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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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옥은 깊은밤중에야 의식을 차리고 눈을 떴다. 현경이가 어깨를 떨며 흐느끼고있었다. 그러나 진옥은 어찌하여 현경이가 그렇듯 슬피슬피 울음소리를 죽여가며 울고있는지 쉽사리는 그 원인을 알수 없었다. 그토록 진옥이는 지쳤고 머리속은 어지러웠으며 기억은 삭막해져 방금 있었던 일과 그앞서 있었던 일을 구분할수가 없었다.

《언니, 난 어쩌면 좋아요. 밤을 자고나면 상해로 떠나게 될거예요. 일찍 조반을 지어먹고 서둘러 길을 떠나라는 아버지의 분부가 있었어요.》

진옥이의 손을 끌어잡아 가슴에 부둥켜안고 안타깝게 모대기는 현경이를 보고서야 진옥은 몇시간전에 있었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고 자기가 백송로를 끝내 설복시키지 못하고 지쳐 쓰러졌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진옥은 이불속에서 팔을 뽑아 현경이의 어깨를 껴안았다.

《현경이가 떠나면, 현경이가 떠나면 나는…》

진옥은 몇번이나 입을 열어 자기 심중속의 간절한 이야기를 하려 하였으나 눈물에 목이 잠겨 말을 톺을수 없었다.

현경이를 상해로 떠나보내고 백송로의 손에서 병구완이나 받아가지고 요영구땅으로 홀로 나가 장군님앞에 나설것을 생각하면 진옥은 금시 눈앞이 캄캄해지고 조용히 숨을 톺아 방안의 공기를 들여마시는것마저 죄스러운 일같이 생각되였다.

진옥은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고독한 환경에서 자기의 처지를 돌이켜본 때는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면에서 어리고 준비가 부족하며 다른 녀자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고 현경이와도 아무 구별이 없는 수수한 보통녀자로밖에 아무것도 다른것이 없는 자기에 대해 세세히 굽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장군님을 모시고 원정부대와 함께 행군도 하고 전투도 하고 군중정치공작도 하면서 활기있게 유격대의 생활에 젖어있을 때는 말할것도 없고 부상당한 몸으로 백송로의 풍마차에 실려와 깊은 골방속에서 병구완을 받고있을 때에도 이렇게는 자신을 나약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때는 그래도 부상당한 몸으로나마 백송로와 현경이를 향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았고 반드시 해야 할 의무도 느꼈으며 그리고 거의 날마다 병마와 싸우고 아픔에 신음하면서 현경이를 한발자국한발자국 자기의 세계로, 혁명가들의 세계로, 장군님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성스러운 로동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있는가?

아무 할 일도 없고 아무 자각도 느낄수 없는 혼몽하고 주접이 든 구슬픈 공기가 자기를 빽빽이 에워싸고있을뿐이다. 비록 지금 환경에서 아무리 할 일을 찾고 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하더라도 이미 자기는 전장에서 총알을 맞고 중태에 빠진 부상자와 같이 백송로와의 론쟁에서 이미 상처를 입고 누워버린 인간이며 다시 의지를 가다듬고 일어나 다시한번 그를 향해 육박하기는 때도 늦고 혁명가로서의 자기 갖춤새도 부족하다고 거듭거듭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진옥은 진옥이대로 현경은 현경이대로 자기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의 세례를 들쓰고 눅잦힐수 없는 석별의 정에 목메여 어깨를 들먹였다.

아침은 서서히 밝아왔다.

현경의 고모는 백송로의 분부대로 어뜩새벽에 일어나 조반을 짓고 현경은 장밤 울고나 눈지방이 퉁퉁 부은 얼굴로 려장을 꾸렸다.

이리하여 해뜰 림시에는 벌써 풍마차에 현경의 짐짝들이 실리고 처녀를 역에까지 실어갈 마부가 들어와 마차의 굴대며 바퀴살을 건드려보면서 눈보라가 일기 시작하는 행길쪽에 대고 중얼중얼 욕설을 퍼부었다.

백송로의 기분도 이 아침은 맑을수가 없었다. 사나운 날씨에 부랴부랴 딸을 떠나보내지 않을수 없는 자기의 딱한 처지도 불안스러웠고 현경이를 떠나보내고나서 진옥이와 호젓이 상종할 일도 자못 걱정스러웠다.

