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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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이 왔다.
격전을 앞둔 준엄한 시각이 흘러가는 밤과 함께 한치한치 앞으로 다가오고있었다. 밤이 가고 날이 새면 이 북만땅의 최정예라고 자랑하던 북호두의 수비대놈들이 들이닥칠것이고… 그러면 불꽃튀는 백병전이 벌어질것이다.
동만의 유격근거지들에 뻔질나게 기여나와 악착스런 만행을 감행하던 철천지 한이 맺힌 원쑤들…
그러나 이놈들과의 싸움이 결코 간단치는 않을것이다.
행군대오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그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할것없이
적은 시오리밖에서 바투 따라오고있었다. 이따금 유격대의 후위와 적의 선견대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군하였다.
그러나 행군대오는 여전한 속도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밤길을 톺아나갔다. 뒤따르는 적을 떨구기 위해 행군속도를 높이라는 명령도 없었고 유인조나 습격조를 파견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시도도 없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조용히 깊어가는 이밤은 사람들에게 더할나위없는 초조감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행군하는 대오에 휴식명령이 떨어졌다. 뒤이어 모든 대원들이 각기 두개의 불무지들을 피우고 그사이에서 몸들을 녹이며 충분히 휴식을
하라는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였다. 앞뒤에서 금시 적이 달려들판인데 휴식을 하다니?… 어디서 명령이 잘못 전달되지 않았나 하여 서로 옆사람에게 묻고 지휘관들에게 달려가 알아보는 등으로 한동안 대오는 부산하였다.
지휘관들이 뛰여다니며 다시금
분명 정황이 달라진 모양이라고 모두들 생각하였다. 대원들은 나무숲속을 뛰여다니며 손더듬으로 작정이를 따고 강대를 찍고 눈속에 파묻힌 진대나무며 드덜기들을 파내여 순식간에 수백개의 불무지들을 피워올렸다. 어떤 대원들은 하루밤 쉬여갈 잡도리로 불무지옆에 솔가지로 잠자리까지 만들었다. 벌써 어디선지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전염병처럼 사람들의 머리속에 잠을 실어왔다.
지휘관들이 불무지사이로 소리없이 돌아가며 눈들을 좀 붙이라고 조용조용 이르고있었다. 어느 한 불무지옆에서
《왜 잠들지 못하고 그러오?》
옆사람들이 잠을 깰세라 저어하시며 낮은 소리로 다정하게 물으시는
《그저 잠들수 없습니다. 머리속이 자꾸 새록새록해지는게.》
《혹시 몸이 불편한것이 아니요?》
《아닙니다.》
《그럼 잠자는사이에 적이 달려들가봐 걱정되는게로군.》
상대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였다.
《마음을 폭 놓고 잠을 청하오. 별일이 없을거요. 나도 그만 눈을 좀 붙일 생각이요.》
《
그다음 솔가지를 깔아뭉개는 부시럭소리가 일어나고 저편으로 걸어가시는
넓은 등판은 점차 조용해지고 사위엔 정적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바람소리, 모닥불 타는 소리, 바람에 불길이 빨려나가는 후륵후륵 소리가 단조롭게 일어났다. 사람들은 며칠동안 줄곧 이어온 피로를 한몸에 뒤집어쓰고 깊은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대원들은 주위가 갑자기 수선거리고 부산해지는바람에 여기저기서 눈을 떴다. 지휘관들이 뛰여다니며 대원들의 어깨를 흔들어깨우고있었다.
일체 불무지들을 끄지 말고 재빨리 행군대형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렸다.
부대는 소리없이 등성이아래로 내려가 눈속에 간신히 트인 발구길을 따라 행군을 시작하였다.
《좀더 빨리》
《좀더 빨리》
《대렬을 좁히고 소리를 내지 말것.》
이러한 구령소리가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간단없이 일어났다.
