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제 2 장
불타는 성
8
(4)
또다시 의병이다. 이제 더는 모르쇠를 할수가 없게 되였다.
《대감, 나는 백성들을 무모하게 왜인들의 총구앞으로 떠밀고싶지 않소. 그렇지 않아 갑오년에도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또 그렇게는 못하겠소.》
《전하께서는 진실로 백성들을 걱정하는것입니까, 아니면 왕업의 존망을 념려하는것입니까.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오른 이때를 당하여 백성들은 생사를 무릅쓰고 싸우자 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리도 우유부단하십니까.》
마침내 익현도 참지 못했다. 창칼이라도 들이대듯 곧바로 왕의 아픈 곳을 찔렀다.
왕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했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자기앞에 이런 투로 말한 사람이 없다.
《전하께서는 빨리 강경과단한 결심으로 국가의 운명을 바로잡을 대책을 세움으로써 선대임금들과 조상들의 종묘사직앞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는 임금 한 사람의 국가가 아니며 따라서 임금 혼자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우유부단하게 근심만 하면서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다가 나라가 왜놈의 손에 들어간 다음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마침내 왕은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다시한번 주변에 누가 없는가 둘러보고는 익현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충주성을 차지하고 격문을 전국에 날린 사람이 누구라구 했던가?》
《이미전에도 전하께서 평하신바가 있는 의암 류린석으로서 저와 함께 의병문제로 명성황후도 만났던 사람입니다.…》
익현이 재빨리 설명을 했다. 왕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골선비로서는 큰일을 했다는 스스로 느끼게 되는 감동이였다. 그럼에도 역시 의병이라는데는 믿음이 안 간다.
《일개 유생으로서는 괜찮소.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의병과 같은 싸움에 나서게 되였소?》
《그는 한때 신과 함께 리항로의 〈위정척사론〉에 심취되여 열렬한 신봉자가 되였는데 지금은 그가 대표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충군사상과 함께 〈척양척왜〉정신도 강하다는것을 말하여줍니다. 전하께 감히 청컨대 신은 그를 전국의 의병총대장으로 임명하고 온 나라를 지휘케 했으면 합니다.》
《무엇이라구? 그에게 전국의 의병대를…》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이름난 시는 장수들속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반대로 글하는 사람들이 싸움도 잘할수 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군사를 모르는 그에게 전국을 떠맡길수야 없지 않소?》
《전하, 사람은 날 때부터 귀하고 천하고 유명하고 무명하거나가 규정되여있지 않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명분과 지위, 등급을 주어서야 그것이 규정됩니다. 문제는 전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고 누구에게 믿음을 주는가 하는것인데 지금형편에서는 먼저 생각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을 따르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류린석에게 8도의병총대장이라는 지위와 명분만 주신다면 그 이름만 가지고도 린석은 곧 시대의 명장으로, 영웅으로 떠받들리울것이며 전국이 따라일떠설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에서 제일 큰 재난중의 재난은 인재를 제때에 적절한 곳에 골라쓰는 길이 막히는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른 시대에 가서 인재를 빌려다쓸수 없는 조건에서 우선 그에게 믿음을 주고 적절한 지위에 등용만 해주어도 오늘의 곽재우나 고경명이가 될수있습니다.》
왕은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역시 익현으로서는 일리가 있는 말을 하고있는것이다.
(그러나…)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저절로 감겨드는 눈을 내리깔며 왕은 생각했다.
(왜인들이라고 무턱대고 남의 나라를 타고앉겠는가. 그들에게도 저들의 국법이 있고 나라들사이에도 약속된 국제법이라는것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일단 빠질 구멍수만 찾게 되면 그것은 얼마든지 생겨난다. 설사 왜인들이 사납고 조폭하다고는 해도 그들이 아니면 또 다른 놈들이 기여들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느라면 또 그만큼 가슴아픈 재앙을 보게 될것이다. 우리가 남들처럼 빨리 개명을 하자고 해도 비록 당장은 손해를 보고 가슴아픈 희생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지 말고 화친을 하는것이 옳다.
