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회)

제 8 장

1

 

리호검로인은 밤중에 누군가 닫아놓은 삽짝을 소리없이 밀고들어와 짝바라지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무릎걸음으로 문앞에 다가갔다.

《뉘시오?》

리호검로인은 안으로 닫아건 문고리를 벗기려고 여기저기 손더듬을 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내 김진세오다. 문을 열지 말라구요.》

리호검로인은 방금 잡았던 문고리를 얼른 놓고 그대신 문턱밑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밤중에 무슨 일로 급히 오셨소. 예?》

리호검로인은 경황없이 다그쳐묻고 짝바라지에 한쪽귀를 가져다 붙였다. 멀리 나무숲을 헤치고 지나가는 짐승의 발자국소리도 놓치지 않고 가려듣는 로인이였으나 혹시 밖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가봐 겁이 났던것이다. 밖에서는 잠시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리호검로인은 조금 기다리다가 이 어른이 가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짝바라지를 잡고 꺼떡꺼떡 흔들었다.

《밖에 사람이 있소?》

《있지 않구요… 있소다.》

리호검로인은 금시 입을 다물고 약간 겁을 집어먹은듯한 그 소리를 놀랍게 되새겼다. 밑도끝도없이 가슴이 쿵쿵 방아를 찡었다.

《리로인?》

《예.》

《무슨 소리 못들었소?》

《아니요.》

《부락에 쉬쉬한 소리가 나도오.》

리호검로인은 점점 더 가슴이 활랑거렸다.

《무슨 소리게요?》

《저 밖에 나간 사람한테서… 우리 창억이말이우다.》

《그런데요?》

《그 애 하는 말이 제가 무슨 일로 현당에 들리니까… 혜정이가 글쎄.》

《뭐요, 우리 혜정이가 어쨌단말이요?》

리호검로인은 김진세가 부디 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펄쩍 문을 열어젖혔다.

문앞에 바투 다가앉았던 김진세는 궁둥방아를 찧고 벌렁 넘어졌다.

《덤비지 말라구요. 남들이 알겠소.》

부락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은 녀성숙소가 있는 그아래쪽에서 들리더니 차츰 우로 올라오면서 재봉소와 청년의용군병실모퉁이를 돌아 호검로인의 야장간이 있는 가야하 기슭으로 옮겨가 떠들썩하였다.

여느때같았으면 호검로인이 야장간에 도적이 들지 않았나 하여 쌍대배기 렵총을 벗겨들고 달려나간지도 오랬을것이지만 지금은 푸수리의 발톱같이 아귀센 손으로 문턱을 그러잡고 어둠속을 쏘아보기만 하였다.

지금은 도적같은것이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설사 도적이 들었다 해야 손쌀게 벼려놓은 도끼, 낫, 삽, 곡괭이 같은 연장들과 풍구질군이 깔고앉는 여우털가죽이나 집어갈것이지만 숙반에서 부락의 개들을 짖기면서 한고패 돌아간 날 밤이면 숱한 사람들이 잡혀가 숙반《감옥》에 갇히고 이미 갇힌 사람들중에서 몇사람은 처형되기도 하고 어디론가 알수 없는곳으로 끌려가기도 하는판이였다.

오늘밤에도 숙반에서 출동한 모양이였다. 문턱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로인들은 개짖는 소리가 어디로 옮겨가고있는가 그것만을 주의깊이 살피면서 가슴들을 떨었다.

출판소에서 한사람이 잡혀가고 한사람이 도망친 후에 체포소동이 바람처럼 일어났다. 백초구와 연길쪽에 드나들면서 등사잉크며 원지, 종이들을 구해들여 근거지의 출판물을 찍어내던 리한상은 왜놈 헌병대에서 박아넣은 간첩이라고 제입으로 실토했다는것이며 리한상이 체포될 때 도망쳐버린 한무인은 리한상과 공모하고 근거지의 혁명사업을 좀먹고있었던 《민생단》이라고 하였다.

숙반이 얼마나 드센지 현당서기 허건이까지도 며칠전에 목이 날아났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가 연길헌병대장 가또의 간첩으로 판명되였는데 그것을 들추어낸것은 현정부 회장이던 강시중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강시중이 현당서기를 한다.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일이 근거지의 하늘밑에서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고있는가.

두 로인은 부락의 개짖는 소리가 끊기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문득 리호검로인의 집 삽짝앞으로 가로지나간 행길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일어났다. 깜짝 놀란 김진세는 네발걸음으로 문턱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턱안에 머리를 박고 죽은듯이 엎드렸다. 어둠속으로 시커멓게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하나둘 삽짝앞을 지나갔다.

