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2 장

불타는 성

8

(1)

 

그것은 린석으로서도 전혀 뜻밖이였다. 백산이 자기의 요구에 그렇게까지 나올줄을 몰랐던것이다. 아니, 자기가 그렇듯 무시를 당할줄 몰랐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그것이 은연중 린석을 분하게 하였다. 그래도 자기는 언제나 백산을 위하자고 했고 그를 켠들어 힘도 안겨주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를 불러다 군사장의 임무를 맡아하도록 설복을 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끝내는 린석이 이기지 못하고 대신 후에 춘천에서 의병대를 이끌고 온 리필희에게 군사장의 직책을 맡겼다. 역시 린석과 잘 아는 사람이였다.

반대로 홍정식이네들과는 일정한 타협조로 나갔다. 우선 아직까지는 야마무라를 완전히 의심할수 없는데다 많은 군자금이 그의 손에 들어가있는 관계로 날자를 끌면서라도 값을 받아야 했기때문이였다. 야마무라도 인격무시요 무슨 보상이요 하면서 며칠 떠들다가 린석이 내놓는 타협안에 못이기는척 하며 물러서고말았다.

그들이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린석은 최익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임금의 《애통소》가 나온지가 언제인데 관군이 왜놈들과 합쳐 의병들을 친다는것이 웬말인가. 또 거기에 나라의 한다하는 대신들이 합세하고있다는 말은 어떻게 나온 소리인가. 최대감께서 이런 때 나서시여 나라일을 바로잡아야 할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그러느라니 또 며칠밤을 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듯 의병대안에서 떠도는 기분을 미영은 시시각각 느끼고있었다. 특히는 아버지와 김백산사이에 있은 일은 미세한 소식조차도 놓치지 않고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것이 미영으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한 참을수 없는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홍정식이 떠나간 날 미영은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찾아들어갔다.

《아버진 선봉장님이 군사장으로 되는것을 반대하셨다지요. 왜 그이라면 한사코 반대하시는겁니까?》

서안에 마주앉아있던 안승우가 맞갖지 않은 자세로 붓대를 집어던졌다.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반대한거다. 그게 왜 그렇게 된지 알겠니? 세상의 리치가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기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란 누구들이예요. 선봉대의 의병들은 다 그이가 좋다구들 해요.》

《의병들은 뭐라고 해도 의병장들은 그렇지 않다. 그것도 왜 그런가하면 세상의 리치가 그렇게 돼먹었기때문이다.》

시작부터 오가는 말투들이 곱지 않았다. 이것이 요새 그들사이에 오가는 일반적말투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켠에서 보면 딸 미영이 김백산에게 여전히 붙어돌아가는것이 싫었고 끝까지 반대할 심산이였다. 하기에 그는 전보다 더 자주 미영을 만났고 백산을 밀어내는 방향으로 그를 유도하려 하였다. 그것을 모를리 없는 미영은 여전히 그 반대로 나갔다. 억지로 가깝게 했다고는 할수 없지만 백산에게 끌리는 마음만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신녀성의 자세라고 할가 어쨌든 억지로 아버지의 구속에 매일수는 없었다.

《아버지, 제가 알기에 란시에는 천명의 문장지재보다 한명의 힘쓰는 무사가 낫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 진실로 나라를 위해 힘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버지는 우리 의병대의 공적이 과연 누구의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조상전래의 법도는 어쩔수 없는거다. 나라에는 란리가 항상 있는것도 아니고 일단 끝이 나면 그만이야. 그때에는 량반, 상놈이 다시 있게 되고 따라서 상하귀천도 자연히 갈라지게 되는것이다. 그만큼 학문이라는것이 시종여일 귀하게 취급되는것도 어쩔수 없다는것이야.》

《그렇다면 아버지, 란리가 끝나는것은 언제입니까. 그것을 끝내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끝을 낸다는것입니까.… 그런즉 아버지는 상사람들을 적당히 얼려서 란리를 끝내게 하고 다시 천시를 하겠다는것입니까. 그렇게 하는것이 량반들의 세상살이지론이십니까?》