방금전까지 깊은잠에 빠져있었던 대원들은 찬바람속에서 정신을 차리자 날듯이 몸이 가벼워져 여느때의 배나 되는 속도로 내달렸다. 바람은 이상하게 잠풍해졌다. 행군대오는 앞에서 끝없이 다가와 뒤로 물러가는 어둠의 장막속으로 그냥 한정없이 빠져들어갔다.
대원들은 이 행군대오가 어디로 가는지 알수가 없었다. 경박호기슭으로 진출하고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몇명 안되였다. 적정이 달라지고 적아간에 일련의 변화가 있었으므로 방금전의 그 느러진 휴식조차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부대의 움직임을 더구나 예상할수 없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부대는 밤새 치달아오르던 밋밋한 구릉지대를 지나 잔솔들과 양초며 새초같은 긴 풀대들이 눈우에 촘촘히 솟아있는 경사면을 내려가고있었다. 문득 골바람을 타고 찬기운이 풍겨오기 시작하였다.
여기가 어딘가?…
사람들은 갑자기 날아든 습기와 함께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감촉되는 대기의 변화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은 잔솔들이 어우러진 숲속을 뚫고 눈빛보다는 조금 검고 나무숲보다는 아주 연한 번뜩거리는 넓은 광야같은 그 무엇을 내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앞에서부터 일제히 떠들썩하는 소요가 일어나 꿈틀거리며 설레는 긴 대오를 따라 점차 뒤로 옮겨졌다.
《경박호다!》
대오의 맨 마지막사람이 저마끔 떠들썩하며 부르짖는 그 목소리들속에서 분명히 그 의미를 알아들었을 때는 이미 사람들의 반수이상이 기슭의 밋밋한 공지로 뛰여내려가있었다.
경박호다! 부대의 행군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적정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것을 대원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이 경박호기슭에서 북호두의 수비대를 족치는 백열전이 곧 벌어지리라는것도 똑똑히 의식하였다.
그렇다면 뒤따르는 적들은 어디서 어떻게 저지시켜야 하는가?… 이 하나의 의문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멀리서 보면 호반의 기슭은 경사가 완만한 관목숲으로 뉘엿이 뒤덮인것 같았으나 가까이에서 보면 급한 단애를 이룬 절벽지대로 둘러막혀있었다. 다만 한곳에, 원정부대가 금시 와닿은 기슭으로부터 조금 웃쪽에 눈덮인 희벗한 공지가 드러나있었다.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 주보중의 혼자힘으로는 기슭의 들쑹날쑹한 돌서덜을 건너짚을수가 없었으며 칡넝쿨과 다래줄기며 바늘가시가 빳빳하게 일어선 아가위나무들이 얼기설기 가지들을 헝클어뜨리고있는 눈덮인 관목숲을 쉽사리 헤칠수가 없었다.
주보중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헐썩헐썩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주보중은 털모자를 벗어 전령병에게 내맡기고 지팽이만을 가볍게 내짚고있었다. 그리고 몸의 중심을 잡을양으로 두다리는 조금 넓게 벌려디디고있었다. 그의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가까이에서 듣고있던 참모장이 슬며시 귀속말로 마차에 편히 누워있는게 어떤가고 한마디 비치였다.
주보중은 휙 고개를 돌리고 참모장을 엄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병자같아보이오!》
참모장은 면구한 얼굴로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참모장동무, 그런 권고를 하는게 아니라오. 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달려나온 주보중동지가 편히 마차에 누워있자고 하시겠소. 이런 때는 부상자취급을 하는것부터가 실례요. 나는 그래서 이따금 손을 내밀어 부축해드리고싶은것도 모른척하고 참아왔소.》
주보중의 얼굴에는 금시 화색이 떠돌았다.
《
수천명의 적을 뒤에 달고 간고한 행군을 하시면서도 앞에 나타나는 적을 피해갈 대신 맞받아 들이치고나가는 신묘한 전술적 묘리들을 우리 지휘관들이 제때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일생의 귀중한 순간을 놓치고말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주보중의 얼굴은 심각하고 엄하고 무뚝뚝해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