나저제나 서울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이틀 기다리고있었다. 요새는 어째서인지 왜놈들이 성에 대한 공격을 거의나 해오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놈들이 크게 잡도리를 하고 맹공격해오리라는것만은 의심할바 없었다.
그만큼 성에서도 바빴다. 이미 토의된대로 성보수를 하루빨리 끝내고 무기제작과 수리에 달라붙었다. 사석의 부대에서는 쇠부리터를 새로 꾸리고 쇠를 녹이기 시작했으며 백산의 부대에서는 되도록 큰 가마를 여러개 걸어놓고 망초를 졸이고 말리고 하는 일판을 벌려놓았다. 그보다 앞서 미영의 녀성부대에서는 수십명씩 패를 지어 쇠붙이나 화약재들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분주히 뛰여다녔다. 그들이 먼저 뛰지 않고서는 어느 한가지도 제대로 될수 없는것이다.
이 모든것을 조직하고 돌아보는 린석은 그때마다 짜릿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분기와 애수에 불안을 느끼군 하였다. 성을 지키자고 저렇듯 뛰고 또 뛰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장한가.
그러나 이대로는 오래 갈수 없다. 성은 포위되여있고 뒤따라 인차 공격이 시작될것이다. 그때에는 얼마나 더 견디여내겠는지 알수 없다. 방도는 최익현대감에게 편지를 보낸바대로 놈들의 증원군이 더 보충되지 않는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되겠는지 소식이 없다. 왜 없는가. 최대감이 왕을 만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부결을 당했는가, 혹은 정식에게 보낸 편지가 제대로 가닿지 못했는가.…
린석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안정을 못하고 성벽우를 오락가락하고있던 어느날이였다. 갑자기 성우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남문이 와락 열리며 말탄 의병들이 벌 한가운데로 내달렸다. 린석이 영문을 몰라 의병들에게 물었으나 누구 하나 똑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의병들이 달려가는 곳을 바라보니 왜병들이 달라붙어 웬 녀자 한명을 붙잡아가고있는것이 보였다. 의병들이 달려가자 놈들은 더 빨리 뛰였다. 곧 접전이 붙었다. 녀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를 빼앗기 위한 싸움이였다.
마침내 말탄 의병들이 창칼부림으로 놈들을 소멸하고 그 녀자를 말에 태워가지고 무사히 되돌아왔다. 역시 김백산을 위시한 선봉대원들이였다.
그런데 보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그들이 구원해왔다는 녀자가 다름아닌 린석의 처 리씨였던것이다. 그가 하얗게 질식된 얼굴로 사람들에게 부축되여 린석의 앞에 나타났다. 너무도 뜻밖의 일에 린석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흰 머리수건에 역시 흰 무명치마저고리를 길게 해입은 리씨가 질식된 얼굴로 린석을 마주보다가 그대로 땅우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새 옥체만강하셨나이까?》
그렇게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것을 미영이 다가가 일으켜세웠다.
《큰아버진 뭐예요. 빨리!》
터무니가 없었다. 이 로친네가 어떻게 되여 여기에 나타났을가. 춘천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보낼것이지 제가 무엇때문에 예까지 왔단 말인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그를 보고 승우가 리씨를 객사로 안내했다.
거기에 방을 하나 내여 둘이 함께 류숙케 하자는것이였다.
얼마후 린석이 뒤따라가서야 영문을 알수 있었다. 리씨가 영문도 모르고 성문을 향해 다가오는데 성을 포위하고있던 놈들이 먼저 그를 보고 무작정 저들의 진지로 끌고갔다는것이였다.
성우에서도 멀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눈밝은 미영이가 무엇인가 짐작되는것이 있어 소리치자 백산이 십여기의 기군을 달고 번개처럼 놈들을 앞질렀다. 순간을 놓치면 모든것이 허사로 끝날 그 시각 백산이네들은 필사의 각오로 놈들과 창격전을 벌려 끝내 그 녀자를 구원해왔다.
그런데 그가 다름아닌 류린석의 부인일줄이야.
…백산이나 미영이들이 아니였더라면 어찌될번 했는가.
린석은 생각할수록 등골이 섬찍해지고 손에 땀이 그러쥐였다. 그것이 리씨에 대한 분기가 더욱 솟구치게 하였다.
《혼맹이 나갔지. 정신구멍이 쑥 빠지지 않았어? 여기가 어디라구. 전장이 뭐 아낙네들의 들놀이터인줄 알았어?》
린석이 듣고나서도 참지 못해 거듭거듭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영이 조심스럽게 끼여들었다.
《큰아버지, 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놀라신 큰
《말을 해야 돼. 녀편네들이란 아무리 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거던. 집에서부터 내가 뭐라고 했나. 절대 딴 생각 말고 집이나 잘 보라구…》
《야, 큰아버지, 그러시지 말라는데…》
《미영아, 그만해라. 내가 잘못했다. 오며는 온다 하구 기별이라도 먼저 했어야 할걸. 큰아버지도 날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냐.》
리씨가 흩어진 머리를 바로잡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것이 린석의 노기를 어느 정도 눅잦혀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놓을수 없었다.
《여러말할것없이 당신은 당장 춘천으로 돌아가오. 내가 사람을 붙여주겠소.》
그러는데 리씨가 퍼더버리고 앉았던 자세를 바로하며 무릎을 꿇었다.
《안 가겠습니다. 아니, 못 갑니다. 죽어도… 저에게 맞갖은 일감을 주십시오.》
《으응? 당신에게 무슨 일감을 달라는거요?》
린석은 부지중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너무 뜻밖의 일이였던것이다. 전장에서는 녀자들이 할일이 없다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리씨는 그에 관계없이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소첩이 비록 우매해도 나라가 있고서야 집도 있다신 말씀의 뜻만은 새겨안고있습니다.
전 단지 남정네 시중을 들자는게 아니라 나라위한 싸움에 적으나마 전력을 다하고싶을뿐입니다. 그래야 나리도 모두에게 떳떳하고 천금같은 그 말씀 빛이 날게 아니겠습니까.
옛말에도 부부는 인륜의 으뜸이요, 만복의 근원이라고 했는데 전 당신께 시집온 소녀적에는 철이 없어 글공부하는 당신을 돌봐드리지 못했고 그후 〈위정척사〉를 하실 때는 집안일에 눌리워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나라위한 싸움에 한몸 바치자고 나서시였는데 또 도와드리지 못한다면 제가 무슨 안해이고 이 나라 녀인이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첩에게는 그것이 평생의 한으로 됩니다.
사람의 일시빈천은 천생만인의 필수지책이요, 가장을 위하여 한몸을 표박함은 녀자의 떳떳한 도리라고 하였는데 이제 저에게 두려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큰뜻 품고나선 당신의 곁에 잠시라도 같이 있으며 몸을 돌봐줄수 있다면 첩으로서 너무도 응당하며 당연한 도리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칠수 없었다.
안해가 그런 투로 말해본적이 없었다는데만 문제가 있지 않았다. 말속에 담긴 뜻이 깊고 감동적이여서 할말을 찾을수 없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