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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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하일은 방금 한차례의 격전을 치르고난 어수선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고지중턱으로부터 행길가에 이르기까지 흰눈우에 누렇게 자빠져있는 적들의 시체는 돌에 치이고 연장에 찢기워 자못 험상한 광경을 그리고있었는데 여기저기 연장들을 짚고 혹은 적에게서 빼앗은 총들을 둘러메고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방금 치르고난 육박전투의 열띤 흥분들이 사라지지 않고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어리무던하고 유순해보이던 구당비서 김학림이까지도 왜놈장교에게서 빼앗은 기다란 군도를 막대기처럼 꾹꾹 내려짚으며 사람들을 향해 빨리빨리 돌산무지들을 쌓아올리자고 웨쳐대고있었다.
사람들은 곧 흩어져 일에 달라붙었다. 한쪽에서는 언땅을 까제끼고 돌을 추어내고 다른쪽에서는 돌을 담아 경사면에 세워놓을 덫을 만드느라고 삼바오리에 통나무를 엮어대고있었다. 사방에서 통나무를 잘라내는 톱질소리, 도끼질소리가 요란하고 정대를 대고 돌을 까는 쇠메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백하일은 네모난 턱을 불쑥 쳐들고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방어자들을 굽어살피면서 여기저기로 돌아갔다. 무릎마디까지 불쑥 올라온 시뻘건 왜놈의 장화목다리는 눈과 흙으로 매닥질이 되고 허벅다리까지 내려온 누른빛 락타지 반외투는 가시돋힌 아가위나무줄기에 긁히고 묵은 락엽들과 썩정가지들을 뒤집어쓰기도 하여 허름한 솜저고리처럼 볼꼴없이 되여버렸다.
《그래 이런 식으로 방어지대를 며칠이나 고수할것 같소, 구당비서동무?》
백하일은 무뚝뚝하고 푸접없는 소리로 뒤따르는 김학림을 향해 물었다.
《며칠이라니요. 끝까지라도 고수할수 있는거지요.》
《뭐 끝까지 고수한다? 그렇게
《
김학림은
《그렇게 큰소리가 나오는 형편이면 어째서 내가 없는사이에 방어구역이 십리나 안으로 밀려들었소. 어째서?》
백하일의 눈에서는 전에없이 확대된 흰눈자위가 핑핑 돌아가며 서슬푸른 광선이 쏟아지고있었다.
《그건 우리가 밀려서 그렇게 된게 아니고 방어가 유리한 계선으로 옮겨앉느라고 그렇게 된겁니다. 이전에 방어하던 구역은 방어전면이 넓고 적들이 기동할수 있는 큰길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우리에게는 확실히 불리했습니다. 그래서 최춘국동지가 적구로 떠나면서 방어계선을 안으로 옮겨주었지요. 사태는 결국 이렇게 된거지요.》
《구당비서동무, 거기에 바로 문제가 있단말이요. 문제가 있어. 최춘국동무가 적지 않은 력량을 빼가지고 적구로 들어갔기때문에 나머지력량으로 방어지대를 지켜낼수 없었단말이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적구교란작전이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방어지대를 한 십리 내주었다고 이게 큰문제가 아니지요. 문제는 있는 력량으로
유리한 계선에서 적을 견제하면서 배후에서 놈들의 뒤통수를 쳐갈기는것이 중요합니다. 리유천동무가 벌써부터 적구에서 소부대활동을 잘했더라면 우리는
애당초 소북구와 대북구 계선에서부터 밀리지 않았을겁니다. 그런데 그 동무가
백하일은 가죽채찍으로 장화목다리를 두드리면서 김학림의 아래우를 흘겨보고있었다.
《그건 도대체 누가 하는 소리요. 동무의 목소린가 아니면 최춘국의 목소린가? 동무는 자기의 똑똑한 견해로 말해야 해. 리유천이가 소부대를 데리고 적구에 들어가지 않았댔는가? 들어갔었지. 들어갔었지만 처처에서 놈들의 기습을 받아 퇴각하고말았단말이요. 그러면서 이쪽의 방어력량은 그만큼 약화시키고… 엄중한가? 엄중하지. 대단히 엄중하단말이요. 반혁명을 하는 놈들이 이마빼기에다 〈내가 반혁명을 한다〉 이렇게 써붙이고 하는줄 아는가? 음으로 양으로 하고있단말이오. 구당비서가 혁명의 눈으로 이런걸 똑바로 가려보지 못한다면 구당산하의 당원들은 청맹과니가 돼. 눈뜬소경이 된단말이요. 리유천이가 아무 일도 못치고 돌아온 소부대를 데리고 최춘국이가 적구로 빠져나간 사실을 뭘로 분석해야 옳은가? 그건 근거지야 어떻게 되건 유격대나 살려가지고 장차 백두산쪽에 나가 조선혁명을 해보자는 수작이야. 여기 송명준이라는 사람은 벌써 백두산에 나가 유격대가 나오면 살림을 펼 귀틀막을 꾸리고 온돌에 장작불을 지피고있다고 해. 이런 식으로 동만땅의 혁명력량을 분할시키고 돌아앉아 민족주의를 하자는건데 구당비서라는 사람은 멋도 모르고 최춘국의 장단에 발을 맞추고있거든.》
김학림의 얼굴은 단번에 새까매졌다. 그는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대꾸하였다.
《저는 한번도 그렇게는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감히 그렇게야 어떻게…》
백하일의 얼굴근육이 푸들푸들 뛰놀았다. 그는 힐난하듯이 구당비서를 향해 그 네모난 턱을 다시 불쑥 치켜들었다.
