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 회)
제 2 장
불타는 성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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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실례만 들어도 한때는 김옥균의 개화사상을 지지하여 정변에 찬성을 했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정변이 터진 다음에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명성황후가 요구하는데로 거처를 거듭 옮김으로써 결국은 정변을 3일천하로 만들어버리게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왕궁을 지켜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해놓고는 결정적순간에 꼬리를 사린 왜놈군대의 배신행위가 근본적인 작용을 했다고 할수 있다.
박영효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때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우연히 끼여들었던 그는 일본에 망명한 후 10년만에 완전히 왜놈의 개로 전락된 자였다. 한것을 그가 전왕 철종의 사위라는것과 자기 잘못을 깨닫고 조국이 그리워 다시 찾아왔으니 제발 받아달라는 요구를 그대로 믿고 내부대신으로까지 등용하였다. 그때 수많은 문무관리들이 박영효가 왜놈의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올 때부터 조선의 성씨와 이름을 완전히 왜말로만 지껄이는것을 보고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하다가 그가 왜놈의 밀정노릇을 하면서 내각자체를 친일로 돌려세우고 나중에는 명성황후까지 암살할 음모를 꾸미였다는것을 알고야 체포령을 내리게 하는 소동을 피웠다.
물론 그것은 개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것이고 중대한 국사도 자기의 굳건한 대를 가지고 주견있게 처리하지 못한것이 많다. 그때마다 그는 나라사정이 어쩔수 없었다는것을 구실로 삼군 했다.
갑오년의 왕궁점령때만 하여도 그는 일본에 철저히 책임을 묻고 이나라에서 축출했어야 했다.
그것은 한 나라의 군주로서 응당 해야 할 책임적인 일이였으며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그는 왜놈공사와 만난 자리에서 조선과 일본이 호상 도우며 영원히 협조하자는 왕청같은 소리를 해서 세상을 놀래웠다.
갑오년의 마지막나날에는 어전회의에까지 끼여들어 저들의 《20개조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으로 문초하겠다.》고 을러메는 이노우에공사놈의 요구에 굴복하여 그대로 동의하고말았다.
그리하여 수많은 문무관리들이 힘들게 조직하고 만난을 이겨내며 추진하여오던 자주적인 근대개혁이 파탄되고 군국기무처자체까지 해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다른것은 말고라도 명성황후살해와 같은 사실을 놓고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일을 놓고서는 왕
그런데 왜 온 나라에 호령하여 왜놈들에게 철추를 내릴 단호하고 대담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는가. 아울러 지금과 같이 힘들게 일어난 저 의병들을 더 불러일으켜 보다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하지 못하는가.
최익현이 왕앞에서 그 모든 말을 다 할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말은 했다. 이제 왕이 어떻게 나올것인가.
가슴을 조이다못해 온몸이 졸아드는듯 하는데 마침내 왕이 눈을 떴다. 그 희멀건 량볼이 움씰움씰했다.
《최대감이 의병에 대하여 건의한것이 이번이 두번째지. 아니, 민중전에게 했던것까지 합치면 세번째라고 할수 있지.》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즉 왕이 알고는 있었다는 소리다. 알고도 그토록 말이 없은것을 보면 이미 부정하고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익현은 다시한번 정신을 가다듬었다.
《전하, 이미 말씀드린바이지만 지금 전국의 도처에 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바 이들만 잘 발동하여도 그까짓 왜놈 몇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친일을 주장하는 몇몇 관리들과 지방관들이 의병을 두려워하며 〈란적〉치부를 함으로써 스스로 원쑤가 되여 싸우고있습니다.》
《궁내부에서 군사를 동원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전하, 벌써 그 일이 시작된지는 오랩니다. 군부대신 조희연과 법부대신 서광범이들인바 그들이야말로 동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동족상잔을 몰아오는 만고의 역적들입니다.》
마침내 익현이 그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찍어가며 이실직고를 했다.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벼려오던 이름들이다.
그 말을 듣자 왕은 자기 말고 또 누가 들은 사람이 없는가 살피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만큼 두사람의 이름이 두려웠던것이다. 바로 그들이야말로 일제가 조작한 친일내각의 특등주구들로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속속들이 왜놈들에게 고해바치는 장본인들인것이다. 여기서는 왕도 례외로 되지 않는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것이 왕의 처지이다.
