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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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유일한 락으로 삼고 평화롭게 살던 시절은 영영 지나가버린것 같았다.

배고픔이상 더 큰 고통이 세상에 없다고 하지만 한낱 굶주림 정도가 고통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요영구골안에 날마다 늘어났다.

리유천의 식량수송대가 실패하고 돌아온 후에 요영구사람들이 느꼈던 한결같은 불안은 이 엄동설한에 근거지인민들이 무엇을 먹고 살아가며 대북구쪽에 나가 싸우는 유격대에 때식을 어떻게 날라다 주랴 하는 그것이였다.

1932년과 33년의 그 무서운 기근을 이겨낸 사람들이건만 이해의 겨울나이식량난으로 더 이를데없는 근심에 눌려있었던것이다. 기근이란 어떤것이며 그 기근에 쌍둥이처럼 잇달려오는 병마가 어떤것인지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였기에 해춘을 만나 풀뿌리를 뚜져먹기까지 아직 장 넉달을 기다리고있어야 하는 그 고생을 세상없이 막막한 일로 여기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엄중히 사람들의 생사를 위협하던 식량난우에 검은 구름장같이 들씌워진 반《민생단》투쟁의 미친 회오리바람은 죽으면서도 그것만은 지키려 애썼던 혁명가의 깨끗한 량심과 의식마저 짓밟으면서 혁명이 키워낸 모든것을 송두리채 잡아엎으려고 발광하였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혁명동지들사이에, 이웃들사이에, 친지들사이에 의심이 생기고 분규가 일어나고 참혹한 희생이 빚어지며 풀길 없는 의혹과 비분속에 휩싸여 그 누구를 원망하고 그 누구를 저주하며 번민의 바다속에 온 근거지가 잠겨드는 이런 란리를 똑똑한 리성으로야 어떻게 감수하고 지탱해나갈수 있단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근거지를 떠나갔다. 절박한 사연없이 원망없이 근거지를 떠나간 사람이 있을수 없었다. 이 근거지땅을 지키느라 아들을 묻고 어머니를 묻고 딸을 묻고 남편을 묻으며 싸워온 사람들이 여간한 사연없이야 이 근거지를 어찌 떠날수 있단말인가?

밤을 자고나면 여기저기 빈집이 생겨났다. 아침이 되도록 문이 열리지 않아 찾아가보면 밤새 떠나간 집이였다. 열려진 문을 점도록 닫지 않아 무슨 일인가 황황히 달려가보면 그것도 사람없는 빈집이였다.

이제는 밤새 내린 뜨락의 눈을 치지 않아도,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아도 벌써 빈집이려니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놀랄것도 이상할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소란통에서도 어떻게 견뎌배기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고 놀라울 지경이였다.

혜옥이네는 벌써 라자구쪽으로 가려고 몇번이나 짐을 꾸렸다풀었다했는지 모른다. 로야령을 넘어올 때 장군님께서는 요영구에 들어가 리유천이를 만나보고는 라자구쪽에 나앉으라고 귀띔하셨는데 장군님 말씀대로만 했더면 지금같은 이 고생을 치르지 않아도 될것이였다. 그런데 요영구에 들어온 초기에는 리유천이가 대북구쪽에 나가있었고 식량수송대사건이후에는 그 소란으로 언제 정신을 출 사이가 없었으며 이즈음에는 적구에 소부대를 데리고 나간 사람을 두고 숙반에서 밀정이니 뭐니 하는 말을 계속 떠날리고있었으므로 그 험한 소리에 눌려 다시 이사갈 생각을 못하고있는것이였다.

그러다나니 이제는 혜옥이까지 숙반이 노리는 대상인물로 되고말았다. 처녀는 벌써 몇번이나 숙반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는지 모른다. 숙반에서는 내놓고 《너에게 지령을 준 헌병대장교가 누구냐?》 하고 따지는판이였다. 숙반에서는 처녀의 몸에 매질까지 서슴지 않고 하였다.

