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2 장
불타는 성
1
(3)
그때 김백산선봉장이 나섰다.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어떻게 되여 관찰사의 봉서가 김복한대장님한테 오게 되였는가 하는것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겠는데요?》
화제가 다시 홍정식에게 돌아갔다. 이제는 자기에게 문제가 없으리라고 했던 정식이 다시 끼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친구의 집에 갔댔는데… 그전에도 몇번 갔댔지요. 불시에 순라군들이 우릴 잡아갑디다. 그리군 무작정 때리고 족치며 제천에 의병장들이 누구누구가 있는가, 김복한대장도 있지 않는가 따집디다. 우리는 그것이 큰 비밀이 아니기때문에 다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뭐 잘못된게 있나요? 하더니 다음날 관찰사가 저를 불러 어제 괜히 고생을 했다며 이 봉서를 줍디다. 김복한대장께 전하라구요.》
《안됩니다. 여기엔 작간이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도전에 백산이 반대하였다.
《우선 그 친구라는 사람의 집부터 믿을수 없습니다. 또 그만한 담보로 대군을 동원할수도 없습니다.》
《뭐야?! 그럼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는겐가?》
《순라군들이 어떻게 밑도 끝도 없이 남의 집에 달려들었는지 알수 없습니다. 이것은 주인집이 이미 적들과 내통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홍정식이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그러쥐였다. 그에 대하여 백산은 부릅뜬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마주보는 두사람의 눈에는 전번 닭서리때의 감정도 함께 어울린 분노가 서려있었다. 그때 김복한이 다시 나섰다. 그들을 다시 싸움에로 몰아가고싶지 않다는 심정이였다.
《좋은 생각이 있수다. 부대를 움직이기전에 내가 직접 찾아가 관찰사를 만나보지요.》
《관찰사를? 과연 그가 통할수 있을가?》
《만나보면 알지요. 여하튼 그가 나를 어쩌지는 못할터이니까요.》
춘영이 듣기에도 구미가 당기는 말이였다. 아니, 그렇게 해서 성공은 못하더라도 관찰사의 본심만이라도 알아온다면 그게 어디인가.
《그렇다하더라도 몸을 조심해야 하네. 이왕이면 의병을 몇십명 달고가게. 만약을 생각해서…》
《그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을 마십시오. 그가 나를 군수로까지 내신했던 사람인데 믿어야지요. 만약 이 일이 성공하면 창의대장님께 잘 말씀해주어야 합니다. 이 복한이 혀를 잘 놀려서 된 일이라구 말입니다.》
그는 마치 벌써 일이 결정되기나 한것처럼 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자기 부대에서 가장 믿음직한 다섯명을 선발하여가지고 충주로 떠나갔다. 리춘영이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그의 부대 50명 전원을 멀리에서 뒤따라보냈다. 실패하여 추격을 당하는 경우 성밖에서 놈들을 제압하게 하라고 해서였다.
제천에서 충주까지 50리길을 말을 타고 달려간 그는 멀리 성이 바라보이는 산굽이에서 대기하며 먼저 두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밝은 대낮에 자기 얼굴을 드러내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두어식경이 지나 성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관찰사를 만나보았는데 그가 몹시 반가와하며 오늘 밤 초경에 성문을 열어주도록 하겠으니 선화당으로 오라고 했다는것이였다.
역시 반가운 소식이였다. 날이 어둡기를 초조하게 기다릴수 없어서 성밖의 초라한 객주집에서 우선 한잔 마시며 시간을 끌다가 초경이 되기 바쁘게 성밑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약속대로 성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몇사람이 마주 나왔다.
《가십시다. 지금 관찰사님께서 기다립니다.》
앞선 사람이 말해서 소리없이 뒤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는 모든것이 눈에 선했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자기가 살던 고장이 아닌가. 선화당 거기에서만도 그는 김규식과 수십번 상종을 했고 몇번은 취중에 춤도 함께 추었다. 저 선화당 높은 대뜰우에서 …
그러나 그의 이러한 흥그러움은 선화당 그 넓은 안뜰에 들어서면서부터 불안에로 이어졌다.
사방에 초불과 초롱들이 휘황하게 빛을 내며 매달려있는데 그것은 전에없던 일이였다. 있었다면 관찰사가 특별히 연회를 차리거나 공사로 저녁이 늦어질 때 어쩌다 생기는 일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넓은 선화당안뜰에 사람이 하나도 없고 불빛만 휘황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시 주저하는데 대문에서 같이 온 사람은 다 떨구고 복한이 한사람만 들어가라고 했다. 어쨌든 관찰사를 만나야 하겠기에 마당을 가로질러 대뜰우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그러잡고 잠간 기다리라고 했다.
