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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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진은 준비된 마음으로 성숙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여전히 종무소식이다. 두번씩이나 문을 열어본 녀대원이 성숙이에게 귀띔해주지 않았을리 만무한데 그 사람에게서는 뻐꾹소리 한마디 없다.

(성숙이가 이렇게도 앵돌아져버렸나. 아니면 무엇을 구하러 연길중대나 훈춘중대에 가있는게 아닐가? 사람두 별나게는 돼먹었지. 남다 안하는 일까지 늘 맡아가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이라니까. 아예 나타나기만 하면 큰소리 한번 쳐주고말아야지.)

차일진은 여간만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았다. 방금전에 어떤 난처한 일이 생긴것 같은 인상을 짓고 성숙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하겠다는 생각은 씨도 없이 날아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일진은 점차 흥분하며 안달아하였다. 이제라도 한흥권중대장이 자기를 불러 무슨 일을 시킨다든지 어떤 선전문같은것을 등사로 밀어야 할 과업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성숙이와는 아주 만나지 못하고마는것이다.

(이 사람이 세상형편을 알기나 하고 속편히 이러는거야. 내 별난것을 다 만나가지고 마음고생을 하는군…)

그순간 차일진은 안에서 한 녀대원이 성숙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차일진은 얼핏 부엌문앞으로 다가가 귀를 강구었다.

《성숙동무, 암만해도 내 손으론 팥고물을 내지 못하겠어요. 이건 아무래도 성숙동무 힘을 빌어야 할가봐.》

《그래요? 팥고물이란 뭐 별난게 아니예요. 이제 팥이 속까지 푹 삶긴 다음에 삼사십분가량 뜸을 들였다가 소금을 넣어 찧어서 차게 식히면 되는거예요.》

《말처럼 되여주면야 얼마나 좋게요. 난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니까.》

《그럼 고구마경단을 빚어볼래요?》

《아이구, 그건 또 어떻게 하나. 난 그전에 우리 어머니가 날보고 너는 남자가 될게 녀자로 나왔다고 나무라던 생각이 자주 나요. 난 치마둘렀으니 녀자지 쪼꼬말 때부터 사내애 비슷했는가봐. 지금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도끼로 쩡쩡 장작을 패는게 낫지 이렇게 부엌봉당에 내려서서 음식가지 만지는 일은 질색이라니.》

일시에 녀자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하고 터져나왔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웠던지 차일진이도 껄껄 웃었다. 웃고나서는 금시 시무룩해졌다. 부억봉당에 성숙이가 있는게 틀림이 없다. 그리고 자기들이 그렇게 주고받는 이야기를 밖에 와선 사람이 들으리라는 생각도 하고있을것이다. 그런데도 자기를 향해서는 숨소리 한줄기 없는것이다.

차일진은 아무래도 자기편에서 대범히 문을 열고 들어가 성숙이를 불러내는것이 옳으리라 생각하였다.

차일진은 몇번 기침소리를 내고 발을 툭툭 구르고나서 부엌문을 펄쩍 열었다. 뜬김이 자욱하여 부엌안의 사람들을 어릿어릿한 그림자로밖에는 알아볼수 없었다.

차일진은 어방짐작으로 발을 내짚었다. 그때 무엇인가 발끝에 걸채여 쟁가당 하고 나딩굴었다.

《아이구, 이걸 어찌나. 국수꾸미를 엎질렀어요.》

한 녀자가 바스라지는 소리를 쳤다.

차일진은 깜짝 놀라 뒤걸음쳤다. 이번에는 뒤에서 가루함지를 밟아댄다고 야단을 때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차일진은 마치 흔들레판에 빠진 사람모양으로 오도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기만 하였다.

《그게 차일진동무가 아닌가?》

가마목 저쪽에서 웅근 목소리가 날아왔다.

《예, 제가 차일진입니다.》

차일진은 당황중에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구원을 청하듯이 맞받아소리쳤다.