《너희 집에 있는 그 번쩍거리는 놋그릇들은 무슨 공로로 헌병대에서 받은것이냐? 혜정이하구 네가 헌병대에 가져다바친 자료들을 곧이곧대로 불어라.》

숙반에서는 별의별 험담과 억측을 다하는판이였다.

혜옥이네 집에 있는 놋그릇들은 혜정이를 양딸로 데려간 가죽도매상이 어린 처녀의 몸값으로 보내준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야 숙반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놈들이 며칠 생각할 여유를 준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낸 날 혜옥은 어머니와 의논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놋그릇들을 보자기에 싸들고 가야하로 나갔다.

밤이여서 가야하 기슭은 물소리뿐이고 행길에는 인적이 끊기여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하였다. 이런 날 처녀의 몸으로 혼자 강가에 나와보기는 혜옥이에게 처음으로 되는 일이였다.

하늘에는 만월에 가까운 둥근달이 걸려있었다.

혜옥이는 보자기를 풀고 커다란 놋양푼 하나를 물속에 던져넣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놋양푼은 마치 물속에 빠진 사람모양으로 이리저리 뒤틀거리며 물을 받아 마시더니 소리도 없이 물속에 가라앉아버렸다. 그다음 놋대야, 놋대접, 놋초대, 놋제기, 놋술잔을 차례로 가야하 물속에 내던졌다.

잠간사이에 물속에는 누런 놋그릇들이 한무지 가라앉아 부드러운 달빛을 받아 은근히 빛나고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려니 혜옥에게는 마치 물속에 가라앉은것이 놋그릇이 아니라 자기 몸인것 같이 느껴졌으며 자기가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며 저주로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것 같이 생각되였다.

불행한 인생의 기구한 운명과 그리도 깊이 인연을 맺었던 놋그릇들을 가야하 물속에 수장해버린 혜옥이는 적구에서 돌아오지 못한 언니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울었다.

이날밤은 모진 추위가 강기슭을 휘몰아쳤다. 마치 혜옥이가 눈물로 수장해버린 귀한 놋그릇들을 그 누가 훔쳐갈가봐 겁내기라도 하는듯 밤사이에 강을 번번히 얼궈붙이고말았다. 그리고 날마다 얼음의 두께를 넓혀갔다. 이제는 그 강에 도끼를 들이대지 않고는 그 귀한 물건에 손을 대볼수가 없게 되였다.

가야하는 마치 욕스런 세상을 저주하여 스스로 몸을 던져 물속에 가라앉아버린 혜옥이의 한스런 넋이기라도 한것 같은 놋그릇들을 자기의 품에 깊이 껴안고 소란한 세상의 한기슭에서 부락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며칠후에 숙반대원을 따라 부락으로 들어오던 리유천이가 그 가야하의 얼음우를 건넜다. 그때는 벌써 사람이 아니라 말이 들어서도 깨지지 않을만큼 얼음이 두터워졌다. 리유천은 얼음우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 가야하 기슭에서 혜정이가 놋그릇을 닦으며 자기를 기다리던 때의 일을 문득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놋그릇들이 얼음밑의 물속깊이에 조약돌마냥 내던져져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었다.

리유천은 결국 모르고 지나간셈이였다. 리유천이 가야하를 건너온 다음날 혜옥이는 얼음우에 생겨난 두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리유천이 부락에 들어왔다는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리유천을 체포하려고 숙반에서 사람이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혜옥이는 틈이 나는대로 가야하로 나오군하였는데 어제 없던 발자국이 밤사이에 생겨났을뿐만아니라 군화바닥에 고무덧창을 댄 자기 아저씨의 신발자국을 똑똑히 알아보았던것이다.

며칠후에 리유천이가 숙반에 잡혀와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뒤이어 숙반형장에서 고문을 당하여 사람을 알아볼수 없을 지경이 되였으며 옷이랑 갈가리 찢어져 살이 드러났다는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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