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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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유천은 최춘국을 눈앞에 똑바로 대하고있기나 하듯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정치지도원동지, 압니다. 압니다. 이제는 압니다!》

그 목소리에는 지나간 나날의 자기를 무섭게 돌이키고 드디여 정신을 차리고 앞을 내다보는 인간의 절통한 추억, 아픈 가책, 준엄한 결심이며 비상한 정신적성장이 다 깃들어있었다.

《아저씨, 이제 방금 무슨 말을 했어요. 무엇을 안다는거예요. 무엇을 몰랐기에 이제야 안다고 그렇게도 아픈 목소리로 말하는거예요?》

혜옥은 간절한 눈매로 리유천을 살펴보고 손으로는 헤쳐진 그의 옷자락을 여며주면서 알수 없이 부르짖는 그 목소리의 뜻을 리해하려고 애썼다.

리유천은 실성한 사람모양으로 입을 하 벌리고 혜옥을 마주보기만 하였다. 미상불 자기 일생의 총화나 다름없을 그 동란속의 가지가지 사연을 무슨 말로 이야기해줄수가 있겠는가? 비록 혜옥이도 옆에서 지켜보고 자기가 겪는 수난을 속속들이 헤아리기는 했어도 자기의 의식속에서 소리없는 진동을 일으키며 흘러간 사연이야 상상할수 있으랴.

《혜옥아, 나는 북만으로 가련다.》

리유천은 혜옥이의 물음과는 판판 다른 왕청같은 대답을 하였다.

《북만에요? 그리로는 왜 간다는거예요?》

장군님 찾아 그리로 가련다. 내가 왜 벌써부터 이 생각을 못했을가. 장군님을 찾아가 이 근거지의 무서운 동란을 보고하고 이 좀벌레들의 무서운 장난을 짓모아버리겠다. 내 다시야 숙반사람들의 오라를 스스로 짊어지고 혁명의 원칙마저 양보하고마는 그따위 얼빠진 행동이야 하겠느냐, 아니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는 못살아!》

《옳아요, 아저씨. 북만으로 가라요!》

혜옥은 당돌하게도 아저씨를 지지해나섰다.

《김진세아버님이 그러시는데 최춘국정치지도원동지가 창억이 오빠랑 몇사람을 가만히 북만에 보냈대요. 그러니 아저씨도 가라요. 분명 아저씨가 떠나면 여기선 소동이야 있겠지만 장군님 모시고 돌아오는데야 저들이 어쩔테예요.》

《그따위 사람들이 뭐라든 그런건 생각지도 않는다. 그 사람들이 너를 보고 묻거든 아저씨가 장군님을 찾아 북만으로 갔다고 해라.》

《알겠어요, 아저씨. 그럼 이 배낭을…》

혜옥이는 등에 지였던 배낭을 황황히 벗어 리유천의 어깨에 지워주며 목수건을 끌러 머리로부터 얼굴, 턱, 목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곳 바람이 들어갈세라 찬찬히 둘러주기 시작하였다.

리유천은 가슴을 들먹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였다. 문득 적구에서 돌아오지 못한 혜정이 생각이 가슴을 에이며 날아들었다. 식량운반대가 돌아오면 작은 잔치를 치르고 집에 데려갈 작정이노라 즐겁게 외우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귀밑까지 붉히며 어쩔바를 몰라하던 그 혜정이, 그 진실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있기에 놈들이 꾸며낸 더러운 허물을 묵묵히 들쓰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가?

