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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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중은 부대의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거창한 작별행사를 준비하였다. 그는 우선 북만지구의 혁명을 위해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여오신
그리고 부대가 앞으로의 활동에서 지침으로 삼을 귀중한 연설을 해달라고
주보중의 이러한 구상을 모든 지휘관들이 찬성하였다.
이날밤 주보중부대의 사람들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작식대에서는 있는 솜씨들을 다 발휘하여 특식준비를 하였다. 부대에서 갖추는 준비만으로도 부족하여 부락농민들까지 동원하여 별식을 차렸다.
병사들은 부락의 넓은 공지에서 밤새 눈을 쳐내고 행사마당을 닦았으며 통나무를 다듬어
녕안촌의 소학교선생들은 연예대에 자진하여 참가하였다. 부락의 조선녀인들은 행사에 입고 갈 치마저고리를 손질하느라 온밤 이집저집으로 들락날락하였다. 깊은 밤중임에도 아랑곳않고 이따금 까르르 터져나오는 녀인들의 웃음소리는 가뜩이나 행사준비로 들썽거리는 부락의 명절기분을 한층 돋구었다.
주보중의 유격부대에서 밤을 밝혀가며 행사준비를 하고있을 때
주보중은 문기척소리를 내고 조심히 지게문을 열었다. 방은 비여있었다.
머나먼 행군을 앞두신
이때 한흥권중대장이 들어왔다.
《주보중동지,
《아니, 어디로 떠나가신단말이요?》
주보중은 미처 말귀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제가 들어오니 벌써 행군준비들을 끝냈더군요. 저로서는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하긴 이렇게 요란한 행사들이 유격대생활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혁명가들에게도 장중한 례식이 있는거요. 그것을 감히 부르죠아의 잔재라고 일소하려는건가. 혁명가들도 악대를 울리고 노래를 부를줄도 알며 분렬행진이나 사열식도 할줄 알고 응당한 법도로서 귀중한 동지를 맞이하고 보낼줄도 안단말이요. 한흥권동무, 동무야 나를 지지해주어야지, 이런 때 내 어디 가서 누구의 지원을 요청한단말이요.》
문득
《지원이야 내가 해드리지요, 주보중동지.》
《우리는 평범하고 인민적인것에 습관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한 례식이 혁명에 부디 유익할것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한 시간을
랑비하면서 공지에 늘어서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올리고 하다니… 습관되지 않은 일에 불시에
《
우리 동무들이
이것이 어느 한 사람의 욕망이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주보중은
《알만합니다. 알만합니다. 그러나 헤여지기 어려운 사람들과는 조용히 헤여지는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로할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
주보중은 벌써 일이 글러지고있다는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그것이 아무리 크고 비싼 상실이라 하여도 성사시킬수 없는 일에 매달려 헛수고만 하는것을 주보중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랬건만 이 순간에는 일이 거의다 찌부러졌다는것을 명백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것을 포기할수가 없었다.
《
떠나시는 이 마당에서 귀중한 연설이라도 한번 해줄수 없단말입니까? 그것이 혁명에 유익한 일이라면 백만명의 군중을 모여놓고도 연설할수 있는것이지요. 엥겔스는 자기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한 계몽합창단의 출연은 막았지만 대회와 집회들에서는 자진해서 연설을 했습니다. 사회민주당 윈나대회에서도, 베를린대회에서도, 제1국제당 제2차대회에서도 연설을 하지 않았습니까? 맑스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늘 병에 시달리면서도 로동자계몽협회에서 조직하는 강의에는 빠짐없이 나갔지요.》
《너무 어마어마하게 사태를 묘사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그사이에 해야 할 말들은 대체로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유격대생활에 정통하지 못한 왕이산동무를 위해 따로 남길 말들을 여기에 썼습니다.》
거기에는 유격대전술, 유격대동작, 지하사업, 군중공작, 적군와해를 비롯하여 통일전선문제, 근거지문제 등 중요한 정치강의가 들어있었다.
주보중은 무어라 표현 못할 감격에 입술만 떨었다.
《여기에는 북만지구의 혁명을 도와주면서 우리가 생각하고있는 몇가지 문제들을 서술해보았습니다. 북만지구의 투쟁경험은 우리가 근거지문제에 대해서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연구할 가치를 제공하고있습니다. 북만땅에서 우리는 몇개의 고정된 유격근거지에 의거하여 혁명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광범한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벌려 넓은 세계에서 혁명지대를 개척하는 방법으로 투쟁을 벌렸습니다.