백송로는 딸을 역에까지 바래주려고 털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구두에 덧신까지 신고 밖으로 나섰다.

진옥이와 작별하려고 골방에 들어간 현경이는 점도록 나와주지 않았다. 마부와 이전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초조히 딸을 기다리고있던 백송로는 그만 골살을 찌프리고 현경이 고모더러 독촉을 하였다.

그때 지게문이 열리면서 진옥이가 현경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백송로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진옥이 앞으로 이끌리듯 달려갔다.

《어찌된 일이시오, 예? 어쩌자고 이러오?》

백송로는 경황없이 입술을 떨었다.

아버님, 먼길 떠나는 현경이를 누워서 바랠수가 없어 일어났습니다.》

《그럼 역에까지 따라가겠단말이요?》

《예, 아버님께서 막으시지 않는다면 역에까지 나가볼가 합니다.》

백송로는 어떻게 처신했으면 좋을지 몰라 진옥의 얼굴만 황망히 더듬었다.

이 녀자가 현경이 떠나는 마당에까지 따라나와 자기 주장을 먹이려고 애쓰지 않을가? …

백송로는 실로 걱정스러워 다시 또다시 진옥이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진옥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현경이 부축해주는대로 몸을 가볍게 기대고 서서 행길에 내다 세운 풍마차를 지켜보고있었다. 진옥의 눈은 별로 순하고 조용해보였다. 로인은 다소 안심하고 진옥이와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로인에게는 다른 방도가 있을수 없었다. 저렇게 문밖차림을 하고 나선 사람이 자기가 막는다고 순순히 주저앉을리 만무한 일이고 또 그러느라면 그것으로 생겨나는 감정마찰과 마음고생이 이만저만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백송로는 현경이더러 어서 진옥이와 함께 풍마차에 오르라고 하였다. 풍마차의 뒤좌석에는 진옥이와 현경이가 나란히 앉고 백송로는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마부의 채찍소리가 울리자 풍마차는 언땅에 바퀴를 퉁 구르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맞받아 풍이 펄럭거렸다.

마차가 떠나기전에 풍마차안에 숯불이 이글거리는 질화로를 들여다놓고 안을 달구기는 하였으나 그 온기라는것은 잠간사이에 날아나버리고 이마가 선뜩거리기 시작하였다.

백송로는 곰가죽털모자를 눈섭언저리까지 깊이 내려쓰고 외투깃을 세우고 두툼한 여우털 토시에 손을 끼였다.

현경이는 무릎모포로 종다리를 감싸고 털수건으로 머리와 어깨를 가리웠다. 진옥이만이 털모자의 귀덮개를 내리우지 않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솜저고리앞섶에 반쯤 들이민채 머리를 의자등받이에 조용히 기대고있었다.

《언니, 춥지 않아요. 어째 털모자의 귀덮개도 내리우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구 그래요?》

현경이는 의자우에 포개여있는 솜장갑을 들고 진옥의 손을 끌어당겼다.

《일없어요. 난 추운줄 모르겠어요.》

진옥이는 그러지 말라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옥은 흔들리는 풍마차의 뿌연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있었다. 길가에 가지들을 얼쿠러뜨리고 서있는 이깔나무들이 천천히 흘러지나갔다. 잎이 떨어져 설피여진 숲사이들로 풀더민지 나무가린지 알수 없는 거뭇거뭇한 작은 귀틀막형체들이 바라보였다. 안개같기도 하고 연기같기도 한 뿌연 회색빛 장막이 귀틀막지붕우를 뒤덮고있었다.

숲속의 작은 부락에서는 이제야 한창 아침밥을 짓고있었다. 우리속에서 눈을 뜬 양들이 통나무발판들을 굴러치면서 울어대는 소리가 간단없이 들리고 아이들의 새된 부름소리며 장작을 패는 도끼질소리가 장단 맞추어 일어났다.

풍마차는 갑자기 궁글은 소리를 내면서 길지 않는 통나무다리를 구르며 지나갔다.

