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2 장

불타는 성

8

(2)

 

《어마나.》미영이 기겁한듯 돌아섰다가 호방스럽게 웃고있는 백산의 잔등을 종주먹으로 때린다.

그리고 제잡담 부끄러운듯 어디론가 달려가는데 백산이 헌헌히 웃으며 뒤따른다.

성벽우이다. 치렬했던 전장에 고요가 깃들고 봄빛이 흐르고있다. 훈훈한 향기를 실은 봄바람이 성벽우로 날아든다. 사방 어디서나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있다. 성벽아래 그들과 좀 떨어진 둔덕우에 포탄에 뿌리가 통채로 들리운 수양버들 한그루가 곤두박혀있는데 놀라웁게도 그 곱슬곱슬한 가지마다에 버들강아지가 가득 매달렸다. 눈여겨보면 거기 파헤쳐진 흙더미와 마른 나무가지밑에도 새파란 풀들이 가득 내돋고있다. 바로 그속에서 솟아나는듯 아니면 어딘가 멀리에서 실려오는듯 아지랑이가 끊임없이 춤을 추고있다. 어차피 봄은 오고야말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고야마는것이 봄인것이다. 사방은 끝없는 정적에 잠겼다.

《지금의 이 고요는 보다 어려운 싸움을 예고하는 폭풍전야요. 우린 그 싸움준비를 해야 하오. 그래서 미영씨에게 하는 말인데…》

하는데 미영이 그의 말을 앞질렀다.

《알고있어요. 녀자들과 로인들, 아이들이 해야 할 일 말이지요? 철알이랑 화약 같은것을 만드는 일 말예요?》

어떻게 키돋움을 해서라도 백산에게 지고싶지 않은것이 미영의 마음이다.

과연 백산의 눈이 둥그래지게 되였다.

《그런걸 난 괜히 만사람앞에서 선수를 쓰느라 했지. 마치 제사람이나 되는것처럼…》

《그것도 알고있어요. 그럼 뭐래요?》

하고는 또다시 솟구치는 눈물에 옷고름을 가져갔다.

《선봉장님, 용서하세요. 아버지대신 제가 사죄를 해요. 선봉장님이 군사장이 되는것을 아버지가 반대했다는것을 저는 알고있어요. 매번 이렇게 대신 사죄를 해야 하는 이 마음까지 합쳐 용서하세요.》

《눈물이 싫다고 하니 게정을 부리는가. 또 억지로 눈물을 만들어 쏟치는군.》

미영이 또다시 우는 모습을 놀랍게 지켜보던 백산이 이번에는 큰소리로 웃었다.

《미영씨, 그건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반대한거요. 나한테는 군사장이 아니라 선봉장이 적당한 직무이기때문에…》

백산이 설명을 했다. 물론 그것은 그가 린석의 앞에서 했던 우격다짐의 주장이 아니였다. 전장에서 기어코 공을 세우겠다는 자기 식의 주장이였다. 그것이 또한 백산에 대한 믿음으로 미영을 고무하였다. 남다른 직무도 벼슬도 바라지 않고 원쑤칠 일념으로만 자기를 불태우고있는 백산이 미덥고 고맙게만 보이는것이다. 마침내 그는 눈물을 씻고 백산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꼭 공을 이룩하세요.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애국명장들처럼 후세앞에 자랑스럽고 떳떳한 사람은 없을거예요.》

《그 말이 옳을수도 있소. 하지만 미영씨, 난 그들처럼 이름을 날릴만 한 장수가 되지 못하오.》

《이런 시를 알아요? 옛적에 한 이름난 시인이 쓴것인데…》

《난 시를 모르오.》

《들어보세요.》

봄빛과도 같은 따뜻한 정으로 한껏 충만된 은은한 목소리가 시조를 타고 사나이의 억센 가슴에 메아리친다.

 

도리화는 말이 없는데 나비는 날고

오동은 고요한데 봉황은 깃 들였네

무정한 초목도 정을 끄는데

하물며 다정한 사람에 있어서랴

 

읊기가 끝났다. 했으나 누구도 말이 없었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빛들은 이글이글 불타고있었으나 그것을 그 어떤 말로도, 힘으로도 표현할수가 없었다. 김백산은 더구나 몸가짐조차 어찌할줄 몰라 눈만 껌벅이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미영씨, 나는 정말 시를 모르오. 듣고도…》

《시는 몰라도 돼요. 하지만 싸움에서만은 언제나 용감하세요.》

미영도 물러서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 성문루에 모여왔던 선봉부대 의병들이 달려나왔다.

미영은 몸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새 의병들이 그를 둘러쌌다.

《미영아가씨, 아가씨가 시와 노래를 그렇게 잘한다지요. 우리 의병들의 기세를 돋구어주기 위해서라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여러분네들, 우리 미영아가씨가 우리를 방문해주신것을 축하해서 한판 벌립시다!》

미영이 어느새 그들에게 이끌리여 루대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곧 북과 장고, 꽹과리, 새납, 퉁소, 아쟁, 반향과 같은 악기들이 일시에 일어나며 귀청을 돋군다. 동시에 머리에 흰 수건, 붉은 수건을 쓴 사람, 남녀의 울긋불긋 탈을 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와 겅둥겅둥 춤을 추며 풍진을 일쿤다.

어느새 미영이 그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저저마다 그에게 다가와 함께 춤을 출것을 요구했다.