《네가 상놈들을 따라다니더니 어른들앞에 함부로 고집쓰고 말대답질하는 버릇을 배웠구나. 내가 그들을 상놈이라고 욕하는것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가 아니라 지금처럼 네가 부모도 어른도 몰라보도록 시키기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량반이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평생 량반의 이름을 외우며 해놓은것이 무엇이며 얻은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에 대한 체면과 명예만 생각하고 글하는 사람만 제일이라고 절대시했지요. 그러는 사이에 남들은 기선을 타고 대포를 쏘고 총탄을 날리며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습니다. 하다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그들과 함께 왜적을 쳐야 할것인데 아직도 량반, 상놈을 따지며 신분만 가르려 하니 나라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기에 이즈음 항간에서는 량반을 가리켜 빛좋은 개살구, 허울좋은 하늘타리(한자로 천왕성, 즉 별의 이름으로 신성화되였으나 실은 보잘나위없다는 뜻)라는 낱말까지 생겨났습니다.》

《네가 아직도 량반을 욕할테냐?》

《좋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니 한마디만 더 여쭙겠습니다. 저는 평생 진창길을 헤매이는 상놈이 될지언정 허세나 거짓으로 남을 깔보는 량반이 되지는 않으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선봉장님과 같은 평백성들을 존경하며 더 따르고싶습니다.》

《네가 끝까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겠으면 김백산이한테 가라. 그러되 이 아버지의 얼굴에 똥칠을 하든가 이 먹물이라도 뿌려주고 가라. 그냥은 못 간다.》

하면서 서안우의 문방구들을 와락 집어던졌다.

그 서슬에 새까만 먹물이 종이우에는 물론 승우의 손등과 긴 팔소매까지 사방으로 튕겨났다.

순간 미영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구쳐나왔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마지막선고일수 있다는 예감이 날카로운 창끝처럼 가슴을 찔렀던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제 자기가 굽어들기만 하면 영영 그에 매여들고만다는 고집이 불쑥 솟구치기도 했다. 그것이 어쩔수없이 자기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버지 아닐수 있으며 잊으려 한들 잊을수 있겠는가.

《아버지, 아버지…》

무슨 말인가 하고싶었다. 그러나 가슴이 꽉 메이고 입이 굳어져 그 이상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정으로 차고넘쳤으나 걸음을 돌려 밖으로 튀여나왔다.

정신없이 달렸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데 누군가 문득 앞을 막아섰다.

《미영씨, 어딜 가오. 왜… 무슨 일이 있었소?》

뜻밖에도 김백산이였다. 무엇을 알고 우정 그러기라도 한듯 면바로 마주섰다.

순간 미영은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고싶은 격정에 가슴을 들먹였다. 남자란 무엇인가. 이런 때 녀자들에게 믿음을 주고 의지가 되여주는 기둥이 아닌가. 미영은 아무리 고대광실에, 노비전답에, 금의옥식에 음풍영월로 한생을 지낼지라도 제힘으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찬성할수 없다. 그는 자립을 원하며 자유를 바란다. 그것은 의지와 믿음을 전제로 하고있다. 그 의지와 믿음은 무더운 여름날 함뿍 땀을 낸 달리기선수가 설레이는 바다를 향해 뛰여들듯, 그 일렁이는 물속에서 마음껏 장구를 치며 뛰여놀듯 그렇게 넓고 시원하고 든든한 사나이의 품이였다.

지금 미영은 그 바다를 보고있다. 눈앞에 두고있다. 하면서도 그렇게는 마음대로 못하는것이 또한 녀자의 마음이다. 미영의 처지이다.

《왜… 어딜 가는 길이예요?》

생각과는 전혀 같지 않은 소리가 튀여나왔다.

《의논할 일이 있어서 미영씨한테 가던 길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소?》

《의논이요? 무슨… 저하고 무슨 의논할게 있다고 그러세요?》

《난 눈물을 좋아하지 않소. 그런데 자꾸 울고있으니 말을 할수 있어야지?》

《울긴 누가 울어요. 어서 말하라요.》

미영이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하였다.

《울지 않았다, 정말인지 어디 볼가.》

백산이 말한 그대로 할상 고개를 외로 숙여 미영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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