이 하늘아래, 이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입에 밥을 떠넣는 산 사람이 되여가지고야 이 참혹한 비극의 절정에서 뛰쳐나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을수 있단말인가? …

《아저씨, 제발 몸성히 장군님 모시고 근거지로 돌아오라요.》

《응, 그러마. 너희도 몸성히 잘 있거라. 부락에 떠도는 혜정언니 소식은 꿈에도 믿지 말구.》

《알아요. 우리 언니는 내가 알아요. 나쁜놈들이 무슨 말인들 꾸며내지 못하겠어요. 언니가 돌아올동안 그리고 아저씨가 돌아올 때까지 아버님 편의랑 내가 돌봐드려요. 걱정말고 떠나라요.》

《고맙다. 고마워.》

리유천은 강심을 품고 돌아섰다. 그는 한달음에 요영구 뒤산을 넘어 한때 장군님께서 원정부대를 데리고 떠나신 뒤틀라즈를 바라고 걸음을 다그쳤다.

그는 한겻동안 거의 정신없는 걸음을 내짚었다. 하루라도 한시각이라도 더 빨리 장군님을 찾아가 이 요영구의 참상을 보고해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에 깊이 포로되여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리유천의 머리에는 번개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장군님께서 주신 적구투쟁과업을 실천하지 못하고 요영구땅에 이처럼 무서운 동란을 가져다놓은 자기가 한몸 내던지고 뛰여들어 이 비극을 끝장낼 대신에 그것을 피해 북만땅에 원정을 가계신 장군님을 찾아가야 옳을것인가? 하는 강력한 의문이 일어난것이다.

리유천은 후두두 떨려오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발을 멈추었다. 명령을 관철하지 못한 전사가 장군님을 찾아간다는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더구나 장군님의 혁명사상을 고수하는 격렬한 싸움에서 자기는 상처를 입고 물러났던 인간이 아닌가?

자기가 물러선 그 길에 최춘국정치지도원이 뛰여들어 고전을 겪으며 혁명의 대들보를 갉아먹으려는 나쁜자들과 판가리싸움을 벌리고있는것이다.

(리유천이, 너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있는것이냐? 인간의 초보적인 량심도 도의도 없이 혁명가의 의무도 의리도 신념도 다 잊어버리고 허울만이 남아 어디로 허둥지둥 가고있는것이냐? 돌아서라. 이제라도 돌아서서 적구로 가라. 최춘국지도원을 찾아가 그동안의 과오를 비판하고 장군님의 명령을 관철하기 위해 적구에서 소부대활동을 해야 한다.)

가슴속에서는 이러한 목소리가 불길처럼 일어나 온몸을 지졌다.

어째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하고 여기까지 왔는가? 리유천은 자기라는 한 인간의 존재를 시험대우에서 살펴보듯이 이모저모로 뜯어보며 허무하고도 처량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마치 혁명의 도피자와도 같은 참혹한 수치가 온몸에 전률을 일으키고있었다.

리유천은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새 정신없이 다그쳐온 그 길을 이번에는 거의 반달음을 놓아 헐떡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산속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였으며 또다시 밤을 맞이하였다. 그사이에 리유천은 쉬지 않고 걸었다. 총도 없고 수류탄 한개도 없는 빈몸에 빈손이였지만 그는 적구를 향해 숨찬 행군을 계속하였다.

혜옥이가 지워준 배낭속에는 쌀도 있고 남비도 있고 성냥도 있어 어디서나 남비를 걸고 밥을 끓여먹을수 있었으나 리유천은 도저히 그 생각을 못하였다. 한점 불을 피워 언몸을 녹일 생각은 더구나 못하였다. 자기의 편의를 위해 할수 있는 일체의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하루속히 적구로 가는 일만이 남아있었고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뿐이였다.

리유천은 벌써 며칠동안을 잠도 잊고 휴식도 없이 가고있었다. 그러나 피곤을 몰랐다. 이따금 무엇인가에 걸려 쓰러지기도 하고 딩굴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극도의 피로와 쇠약으로부터 오는 허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을 의식할만한 정신적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로상에서 허우적거리고있는사이에 근거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을지 모르며 적구에 들어간 최춘국정치지도원에게도 어떤 일이 다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자기의 실책과 과오로 하여 빚어진 무서운 동란이 처처에서 딩굴며 한모양으로 지켜보는듯 한 당황함과 초조감이 일체의 모든 감정과 사고를 앞질러 그의 눈앞에 나타나있었다. 매 순간 량심의 거울앞에서 자기를 들여다보며 이미 저지른 과오를 따지고 추궁하는 무서운 재판관의 목소리를 줄곧 들어가면서 리유천은 가고 또 갔다. 그리하여 지금 그가 걷고있는 이 땅은 어느덧 적구였다.