미영은 춤을 출줄 몰랐다. 춤만은 추어본적이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산이 눈에 띄였다. 그가 주먹을 틀어쥐고 두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춤을 추고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추어 이리저리 뛰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면서 기세를 올리고있다. 거기에 맞추어 수많은 의병들이 함께 휩쓸렸다. 그들이 한번 발을 구르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지심이 울리고 하늘이 동하는듯 했다.

미영도 끼여들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에 조심조심 움직이다가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힘에 끌리여 마음껏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절로 춤동작이 떠오르며 몸이 나긋나긋해졌다.

거기에 맞추어 북소리는 더 우렁차지고 꽹과리는 더욱 자지러지게 요동을 했다. 어느새 녀자들도 수많이 끼여들어 춤판은 더 흥성거렸다. 루대뿐아니라 성의 좌우의 넓은 공지가 그대로 춤판으로 변했다. 의병들의 생활과 기세가 그대로 펼쳐져보이는 활무대로 되였다.

그속에서 미영은 마음껏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얼마나 멋진 생활인가. 랑만은 또한 얼마나 높고 정서는 얼마나 깊은가. 저 량반님네들의 고루한 음풍영월이나 주색잡기에는 비교도 할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생활이다.

미영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앞으로도 이들과 더 가깝게 지내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류린석도 루대에 올라 그 광경을 보면서 마음껏 웃었다. 오래간만에 만시름을 잊고 느껴보는 웃음이였다. 그것이 또한 지나간 생활을 돌이키며 새로운 결심을 다지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였다. 여느때에는 그들이 있는지 별로 관심조차 돌리지 않던 그였다. 그저 싸움을 위한 머리수로나 생각했지 이렇듯 넘치는 생활이 싸움을 이기게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역시 저 백산이와 같이 이름도 지위도 명예도 없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였다. 그래서 생각이 더 굳어지는것이였다. 앞으로 이 사람들을 믿고 싸움을 더 잘해나가리라고.…

 

린석이 이런 마음으로 새로운 결심을 다지고있을 때 서울에 있는 최익현은 궁중에 들어가 임금앞에 몸을 깊이 숙이고 그의 어명을 기다리고있었다. 홍정식을 통해 린석의 편지를 받고 다시 왕의 접견을 청했던것이다.

지금 왕은 발목을 덮는 자지색도포에 익선관을 쓰고 호상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이따금 호상의 팔걸이에 얹힌 두손을 교대로 다독일뿐 그렇게 정력을 기울여 힘들게 상주한데 대하여서는 들은듯만듯 아무 반응이 없다. 명성황후를 잃은 다음부터 더욱더 소심하고 침울해져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들어진 왕이다.

…지난해 말 전하께서 《애통소》를 내려보낸 후 전국에서 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강도 왜적들과 싸움을 벌리고있습니다.

지금 의병들이 일어난것을 보면 충정도 제천에서 대장 류린석이 첫 반기를 들고 충주성을 타고앉은 후 전국에 격문을 거듭 보내여 함께 봉기하도록 한것을 비롯하여 서울의 박준영, 강원도의 민룡호, 전라도의 기우만, 평안도의 조상학 등 해서, 관북 어디서나 의병들이 들끓고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지방들에서 고을의 장관들이 이에 응하지 않을뿐아니라 오히려 군사를 동원하여 왜병들과 함께 의병들을 치는 놀라운 사태가 빚어지고있습니다. 바로 왜놈들때문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여있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겠습니까. 특히는 임금의 주위에서 충심으로 전하를 받든다고 하는 대신들까지 그에 합세하여 애써 경군을 파견하고있으니 실로 용서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떠나간 군사들이 전하께서도 전번에 가상가상하다고 평가하신바가 있는 류린석의병대를 향하여 대포와 기관총으로 사격하고있습니다. 왜놈의 군대라면 몰라라 어떻게 왜놈들을 반대하여 일어난 제 나라 군사들을 쏠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경군의 출동을 이제라도 중지시키며 그런 명령을 내린자들을 엄격히 처벌하도록 조처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최익현이 힘들게 올렸던 상주문내용이다.

그런데 왕은 대답이 없다. 마흔이 지난 나이에도 아이적 젖살인듯 희멀끔하고 유들유들한 량볼의 살이 무엇이 못마땅한듯 이따금 꿈틀꿈틀할뿐이다.

익현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육감으로 느끼며 여전히 호상앞에 엎드려있다. 그가 지금 노리는것은 군부대신 조희연이와 법부대신 서광범이다. 그들의 명령에 의하여 지금 새로 경군이 보충되여 충청도로 떠나게 되는것인데 최익현은 비록 같은 급의 벼슬에 있다고 하지만 공부대신으로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자기가 가로막을수 없다.

톡, 톡, 톡, 톡… 또다시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왕이 어린 나이에 이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생겨난 버릇이다.

아직 왕이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한강변에 나가 연띄우기를 하다가 뜻밖에 들이닥친 보련에 올라 룡상에 앉게 된 그때부터 노상 공포와 두려움과 의심, 불안속에 살아온 그인것이다.

즉위 30년 가까운 세월 력사에 전고없던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그와 함께 흘러갔다. 근년에만 하여도 얼마나 중대한 사건들이 터졌고 얼마나 비참한 사건들이 빚어졌던가. 그럼에도 돌이키면 왕이랍시고 그가 결심하고 처리한 일이란 별반 없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 대원군(리하응)이 섭정을 한다고 하면서 백사를 좌지우지하였고 10년이 지나서부터는 《친정》을 요구하는 명성황후의 앙탈에 못이겨 민씨일파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였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천성이 조용하고 마음이 굳지 못한 그는 이여의 다른 문제들도 자기 주견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형세의 추이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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