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2 장
불타는 성
3
(3)
《너 이제 가서 선봉장을 만나보아라. 아니, 이리로 데리고 함께 오너라.》
《네? 그건 왜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가 달아나겠단다, 너를 버리구. 아니, 너뿐아니라 나두 성두 다버리고 혼자 내빼겠단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가기는 왜? 어디로 간다는거예요?》
《글쎄 말이다. 네가 가서 그를 만나보구 절대 가지 못하게 하여라.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령이다. 아니, 의병대가 주는 령이야.》
미영의 눈이 대번에 동그래지고 눈섭발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놀랍다거나 분하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격분과 증오에 찬 눈길이였다.
린석은 속으로 웃었다. 이제 그의 진실을 느꼈기때문이였다. 《작별이란 말만 들어도 가락지를 집어던지고 손수건을 찢어버리며 등잔을 등지고 바람벽을 마주앉아 눈물을 쥐여짜는것이 진실로 녀자다운것이다.》라고 씌여진 어느 책의 한구절이 떠올랐다. 지금 미영이 그렇게 하고있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애정을 품은 녀자의 마음이 아닌가.
《내 말대로 할수 있겠니?》
그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였다. 미영이 어느새 뜰아래로 달려내려갔던것이다.
그러나 그때 백산은 부대에 없었다. 상렬을 만나러 그의 부대에 가있었다. 거기로 미영이 불시에 들어서자 두사람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정말 가겠어요? 성도 사람도 다 버리고…》
《그 말은 어디서 들었소? 갑자기 왜 그러오?》
《갑자기라구요? 흥, 갑자기가 아니문요. 언제 저하고 의논이나 해봤어요? 여길 버리고 간다는 코김이라도 쐬였댔나 말예요.》
그제서야 짐작이 간 백산이 미소를 띄웠다.
《미영,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요. 더구나 미영아가씨하구는 상관도 없는 일이요.》
《상관이 없다구요? 그럼 가라요, 가. 괜히 이 가슴에 불을 질러놓고는… 가라요, 혼자서 가!》
불시에 백산의 가슴을 두손으로 두드리다가 그대로 콱 밀쳤다. 그래도 끄떡없이 서있는것을 보고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언제는 날더러 싸움에 나서라고 선동질을 해놓구선. 마치 같이 싸우기나 할것처럼… 갈테면 가라요. 그러나 그렇게는 못 가요. 나같은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대장님과 다진 맹세는 어쩔터예요. 변치 말고 싸우자고 맹세를 쳤죠. 남정들끼리 다진 맹세야 지켜야지요.…》
그가 울다말고 홱 돌아서 따지듯 백산을 쏘아보았다. 백산이 그만 당황하여 할말을 찾지 못하고있는데 촉촉히 물기에 젖은 두눈을 아래로 떨구고 잘근잘근 입술만 깨물던 미영이 저로서도 막연한 말을 건숭 내뱉고는 미처 어쩔새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창의대장님을 만나보세요.…》
두사람이 마주보다가 허거프게 웃었다.
《아무래도 안되겠구만. 자네는 떨어져야겠네.》
《녀자때문에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지. 창의대장님의 당부가 있었다지 않나. 가서 그를 만나보게.…》
이렇게 하여 백산이 린석을 찾아가게 되였다.
바로 린석이 바라던바대로였다. 그가 없이야 성을 어떻게 지켜낼것인가.
그는 백산에게 성을 지키는 싸움에서 더 큰 공을 세울데 대해서와 그렇게 되면 자기가 나라에 보고를 하여 꼭 이름난 장관으로 등용케 하겠다는, 전번에 선화당에서와 같은 말을 곱씹었다.
그것은 린석이 백산에게 베풀수 있는 최대의 믿음이였고 선의였다.
그럼에도 백산에게는 그 말이 남의 꿈속에나 말려든것처럼 멀리에서 희미하게 안겨들었다. 그것을 믿기에는 지나온 그의 생활이 너무도 가혹하고 랭철하게 현실을 가려보게 하기때문이였다. 물론 미영이 자기를 따르고 자기도 미영에게 끌리는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욕망이 그대로 실현되는것은 아니다. 수백수천년을 두고 형성된 반상의 차이가 그들이 바란다고 하여 일조일석에 실현될수 없고 되였다고 하여도 세상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것이다.
백산은 그것을 벌써부터 내다보면서도 린석의 말을 전면에서 부정하지 않았고 또 그가 요구한 성에 남는 일도 그대로 동의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여 남한산성으로는 서상렬만이 떠나게 되였다. 그가 이끄는 유격부대가 서문밖까지 꼬리를 길게 남기며 산모퉁이로 사라졌다.
린석을 위시한 의병장들과 의병들이 서문의 망경루에 올라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그 모습이 사라지자 몸의 한쪽부분이 떨어져나간것처럼 허전하고 헛헛해지는 감정을 금할수 없었다. 돌이키면 상렬은 왜놈과의 싸움이라는 가장 어려운 때에 만났고 또 이제 벌어지게 될 어려운 싸움을 앞에 두고 헤여졌다. 아직은 누가 옳고그른지 알수 없는 길을 저마끔 가고있는것이다. 앞으로 언제 또 어떻게 만나게 되겠는지 그것이 린석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것이다.
그러나 그쯤한 작별은 아직 약과였다. 다음날은 다른 의병장들과도 헤여져야 하는것이다.
이제 그들은 저마다 고을을 차지하고 싸움을 벌리며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험난한 로정으로 될지, 언제 죽음이 차례지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언제 싸움이란 해본적이나 있었던가. 누가 그들에게 오라고나 한적이 있으며 쌀 한줌, 화살 한첩이라도 안겨주며 잘 싸우라고 축복해준 사람이나 있었던가.
그래서 더더욱 헤여지기 어렵고 아프게도 가슴을 허비는것이다. 성문밖에 운집한 수천명 의병들도 저마다 손잡고 읍을 하며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해한다. 린석이 마지막으로 자기를 둘러싼 의병장들에게 술을 한잔씩 따라주고 시 한수를 읊었다.
비멎은 방축에 풀빛도 짙은데
그대를 남쪽포구에서 떠나보내며
슬픈 노래 부른다
저 강물은 언제면 다 마를가
해마다 리별의 눈물 강물우에 덧치거늘
저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의 시이다. 석별의 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지 몰라 그렇듯 이름난 시 한수로 대신한것이다.
어느 누가 그 심정을 모를것인가. 자기들을 다 떠나보내면서도 아무것도 줄것이 없는 린석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것이랴. 하여 시 한수로 대신할적에 그 구절구절에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담았으랴.
그것을 안 리린영이네들은 그대로 말우에 뛰여올랐다. 그리고 솟구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채 저마다 말을 때려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