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회)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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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부대는 겨울해볕이 따스하게 비쳐드는 그늘없는 공지에 잠간 멎어섰다. 모닥불을 피울 형편도 못되였으므로 대원들은 구름나무가지들을 깔고앉아 숨을 돌리였다. 이런 휴식이나마 자주 차례지는것도 아니고 긴 시간 내처 쉬게 되는것도 아니였다. 한흥권중대장이 담배 한대를 말아피우고나면 원정대는 떠나야 하는것이였다. 그것을 알고있는 대원들은 나무가지들을 깔고앉자마자 배낭으로 등을 받치고 누워 일제히 눈들을 감았다. 그 짧은 휴식참에도 어떻게든 피곤을 풀고 원기를 회복하려고 모두들 애썼다.
당장 급하게는 숨가쁘게 뒤따르고있는 적들을 어떻게 견제하고 원정대의 행군을 순조롭게 보장하며 더는 인원손실을 내지 않고 이 금싸래기같은 대원들을 모두 데리고 동만땅에 나가야 할것인가 하는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원정대가 이 시련을 용이하게 극복하고 행군을 다그쳐 동만땅에 나가지 못한다면 원정대의 운명은 말할것도 없고 동만땅에서 빚어지고있을 그 무서운 수난도 가셔내지 못한다.
바람소리, 나무들의 설레임소리, 마른 썩정가지들이 맥없이 꺾어져 눈우에 처박히는 소리… 이런 음향이 한데 어우러진 자연의 정적속에 한흥권이 칙칙 부시를 치는 소리가 단조롭게 일어났다.
나무의 싱그러운 송진내마저도 깡깡 얼어붙어 냄새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설핏한 공지에 한흥권의 담배쌈지에서 새여나오는 마라초냄새가 제법 구수하게 풍겨돌았다. 그우에 가까스로 불을 달아 빨아대는 한흥권의 담배연기가 사람들의 얼굴을 스치며 날아갔다.
애연가들은 코를 벌름거렸다. 노그라진 의식속에서도 온몸에 속속들이 들이박힌 담배냄새만은 기꺼이 감촉하는 모양이였다. 한사람이 헛손질처럼 두어번 손을 내젓다가 눈우에 철썩 떨어뜨리고 다시금 그 죽은듯한 모양으로 누워있었다.
한흥권은 서너모금 빨고난 담배를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몸을 뉘였다. 담배는 소리없이 애연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
한흥권중대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고?… 우선 이런 생각을 했댔소. 이제 저 담배불이 꺼지면 중대장의 출발명령이 떨어질터인데 언제면 이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우리 동무들을 편히 쉬울수 있을가. 언제면 배불리 먹이고 뜨뜻이 입히고 생명의 위험을 모르는 조용한 환경에서 우리 애연가들이 맛나게 담배를 빨게 할수 있을가 하구말이요.》
한흥권은
《그거야 동만땅에 나가서나 바랄 일이지요.》
《물론 그렇소. 그러나 반드시 그런것만은 아니요. 아무리 적들이 집요하게 따르고 경황이 없이 만든다 하더라도 지휘관은 항상 대원들의 편리를 돌봐주기 위해 힘써야 하는거요. 지금은 우리가 담배 한대 태울 시간의 여유나마 얻고 대원들을 쉬우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마음의 여유마저 가지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을는지 모르오.
이런 환경에서는 침착하게 정황을 판단하고 효과있게 적을 답새기면서 시간의 여유를 얻어내야 하오. 쫓기기만 해서는 숨가빠 행군을 못하오.》
한흥권은 눈속에서 엉금엉금 네발걸음을 하여
《
《그런 공연한 소릴 마오. 십리평골짜기에서 앓을 때야 생사가 왔다갔다 했드랬는데 지금의 낯색이 그때하구 같을게 뭐요. 김택근동무가 가끔가다 그런 당치않은 억측을 잘한단말이요.》
《그럼 어서 하실 말씀을 하십시오. 저 차일진동무의 입에서 마지막 꽁초가 타들고있습니다.》
원정대의 많지 않은 애연가들중에는 차일진이가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마지막 꽁초를 입에 물고있는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을 생각은 않고 그냥 삼키기만 하더니 한순간 향연의 진맛을 온몸에 느껴보듯 입과 코구멍으로 천천히 연기를 날리면서 긴 숨을 내쉬였다.
《우리 동무들이 저렇듯 달게 피우는 담배를 보면서 내가 또 한가지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니 바로 이런 생각을 했댔소. 우리가 근거지밖에 나가 적들을 때리면서 유격구를 보위하고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하느라고 고심참담한 투쟁을 벌려나가고있는 때에 근거지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의 미친 바람이 일어나 우리 혁명을 어떤 파국적인 사태에 몰아넣었댔소?
얼마나 아까운 혁명가들이 생명을 잃고 많은 혁명군중들이 근거지를 버리고 흩어져나갔는가? 나는 그때 우리가 한발자국만 더 다그쳐왔더면 얼마든지 살릴수 있었던 숱한 동지들을 잃고 가슴을 두드리던 일이 생각나오. 리유천이랑 송혜정이랑 박현숙이랑 구당비서랑 다 그때 우리 손에 구원되였지. 나는 지금도 우리가 내딛는 한발자국한발자국에 술한 혁명동지들의 생사가 달려있다는 비장한 생각이 드오. 그러니 적들의 이 악착스런 추격이 없다 해도 우리는 실상 담배 한대 태울동안의 휴식밖에는 더 바라지 못할 사람들이요. 이러고보면 놈들의 추격이라는것도 동만땅으로 나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한결 다그쳐주는 결과밖에 더 가져올것이 없는거요.》
한흥권은 일견 놀라고 일견 감동어린 눈으로
《
《어서 그렇게 하오. 우리가 수년동안 피땀을 쏟아가며 쌓아올린 혁명의 보루가 로야령너머 동만땅에서 녹아나고있는판이요. 좌경모험주의자들과 민족배타주의자들, 종파사대주의자들과 적간첩주구들에 의해 피흘리는 혁명을 구원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소. 이전처럼 한걸음을 더 다우쳐갔더면 얼마든지 구원할수 있었던 동지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하는 처참한 비극을 다시야 어찌 당하겠소. 우리가 당하고있는 이 시련, 이 난관이 아무리 크고 엄혹하다 해도 이것으로 동지들의 희생이 빚어지는 그 처절한 슬픔을 막아내지는 못하오. 문제는 만난을 뚫고 동만땅으로 나가 귀중한 혁명동지들을 구원하는것이요. 이것밖에 우리에게는 다른 의무와 다르게 행동할 권리가 없는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