《그래 누구를 향해 감히 그렇게 생각할수 없었다는거요. 도대제 누구를 향해서? 피로 쟁취한 근거지땅을 사수하고 혁명을 밀매하는 자들과 사생결단을 하자고 하는판에서?… 혁명에 대한 동무의 충실성을 내가 조금이라도 의심하고있다면 구당비서는 즉시에 숙반감옥으로 가야 해. 현당서기가 어떻게 처형되고말았는지 구당비서는 똑똑히 보았을게 아닌가? 여기서 우물쭈물하지 말고 즉시 방어자들을 총공격으로 일떠세워 소북구와 대북구까지는 몰라도 이전에 나가있던 방어지대만이라도 차지해야 하오. 적들에게 근거지땅을 호락호락 내줄수 없단말이요. 최춘국에게는 즉시 사람을 보내여 돌아오라고 하겠소. 돌아오면 그 사람도 숙반에서 검토를 당해야 해.》
그때 아주 가까운 산중턱에서 탕! 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백하일은 깜짝 놀라 홱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소리요?》
《리호검로인이 쌍대배기를 들고앉아 저쪽 산모퉁이에서 돌아가는 놈들을 저격하고있습니다.》
《뭐 리호검이가?…》
백하일은 너무도 놀라고 뜻밖이여서 지어 어리둥절해지는 눈으로 김학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반혁명분자의 애비가 구당비서앞에서 태연히 돌아치며 쌍대배기로 불질을 하는가? 거 쌍대배기가 지금은 누구를 향해 겨냥해있던간에 이것은 과오요, 엄중한 과오야. 반혁명분자들과 타협을 해도 분수가 있지. 즉시 고지에서 내리쫓고 쌍대배기도 압수하오. 저 늙은이의 야장간에서 밥을 끓이는 일도 다 중단해야 하오. 집이 없어 그따위곳에서 밥을 지어?… 저따위 반혁명분자들은 요영구땅에서 그림자도 얼씬 못하게 아주 추방해버려야 하오.》
백하일은 날카롭고도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고지에서 내려갔다.
백하일이가 내려간뒤로 강시중이가 헐떡거리며 올라왔다. 돌산들을 쌓느라 바삐 돌아가던 사람들은 모두 손맥이 풀려 여기저기 퍼더버리고 앉아있었다.
《왜들 이러고있소?》
강시중은 눈이 퀭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백하일동지가 돌산들을 쌓지 말랍니다. 뭐 총공격을 한다나요?》
구당비서는 말이 없고 리호검의 야장간에서 여우털가죽을 깔고앉아 풍구를 밀고당기고 하던 농군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어디를 향해 총공격을 해?》
강시중이로서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현대무장을 갖추고 골짝바닥에 새까맣게 들이와있는놈들을 정면으로 맞서 육박해들어간다는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돌산들을 쌓소. 무작정 공격을 한다고 이기는게 아니요. 공격이냐 방어냐 하는 문제는 적아간의 력량대비로부터 출발하여 결정하는거란말이요. 이건 군사학의 초보적 개념이야. 영 셈판들이 없거던.》
누구를 향해 나무라는지 알수 없는 소리로 한바탕 떠들어대고나서 강시중은 부랴부랴 고지를 내려갔다.
방어자들은 다시금 기세를 올리고 돌산들을 쌓았다. 그러나 저녁무렵에 이르러 다시 총공격명령이 떨어졌다.
강시중이 제아무리 현당서기의 권위로서 문제를 옳게 끌고나가려해도 숙반의 일군인 백하일의 힘을 누를수 없었다. 게다가 강시중은 이 근거지땅에서 끌끌한 핵심들과 자기의 경쟁자들을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려는 야심을 항상 가지고있었으므로 자기도 모르게 백하일의 모략에 끌려들었다.
그는 이번에 근거지의 방어자들을 총공격에로 일떠세워야 하겠다는 백하일의 무모한 주장에는 찬성할수 없었으나 방어계선을 좀 유리한 계선에 옮긴다고 하면서 뒤로 후퇴하고 가뜩이나 빳빳한 부대의 력량을 갈라 적구에 들어간 최춘국이를 잡아다 문제시하며 숙반감옥에 처넣어야 하겠다는 백하일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최춘국이를 문제시하자면 그가 방어계선을 뒤로 옮기면서까지 적구로 부대를 데리고 들어간 사실을 과오로 떠들어야 하며 따라서 최춘국이가 내여준 방어계선을 차지하는 피자박이싸움을 벌려 난사를 일으키는것도 유익할것이라고 타산하였다.
이리하여 강시중은 최춘국이도 문제시하고 근거지의 방어자들도 적들에게 통채로 내맡기면서 결과적으로는
싸움은 밤중에 일어났다.
구당비서 김학림은 도저히 그렇게는 안되리라고 믿었던 싸움이 불시에 터지고 이미 떨어진 명령에 따라 유격대와 청년의용군 방어계선에서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자기가 지휘하는 반일자위대와 인민들을 공격서렬에 따라세웠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자기 한몸을 내대고 과감히 싸울 비장한 결심을 다졌다.
그러나 총공격이 개시되여 삼십분이 지나자 공격서렬은 처처에서 적의 기관총과 박격포탄의 집중화력을 받고 토막토막 끊기여 좌우익측의 련계도 없고 지휘부의 통일적인 명령도 없는 고립무원한 상태에 놓이게 되였다.
어떤 구역에서는 적을 밀고 그냥 공격을 개시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적들에게 밀리워 가야하를 넘어서고있었다. 김학림의 반일자위대는 퇴각하는 부대에 속하였다. 그들은 한발자국 한발자국 물러서면서 고전을 겪었다.
벌써 부락의 한쪽가녁이 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곳은 숙반이 자리잡고있던 산기슭이였는데 적들이 밀려들자 숙반대원들은 수감자들마저 팡가쳐버리고 산으로 올리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