김진세는 눈뿌리에 힘을 주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부락을 뜨는 사람들이요. 몇집은 되는갑소.》

문턱에 귀바퀴를 붙이고 발자국소리를 가늠해 듣던 호검로인이 가만히 머리를 들며 속삭였다.

《예, 틀림없는 피난민이우다. 벌써 부락의 삼분지 하나가 떴는데…》

《이러다간 근거지가 거덜이 나겠소. 내남없이 자식을 키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독수리발톱에 새끼들을 채우기전에 둥지를 옮기느라고 저러는거우다.》

호검은 한숨을 내쏟았다. 김진세도 한숨을 쉬였다.

《김로인?》

《얘길하우.》

《아까 하자던 말이 뭐요?》

《내가 뭘 어쨌게요.》

《우리 혜정이가 뭐 어떻게 됐노라 하지 않았소?》

김진세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담배쌈지를 찾는것처럼 염낭을 뒤지는 눈치더니 그게 헛손질인듯 잠잠해졌다. 호검은 무릎에 올려놓은 손가죽이 이상하게 차들어 팔목에 끼운 곰털토시를 손등에 내리웠다. 토시는 한쪽밖에 끼워있지 않았다. 그래서 토시가 없는쪽 손은 무릎밑에 찔렀다. 방바닥은 벌써 온기를 잃고 선뜩선뜩해졌다. 밤이 퍼그나 간 모양이였다.

《혜정이말이요.》

묵묵히 말이 없던 김진세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호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얼결에 김진세의 무릎을 내짚었다.

《자꾸 갑자르지만 말구 얘길하우. 이거 속이 조여 견디겠소. 범사냥도 이렇게 죄우진 않소.》

호검은 숨이 가빠서 하던 말을 멈추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속을 번개처럼 누비고 지나갔다.

《우리 혜정이가 뭐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니요?》

《예, 비슷한 소리우다.》

《뭐가 비슷하다는거요. 우리 혜정이가 어떻게 됐단말이요?》

《말 마오. 혜정이가 놈들에게 귀순했다는 소리가 있더라오.》

호검로인은 후닥닥 뛰여일어났다. 그리고 한동안은 넋나간듯 멍청해서 있더니 뒤이어 허겁지겁 돌아가며 소리를 질렀다.

《로친네, 불을 켜오. 불을 켜. 성냥이 어디 있소. 솔광은 어데 있구. 온통 제놓은 자리에 없으니 귀신의 조화가 아닌가. 어서 불을 켜란말요.》

호검은 드디여 어디선지 성냥을 찾아들고 일어서다가 머리로 조앙덕대를 받았다. 나무함박, 오지항아리가 부뚜막에 떨어져 악바라지는 소리를 내고 부뚜막에서는 다시 무엇이 봉당으로 내리굴며 왱강쟁강하였다.

《아니, 세간을 치는게 아니요?》

김진세가 깜짝 놀라 고함을 쳤다.

《세간을 치면 뭘하오. 이따위 세간등속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소.》

김진세는 호검을 잡아앉히려고 두손을 뻗치고 돌아갔다.

《이거 좀 진정하오. 아직은 확실치도 않은 뛰뛰한 소리요. 알아보지도 않구 왜 이러오?》

《알아보나마나 그쯤되면 숙반에서는 사람잡이를 떠나는게요. 어떤놈이 그따위 소릴 돌렸소. 어떤 쥐리틀놈이?…》

리호검은 성냥갑을 던져버리고 쌍대배기를 집어들었다.

《내게도 총이 있다!》

호검은 그 한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 문을 차고 뛰여나갔다. 김진세가 손쓸사이도 없이 호검로인은 삽짝을 발길로 차버리고 현당이 곧추 내려다보이는 행길로 냅다 달렸다.

《그게 어떤 혜정이라고 입에 담지 못할 험구를 날려, 이 쥐리틀놈들. 나서라, 내앞에 얼른 나서라. 범을 쏴잡듯이 갈겨버릴판이다.》

리호검로인은 한달음으로 숙반앞에 이르렀다.

호검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총박죽으로 쾅쾅 때렸다.

그래도 응대가 없었다.

그제사 리호검은 현당에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숙반을 향해 헐떡거리며 달려올라갔다. 숨이 붙어있는 한 혜정이를 지켜야 하겠다고 굳이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백하일의 숙소이자 사무실인 숙반본부에는 창문마다 불빛이 환하였다. 숙반에서는 밤을 모르는 싸움이 벌어지고있었다.