《녀자들 성화에 놀라지 말고 이리 올라오오. 공연히 그래보는 놀음이라니…》

녀자들은 또한번 짝짜그르 소리를 내여 웃었지만 차일진은 등골로 땀이 솟았다. 그는 다름아닌 한흥권중대장이였던것이다. 진옥이일로 늘 가슴한구석이 허전해있는 중대장앞에서 성숙이를 만나겠다고 나타났은즉 이런 면구함이 어디 있는가?

차일진은 쥐구멍에라도 찾아들고싶었다.

《차일진동무, 그만 올라오라니까. 올라와서 여기 국수분틀에 좀 매달리오. 녀자들은 솜뭉치처럼 부풀기만 했지 근량은 아예 없는가 보오. 이놈의 분틀채가 공중에 떡 멎어가지고 그냥 내려가지 않는단말이요.》

차일진은 어쩔바를 모르고 헤덤벼치며 대답하였다.

《중대장동지, 저는 그만 돌아가렵니다.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 왔댔습니다.》

《무슨 일인데.》

《등사일에 녀동무들 손을 좀 빌리지 못할가 해서요.》

《동무두 눈치가 없지. 이런 날에 녀자들손이 날게 뭐요. 그렇게 아닌보살 말구 진속을 헤쳐놓으라구. 이런 때 보면 차일진동무가 좀 의뭉스러운데도 있거든. 오성숙동무, 그만 일손을 놓고 차일진동무를 따라가보오.》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참말 이런게 아니라니까요.》

차일진은 헐레벌떡거리며 부엌에서 달려나왔다. 그리고 한달음에 뜰안을 지나 저쪽 행길모퉁으로 씽씽 내달아갔다.

뒤에서 누군가 총총히 다그쳐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 봐요. 사람을 불러놓고 그렇게 달아빼는 어른이 어디 있어요. 아이참 우습네.》

《아하, 이거 야단났군.》

차일진은 랑패한 생각을 금치 못했다. 한흥권의 앞에서 끝내 자기가 일을 저지르고만것이다. 이 순간 한흥권의 가슴속을 가시처럼 쿡쿡 찌르고들 그 처절한 아픔을 생각할 때 차일진은 세상없이 혹독한 일을 저지르고 온 사람같이 괴롭고 쓸쓸해졌다.

《왜 눈치없이 따라오면서 이모양이요?》

차일진은 얼핏 몸을 돌리자바람으로 소리쳤다.

《어마나.》

성숙은 흠칫 놀라 뒤걸음쳤다.

《그런데 눈은 왜 그렇게 무섭게 부라리며 그래요?》

《동무같이 답답한 사람은 세상에 보다 처음이요.》

《답답하긴 누가 답답해요. 공연히 사람을 불러내가지구 소리치는 이가 답답하지 내가 답답해요.》

《불러내긴 누가 불러냈다는거요?》

《그럼 왜 왔댔어요. 정말 등사일때문에 도움받으러 왔단말예요?》

《그렇소.》

《아이참, 그게 정말이예요. 똑똑히 속이지 말고 말해요.》

성숙은 억울한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속이긴 누가 속인단말이요. 똑똑히 등사일때문에 왔다고 하지 않소.》

《그럼 헤여지는 이 마당에서 그렇게두 조용히 할말이 없단말예요?》

《할말은 무슨 할말… 정 할말이 있으면 후에 동만땅에 나가서 하면 되는거지.》

《어쩌면, 어쩌면 그런 말을 속편히 할수가 있어요. 난 억울해요. 난 정말이지 가슴아파 못견디겠어요. 내가 도대체 무얼 잘못했다구 그렇게두 고집스레 밀어버리는거예요.》

오성숙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어깨를 떨며 흐느끼더니 홱 몸을 돌리고 오던 길로 막 달려내려갔다.

《하-》

차일진은 말없이 입속으로 더운 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선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두발로 땅을 밟고 서있을 기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본의아니게 성숙의 가슴을 그렇듯 아프게 칼질해놓은 자신이 야속하기 이를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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