그는 한때 송혜정이 무수평공작지를 나다닐 때 통로를 잡고있었던 가야하 기슭으로 가고있었다.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듯 중대한 사명을 띠고 총총히 나다녔고 무수평일대의 공작을 마치고는 날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이 길을 왔으며 다시 불안과 걱정과 기대를 품고 적구로 가던 그 길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적들의 추격을 당해 피를 흘리며 달음질쳐오던 가야하 기슭을 가고있었지만 이 길에 찍힌 눈물겨운 사연을 알수가 없었다.

모르고 지나면 세상만사는 다 무난한 법이다. 사랑하는 그 혜정이, 놈들이 꾸며낸 무서운 수치를 한몸에 들쓰고 이 가야하 기슭의 어느 낭떠러지에 굴러나 생사여부를 알수 없이 된 안타까운 사연이 걸음걸음 리유천의 발목을 붙잡고 눈물겨운 목소리로 속삭이고있었을것이지만 들리는것은 강기슭의 수림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소리뿐이였다.

그랬건만 리유천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자기가 가고있는 이 지대를 똑똑히 알수가 없었다. 모르고 허망중 가다가는 로상에서 시간을 다 놓쳐버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느덧 강기슭에는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기여들기 시작하였다. 주위에 인가라도 없을가 하여 산등으로 치우쳐올라가며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하였다.

문득 숲가에서 반디불같은것이 반짝거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숯구이막이였다.

리유천은 불빛이 너울거리는 창문앞에 다가서서 인기척소리를 내고 주인을 찾았다.

안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봉창만한 지게문이 펄짝하고 열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길을 물어갈가 해서 들렸습니다.》

불빛을 등지고있는 령감의 얼굴은 알수가 없고 그저 시커먼 형체만 문밖으로 불쑥 내밀려있는데 거기서는 잠간 아무 소리도 없었다.

《먼길을 오는 길손인가보군. 한데 어디루 목적하구 떠났기에 이 골짜기에 빠졌소?》

《천교령이나 쌍하진쪽으로 나가면 되겠습니다.》

《허, 왕청같은곳으로 왔구먼, 이 기슭으로 그냥 내려가면 무수평이요.》

리유천의 가슴은 갑자기 놀라 후두둑 하고 뜀박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무수평!… 꿈속에서조차 잊지 못하던 그 이름을 숯구이막로인의 입에서 이리도 쉽게 듣게 될줄을 어찌 알았으랴.

리유천은 자기도 모르게 로인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섰다. 마치 이 로인이라면 혜정의 소식마저도 알고있는듯이…

리유천은 목이 타드는듯 한 갈증을 느끼며 조용히 물었다.

《여기서 무수평은 얼마나 됩니까?》

《칠십리길이요. 지름길로라면 한 오십리나 될가?》

《로인님은 그쪽에 자주 나다니십니까?》

《여부가 있소. 숯섬을 짊어지고 장날마다 간다오. 한데 무수평에 아는 사람이라두 있소?》

《예, 그저…》

리유천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언저리가 뜨끔거리고 입으로는 더운숨이 쏟아져나왔다.

《거기 서있지 말구 들어오구려. 정 바쁜 길이 아니면 하루밤 묵기라도 하던지.》

《묵을 형편은 못되지만 담배나 한대 태우구 떠나겠습니다.》

리유천은 어떤 알수 없는 힘에 끌리여 허리를 구부리고 네발걸음을 하고야 드나드는 지게문으로 기여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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