백하일은 리유천을 헌병대의 밀정으로 몰아 없애버리기 위해 출판소의 리한상이를 뭇매로 다스려 그도 밀정이고 리유천이며 허건이까지도 밀정이라는 허위진술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뒤따라 허건이를 그냥 두고 강시중이와 종파싸움을 시키려 하였으나 원정부대가 돌아온 후의 후환을 생각하여 허건이같은 얼떨떨한자들은 깨끗이 제거해버릴 결심을 다져먹었다.

마침 강시중이가 허건이를 없애버릴 결정적인 공세에 합세해나섰다. 강시중은 숙반에 있는 자기네 사람을 시켜 출판소 리한상에게서 글쪽지가 들어있는 신발을 받아간 허건이를 밀정으로 몰아내는 자료를 꾸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리한상에게서 받아낸 허위자료가 백하일의 손에 넘어가고 백하일은 그것을 한층 더 중한 죄로 꾸며 상부에 상소하여 즉시 처형하게 한것이였다.

이무렵에 유격구에서 조직되는 중요한 일들이 백하일을 통해 적들에게 넘어갔다. 리유천이가 소부대를 이끌고 적구에 나가자 백하일은 소부대의 활동로정을 적에게 알려주었으며 적들은 리유천의 소부대를 만단의 준비밑에 맞이하군 하였다. 이리하여 리유천의 소부대가 대황구습격전투에서 두번씩 고전을 겪고 쌍하진으로 옮겨가고있다는 소식이 근거지에 날아왔다.

이 기회를 기다리고있던 백하일은 즉시 쌍하진에 숙반대원을 파견하여 리유천을 불러오게 하였다.

적들은 어떻게 하나 유격대가 유격구밖으로 나가 자기들의 후방을 기습하여 때없이 혼란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있는 수단을 다 썼다. 더구나 유격대가 근거지에서 방어만 하지 않고 근거지밖으로 나가 광범한 지역에서 유격투쟁을 벌려야 한다는것이 장군님께서 내놓으신 투쟁방침이였으므로 이것을 결정적으로 파탄시키지 않고는 자기들이 수세에 몰려 허덕이게 된다고 한결같이 생각하고있었다. 그리하여 백하일은 적구에 나간 리유천의 소부대를 교란하는 작전에 집요하게 매달려있었으며 이제는 소부대책임자인 리유천이까지 잡아들이는 로골적인 책동을 감행해나섰다.

백하일의 《공작》은 여러 방면에서 발광적으로 진행되고있었다. 송혜정이가 무수평으로 떠나간 그날 백하일은 라주경찰서의 위생계 순사이던 가또의 밀정 행상군에게 송혜정의 사진을 주어 적들에게 련락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송혜정이 무수평에 들어간 다음날로 그의 사진이 장마당의 경찰놈들 손에서 나돌고 체포소동이 벌어졌다. 송혜정은 조직원을 통해 경찰에서 입수한 자기의 사진을 뽑아오게 하였는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송혜정은 요영구유격구에서 적과 내통하는놈이 있다는것을 알아차리게 되였다. 그 사진은 식량공작대가 떠나가기전에 현정부마당앞에서 현당서기 허건이며 숙반일군인 백하일의 권고로 공작지에서 돌아온 그 차림으로 찍은것이였다. 그것은 며칠전의 일이다. 이 사진을 간수하고있는 사람이 불과 네댓사람밖에 안된다.

그리고 자기가 무수평으로 떠나온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도 그 네댓명에 국한되여있는것이다.

혜정은 급히 유격구에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적과 내통하는 놈을 잡아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혜정은 불행하게도 돌아오는 도중 적의 추격을 받고 부상을 당하여 가야하 벼랑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생사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수 없게 되였다. 뒤따르던 적들은 송혜정이가 죽었다고 단정해버렸으며 헌병대에서는 백하일에게 송혜정이가 죽었으니 그 녀자가 귀순한것으로 하라는 지시를 보내왔다. 이리하여 요영구부락에 송혜정의 귀순에 대한 말들이 떠돌게 된것이였다.

백하일은 송혜정의 운명에 대해서는 일단락짓고 거기서 파생될 사건으로서 녀성숙소 녀자들을 데려다 문초할 계략을 꾸미고있었다. 날이 밝으면 그 첫 대상인물로 아동국장 박현숙이 끌려올판이였다.

이러느라니 백하일은 언제 자고깨고 할새가 없었다. 그는 요영구유격구의 운명이 자기의 손아귀에 단단히 쥐여져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요영구에서 자기의 계책이 승리하기만 하면 그 실효는 실로 대단할것이라고 믿고있었다.