경험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제는 우리가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에 의거하지 않고도 광범한 지역으로 넘나들며 투쟁을 벌려나갈수 있는 력량이 있고 수완이 있으며 한곳에서 적을 맞받아싸우는것이 오히려 불리하고 불편할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주보중동지가 한때 그렇게도 부러워했던 동만지구의 고정된 유겨근거지들은 장차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고정된 유격근거지는 점차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조그마한 미련이나 협애한 고집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들이 근거지〈토벌〉을 획책하고 유격지구를 완전히 없애려고 광분하는 환경에서 이러한 문제는 가급적으로 시급히 해결을 요하는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유격대와 혁명군중을 보존할수 있고 보다 광범하고 넓은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혁명운동을 앙양시켜나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격근거지에 들어앉아 공격해오는 적들과 대항한다는것이 소극적이고 진공적이 못된다는 견해를 이미전에 제기하고 대담히 적구에 뚫고들어가 광범한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벌림으로써 적의 〈위공〉작전을 파탄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북만땅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유격전법으로 싸워 적을 타승하였으며 혁명지대를 광범히 개척하였습니다. 고난속에서 가꾸어진 경험은 귀중한것입니다. 경험, 이것은 새로운 혁명리론을 빚어내는 토양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넓은 토양우에 서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로 얼룩진 길을 걸으며 한치한치 개척한 혁명의 토양이며 래일에는 곧 보습을 박아 갈아번지고 알찬 종자를 박아 새로운 보다 풍요한 수확을 거두어들여야 할 기름진 우리 땅입니다.
주보중동지, 북만지구에서의 우리 투쟁은 우리 혁명의 전반적인 앙양을 위해서도 귀중한 의의를 가집니다. 헤여지는 이 마당에서 신심을 가지고 이 말을 할수 있게 된것을 나는 긍지로, 자랑으로,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주보중은 말하고나자 새로이 가슴이 쓸쓸해졌다. 이것으로 결국 작별의 인사가 나누어지는 셈이다.
《
주보중은 다시금 목메이는 목소리로 측은하게 말하였다.
《어찌겠습니까. 정해진 걸음이야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시적인 리별은 오히려 유익할는지도 모릅니다. 상시적인 접촉은 사물과 사물간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단조로움을 느끼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도하자에서 멀리 바라보는 로야령이야 얼마나 높고 장엄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로야령 등판을 밟고 지나면서 행군도 하고 숙영도 하고 모닥불도 피우고 할 때는 누구도 그 로야령이 그렇게 높고 장엄하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물과 사물간의 거리란 이런것입니다.
사람의 감정도 이럴수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그리움의 절정은 상봉에 있는것이 아니라 리별에 있는것이며 떨어져있는 그 공간속에 존재하는것입니다.》
《원, 그렇게도 리별을 합리화하시다니…》
주보중은 한모양으로 섭섭해하면서 어떻게 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탱해나갈지 막막해하였다.
《우리는 동만과 북만이 그것으로 갈라진 높은 로야령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있게 됩니다. 이 공간은 아마 수천리를 헤아리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갈라놓은 이 공간은 시간과 더불어 오히려 우리의 우정에 뜨겁게 복무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 공간과 시간속에 녹아흐르는 나의 사랑에는 나의 정신적인 모든 힘과 나의 감정의 모든 힘이 집중될것입니다.》
《
주보중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진실로
그는 황황히 목도리를 풀어
《받아주십시오. 주보중의 몸은 떨어지지만 주보중의 온기는 한점 묻어간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온전했더라면 북만이 끝나는 그 경계점에라도 모시고 갈터인데…》
《주보중동지의 뜻이 그러하니 사양을 못하고 받겠습니다. 그대신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주보중동지는 건강에 류의하여야 합니다. 혁명가에게는 두가지 귀중한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상이고 하나는 건강입니다. 나는 혁명가에게 적어도 역마와 같은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불행은 혁명가들의 신체가 허약한것입니다. 하긴 혁명가란 자기의 육체를 연소시켜 혁명의 기관차를 몰아가는 사람들이니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되도록 그 비싼 연료를 함부로 연소시킬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혁명전우의 부탁이라고 언제나 생각해주시오.》
주보중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