그는 바로 이런 생각으로 며칠전에 솔선 틀었던 상투를 잘라버리고 머리를 깎은 다음 전국에 단발령을 내려보냈다. 그것이 위생에도 좋고 활동에도 편리하니 모두 자기 본을 따르라는것이다. 이를테면 빨리 개명을 하자는것이다.
(이 사람이 그것을 알고나 있는지…)
한때 나라에서는 왜인들이 그렇게 많이 밀려와 장사를 하는데도 관세라는것을 몰라 몇해동안이나 받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왕이 정치를 몰라 그랬다고 하며 자기에게 냅다 몰아댔다.
그보다 더 참지 못할 웃음거리가 있다. 언제인가 례부의 한 관리가 외국공사관에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오래동안 나오지 않았다. 또 얼마를 기다려서야 나왔는데 이런 일이라구야, 온몸이 벌거벗은것처럼 반라체차림이였던것이다. 그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정구를 좋아해서 한 경기를 마저 끝내느라고 늦어졌다고 사죄를 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 가관이였다.
《원, 정구를 그렇게 좋아하시면 하인이라도 시켜서 할것이지 그 몸차림을 하고 몸소 하시다니…》라고 했다는것이다.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례부관리들의 무식한 행동을 놓고 왕 자기탓이라고 욕했다는것이다.
그렇다.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치고 자기와 관계되지 않는것이 없다. 왕 한사람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신하들에게 허물로 되지 않지만 신하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곧 왕의 허물로 되여 그 문책이 자기에게 돌아온다.
하물며 저 의병과 같은 온 나라에 관계되는 일에서랴. 왜놈들은 반드시 의병들의 봉기를 자기에게 따질것이며 책임을 묻자고 할것이다. 그때에 생기게 될 화단과 불행을 최익현이란 사람이 알기나 하는가.
아니, 꿈에조차 생각지 않을것이다.
《최대감, 과인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류린석이란 사람이 가상한데가 있소. 전번에도 말했지만 충군충의나 애국충정을 놓고 말해도 누가 따를 사람이 없소. 과인이 대감의 청을 익히 참작하여 긴히 쓰도록 하겠소.》
마침내 왕이 말했다. 최익현으로 하여금 더이상 바랄것이 없게 하는 최대의 대답이였다.
익현은 그에 대해 감지덕지해하면서 돈수재배를 하고 호상에서 물러나왔다. 린석의 8도의병총대장에 대한 임명에 대해서도 크게 의심치 않았다.
어쨌든 임금과 대신사이에 한 약속이 아닌가.
(그러나…)
익현이 나가자 왕은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생각하였다. 일이 약속대로 될수 있을가.…
그의 머리속에는 일본이라는 조폭하고 야수적인 나라가 어느 순간에 벼락을 때릴지 모르는 장마철의 구름장처럼 떠돌고있었다. 그것들이 한번 지랄발광을 하는 날에는 이 나라에 또 어떤 환난이 들이닥칠지 알수가 없는것이다.
반면에 한켠으로는 로씨야라는 나라가 구름너머 해볕처럼 눈앞에 얼른거리기도 했다. 세계의 넓은 지역에 방대한 령토와 인구, 군대를 가지고있는 나라, 이미 명성황후에 의하여 그 토대가 닦아지기도 한데다 또 그의 죽음으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로씨야쪽으로 쏠리고있다. 이미 그의 생명은 물론 국가의 운명에 대해서도 거듭 담보해온 나라다. 만약 왜인들이 지금처럼 시끄럽게 내정에 간섭하고 오만하게 나온다면 그때에는 완전히 로씨야쪽으로 돌아서고말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가득차있는 왕이였기에 익현이 그처럼 있는 힘을 다해 설명을 하고 간청을 한 의병에 대한 문제는 그에게 시끄럽고 괴로운 짐으로밖에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