백하일은 지금 숙반의 장지연을 불러다놓고 날이 밝으면 박현숙이를 불러다 송혜정이와의 관계를 따지라는 지시를 주고있었다. 박현숙은 송혜정이와 다정했고 리유천이와도 가까왔으며 출판소의 리한상이와도 거래가 잦았던 녀자이므로 두말없이 《민생단》이라는 고백을 받아내야 한다고 땅땅 을러멨다.

그때 불쑥 문이 열리고 쌍대배기 렵총을 꼬나든 리호검로인이 들어섰다. 백하일은 렵총의 시꺼먼 두가닥 총신구멍을 보자 잔등에서 식은땀이 쭉 쏟아졌다.

《뭐요?》

백하일은 후닥닥 뛰여일어나 배허벅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따위 조그만 쇠붙이에는 아랑곳않고 쌍대배기를 움켜잡은 로인이 지축지축 다가오고있었다.

《우리 혜정이가 어찌됐다는거요? 어떤 쥐리틀놈의 새끼가 그따위 헛소리를 돌렸소, 말하오. 어서 말하라니까. 내 이 렵총으루 그놈의 대갈통을 쏴갈기겠소.》

백하일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호검로인의 손아귀에 쥐여져있는 렵총은 두가락에 격철이 제껴져있었다. 걸핏 방아쇠를 다치기만 하면 량쪽구멍에서 산탄이 쏟아질판이였다.

《어서 말하오! 어서!》

호검로인은 쌍대배기를 넌떡 쳐들어 꾹 찌르듯이 앞으로 내밀면서 부르짖었다.

《뭘 말하라는거요?》

백하일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우리 혜정이를 걸고드는놈을 내놓으란말이요. 역신같은놈. 우리 혜정이가 어떤 사람인줄 아오. 적구에 나가 내인의 힘으로 힘든 공작을 하느라구 잠도 잊구 말도 잊구 웃음도 잊어버린 사람이요. 게 오죽한 역사였으면 사람이 그지경이 되였겠는가. 눈에 넣어도 쓰리지 않을 자식이요. 내 낳은 자식보다도 더 귀한 사람이란말이요. 어떤 혁명가를 놓구 험담질이요. 어서 내놓소. 그 밸빠진놈을 내놓소. 내놓으라니까.》

호검로인은 오한이 난듯이 온몸을 화들화들 떨었다.

쌍대배기는 로인의 손에서 시간을 따라 더 세차게, 더 경황없이 떨기 시작하였다. 로인이 앙심을 먹지 않고 어느결에 실수를 한대도 산탄이 날아날판이였다.

《저쪽에 돌려대구 떨지 못하겠소?》

백하일은 장지연이 서있는쪽에다 손질을 하면서 설설이처럼 벽에 납작 달라붙었다. 장지연은 《저게 미친놈이 아닌가, 사람이 있는쪽에다 총대를 돌려대고 떨라는건 무슨 심뽄가?》 하는 생각으로 겁먹은 중에도 눈에 피기를 돋우고 백하일을 쏘아보았다.

그때 《땅!》 하고 산탄이 날아나며 총구에서 불이 확 쏟아졌다. 백하일은 벌렁 나자빠지고 장지연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호검로인도 그자리에 쓰러졌다. 백하일을 겨누고 쏜것이 아니라 숨이 막혀 스스로 몸이 기울어지면서 쌍대배기가 발사된것이였다.

산탄은 기름종이를 발라놓은 창문가름대를 쳐갈기면서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그러나 백하일은 자기의 몸에 산탄이 날아와 박힌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의식중에 철알을 맞고 절명하는 순간에 숨이 가빠오는것 같은 그런 숨가쁨을 느끼면서 벽밑에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사람이란 이렇게도 눈깜빡할사이에 죽고마는것인가? 참으로 허망하고 구슬픈 생각이 그의 머리에 날아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벽밑에 쓰러져있어도 숨은 떨어지지 않고 몸은 갈수록 편안해져 백하일은 그것이 어쩐 일인가 하여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출입문옆에는 쌍대배기를 안은 로인이 쓰러져있고 자기가 있는곳과 영 딴 방향의 창문에 산탄을 맞은 구멍이 생겨 종이가 펄럭거리고있었다. 그제사 로인이 스스로 기절해 넘어지면서 오발했다는것을 알아챘다.

백하일은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났다. 그는 출입문을 활 열어젖히고 시꺼먼 어둠속을 향해 고래고래 웨쳐댔다.

《장지연동무, 반혁명과의 투쟁을 이런 식으로 하는가? 당장 이 제정신 없는 늙다리를 들어내가오.》

백하일은 마치 자기가 혼자서 로인의 산탄을 맞받아나가며 장엄하게 혁명을 고수해나간것 같은 기세를 돋우며 미친걸음으로 방안을 씽씽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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