앞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던 백송로는 무릎에다 이마를 한번 짓쫗고 불현듯 뛰여일어나면서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이보라구 마부, 마차를 살랑살랑 몰게나.》

《예 예.》

마부가 황망히 응대하는 소리가 나더니 풍마차의 진동은 한결 적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일이였다. 다시 풍마차는 이리저리 기우뚱거리고 뜀박질을 하면서 사람들을 들추어대기 시작하였다.

백송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는 뒤좌석에 앉아있는 녀자들을 바라보았다. 현경이는 한손으로 짐짝들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우에서 흘러떨어지는 털수건을 움켜쥔채 이마를 찌프리고있었으며 진옥은 마차가 크게 뜀박질을 할 때마다 알릴듯말듯 신음소리를 지르며 입술을 깨물고있었다.

《마부, 마차를 좀 가만가만 몰라니. 이렇게 험하게 모는 법이 어디 있소?》

백송로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마부를 나무랐다.

《길이 험한데야 별수 있나요. 삯전받고 일하는 마부가 공연히 주인을 불편스레 하겠소. 괜한 노여움이웨다!》

마부도 길을 가기가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였다. 이제라도 돌아서라면 얼싸좋다 하고 마차를 잡아돌릴판이였다.

백송로는 이마를 찌프리고 반쯤 눈을 내리감은채 기척없이 앉아있는 진옥이를 살펴보았다.

《그 몸으로 역에까지 가닿을상싶소? 방금 지나온 귀틀막부락에 내렸다가 돌아오던길에 함께 가는게 어떻소?》

진옥은 얼핏 눈을 치켜떴으나 백송로가 한 말을 똑똑히는 알아듣지 못한것 같았다.

《저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진옥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였다.

《그렇소. 방금 지나쳐온 저쪽 귀틀막부락에 내렸다가 돌아오던길에 함께 가는게 어떻겠는지 해서 물었소.》

《일없습니다. 저때문에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히 그러지 마시오. 이놈의 마차가 하는 모양을 보니 성한 사람도 파죽을 만들어놓을판인데 부상자의 몸이야 어떻게 되겠소. 괜히 상처가 도져 고생을 겪지 말구 부락에 내려 몇시간 기다리시오.》

아버님, 제발 부탁입니다. 저때문에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도지긴 뭐 도지겠습니까. 여기까지 왔다가 떨어지면 가는 사람 마음도 바래우는 사람 마음도 다 섭섭하지 않습니까?》

진옥은 다시금 눈을 내리깔았다. 간단없이 들추어대는 마차안에서 상처의 아픔을 누르고 흔연히 고개를 들어 긴 이야기를 한다는것이 그로서는 진정 못할노릇이였다.

백송로는 입을 다물었다. 마차안은 갈수록 얼어들었다. 덧신을 신은 구두바닥이 선뜩선뜩하였다. 그랬건만 진옥이는 아직도 모자의 귀덮개를 내리지 않았으며 손에 장갑을 끼지 않고있었다.

현경이가 가만히 진옥이옆으로 다가앉아 어깨를 흔들었다.

《언니, 장갑이라도 좀 끼여요. 이 털모자 귀덮개도 내려놓구요.》

진옥이는 말없이 현경이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있었다.

《왜 그래요. 언니, 낯선 사람을 보듯이 어째 찬찬히 보기만 해요.》

그래도 진옥이는 말이 없었다. 현경이를 지켜보는 진옥의 얼굴에는 알수 없는 구슬픔이 어려있었다.

《이제 헤여지면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요?》

《어렵긴요. 서로 주소만 알면 편지라도 할수 있고 어떻게 만날수도 있는거예요. 나는 상해에서 자리를 잡는 차제로 고모네 집주소로 언니에게 편지를 할테예요. 언니도 답장을 쓰세요. 그렇게 련계를 가지노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도 될거예요.》

《그럴가요?》

《그렇지 않구요.》

진옥은 다시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경이가 진옥의 손에 장갑을 끼워주고 모자의 귀덮개도 내려놓아주었다. 진옥은 현경이 하는대로 몸을 맡긴채 꼼짝 않고 앉아 차창으로 비껴흐르는 바깥풍경을 내다보고있었다. 얼기설기 얼크러진 숲의 거뭇거뭇한 륜곽이 처녀의 맑게 뜬 눈망울에 어리여 서서히 움직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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