《최대감, 그대도 알고있지. 우리가 대국이라고 칭해온 청국이 하루아침에 일본에 녹아나는것을. 한것을 우리가 어떻게 일본과 싸운단말인가. 그것도 관군도 못되는 의병들이…》
《바로 그렇기때문에 전하의 말 한마디가 그토록 귀중한것입니다. 지금 온 나라 신민들은 국모의 죽음을 두고 그토록 슬퍼하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있는데 하물며 국부이신 전하께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번에 전하께서 〈애통소〉를 내려보내시여 온 나라가 들썩하고있는데 이제 다시 한번만 령을 내리시면 저따위 섬오랑캐쯤은 도처에서 미친개 때려잡듯 할수 있습니다. 자고로 이 나라 백성들은 의협심이 높고 충군충의열의가 강합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결같이 인정하는것입니다.》
《과인의 말 한마디에 과연 그렇게 나설수 있을가?》
《임금의 말이라면 죽어도 피하지 않는것이 이 나라 백성들일지언데 그것을 법도로 규정해놓으면 더 엄격하고 세부화된 명령으로 통하게 될것입니다. 가령 어느 고을 사또가 의병들에게 화살을 내주지 않았다면 그 화살 몇대가 비록 큰것은 아니지만 임금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의미에서 대역죄로 보고 엄하게 다스리면 무조건 따를것입니다. 반대로 왜놈들과 싸워 목을 하나 따거나 소총 하나라도 빼앗은자들에게는 상을 크게 주고 표창을 하여 적극 내세워줄것입니다.
예로부터 상은 하늘의 명령이요 벌은 하늘의 징계라고 했은즉 이렇게 상벌관계만 명백히 해주어도 만백성이 임금의 명령에 한결같이 호응해나설것입니다.》
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최익현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시 음미를 해보면 의병이란 말만 들어도 보잘것 없고 무기력한 존재로만 보인다. 그 의병들이라고 해야 기껏 농사나 짓던 농사군들이거나 선비들인데 그들인즉 잘 먹여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왁짝 떠들며 들고일어나기를 잘하는 철없는 아이들과도 같다.
하물며 그들에게 무기를 쥐여주었다가 저 갑오년 그때처럼 서울로 진격해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저도 모르게 엄습해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렇다. 그에게는 부러운것없이 필요한 모든것이 다 있다.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이름뒤에는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는 조건은 물론 대를 이어 옥좌를 물려줄 조건까지 다 갖추어져있다.
녀자가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명성황후가 죽은 후 신하들이 왕에게는 왕비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이미부터 가깝게 지내던 상궁 엄씨를 맞아들였던것이다.
이것은 태조께서 이미 오래전에 가문에 세워준 특전이며 특혜이다. 이 궁전(경복궁)을 지을 때 태조께서는 이미 그 터전을 다져놓았다. 그때 궁전의 지경을 다지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했다던가.
으아 지경이로다
이 집 짓고나면 력대로 성주나서
백성 다스리며 국가는 태평하리
으아 지경이로다
삼천리 방방곡곡 백성들아
우리 성주나서 국태안민하리니
으아 지경이로다
그래서 궁전의 이름도 《대아》라는 시의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면 군자는 만년동안 큰복을 누리리》의 마지막 두 글자를 따서《경복궁》이라고 지었다. 한것을 이제 나의 대에 와서 끊어버리고 큰복은커녕 비명횡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듯 그의 온 정신은
그러는데 최익현이 계속하였다.
《전하, 개국이래 지금처럼 복잡다난한 때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하로 하여금 선대의 어느 임금보다 일심전력하고 근검성실하여 나라일에 성적을 올릴것을 요구하고있습니다. 옛날에도 임금이 성실하면 때맞은 바람이 불고 임금이 몽매하면 때아닌 바람이 분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이제라도 마음을 굳게 먹고 비분강개하여 일어선다면 지금의 난국은 결코 타개 못할것이 아닙니다. 중요한것은 군사를 급히 일쿼세워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는것인데 지금 당장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는 조건에서 이미 일어난 의병을 잘 일떠세우는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으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