《이게 무슨짓이냐. 나는 관찰사를 만나러 왔다. 놓지 못하겠느냐?》
복한이 격해서 소리를 지르는데 분합이 열리며 김규식이 나타났다.
《우제 (복한의 호), 자네가 왔나.… 얘들아, 그만해라.》
그가 거드름스럽게 걸어나와 마루우에 섰다. 뒤따라 여러 사람들이 쓸어나오는데 다 복한이 알지 못할 사람들이였다.
보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규식의 옆에서 환한 전지불빛이 쏟아져나오며 복한의 전신을 비쳤던것이다. 그가 손으로 눈을 가리우고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알수가 없었다.
《관찰사님, 이게 무슨 일이요. 왜 나를 죄인취급하는거요?》
복한의 분기가 순간에 살아났다. 그런데 반대로 김규식은 껄껄거리며 재미스럽게 웃었다.
《좀 참으라구. 미안은 하네만 그렇게 하고 잠간 할말이 있네. 뒤를 돌아보라구. 형편을 알만 하잖은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저도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뒤뿐만아니라 량옆에까지 왜놈병정들이 총을 들고 빙 둘러서있었던것이다.
이어 마루우에서 우리 말이 아닌 전혀 색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끝나자 서툴기는 하나 조선말이 분명한 다음 목소리가 들렸다.
《듣거라. 이분은 조선주둔 일본군토벌대장 이다찌중좌님이시다.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제천의병대에 대하여 아는대로 다 말하라고 하신다.》
복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규식에게 속았다는 그것과 함께 드디여 왜놈과 마주쳤다는 반발심이 솟구쳤던것이다. 얼핏 떠오른것은 언제인가 린석에게서 들었던 이다찌라는 놈과 이름이 같다는것이였다. 그때 린석을 향해 겨누었다던 총구, 이놈이 바로 그놈이 아닌지 …
《우제, 이제부터 자네가 중좌님의 요구대로 응하면 용서는 물론 많은 선물과 함께 가까운 친구로도 될수 있고 그렇지 않다가는 일이 어떻게 되겠는지는 나도 알수 없네. 내가 그대와 모르는사이도 아닌만큼 어물쩍 넘길수도 없는 일이여서 미리 충고를 하네만 꼭 이분의 말대로 하겠다고 하게.》
《무엇을 말하라는것이냐?》
《다른게 아니구 지금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의병이 일어나는것을 매우 시끄럽게 여기고있다. 그들은 되도록 조선과 싸우지 않고 합방을 하여 조선도 일본과 같은 문명국으로 만들자는것이야.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자꾸 떠들며 소란을 피우니 그들이 뜻대로 일할수 없지 않은가. 나만 해도 그런 일이 우리 도의 경내에서 일어나는것이 시끄러울뿐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로 되고있거던. 하물며 자네와 같은 사람이 앞장엘 서다니.
류린석이로 말해도 그는 일개 촌선비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에게 세력이 있나, 재산이 있나, 그렇다고 세속에 밝기는 한가, 촌구석에서 붓글이나 쓰던게 무엇을 안다고 일본사람들과 맞서겠다는거야. 그를 따라다니는 자네는 또 뭐구?》
《의암선생을 욕하지 마시오. 그는 나에게 처음 붓을 들어 글쓰는 법을 배워주었고 세상의 리치를 깨우쳐준 스승이시오.》
《그런 우매한 사람을 스승으로 섬기고있으니 자네도 몽매해질수밖에. 자네는 의병대에 들었다는 그것만으로도 벌써 죽었어야 해. 하지만 이제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의병을 해산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면 용서받을수 있어. 내가 봉서에 밝혔던대로 무혈입성을 하겠다면 많은 사람이 죽지 않을뿐아니라 자네는 큰상을 받을수 있네.》
《나도 너와 같은 왜놈의 개가 되란말이냐?》
복한이 여기서 더는 참지 못하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김규식이 잠간 얼떠름했다가 계속했다.
《사람은 세속에 밝아야 해. 아무리 힘있고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세속을 따르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고 잘 살수도 없어.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참 우둔하단말이야. 공부도 많이 했고 아는것도 많은데 세속에는 왜 그리 어둡나?》
《야, 왜놈의 개야, 내가 네놈에게 속은게 분하다. 네놈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훈시냐. 당장 그 더러운 개주둥아리를 닥쳐라!》
복한이 분격하여 길길이 뛰였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고 긴장도 했으나 일단 놈의 정체를 안 다음부터는 무서운게 없었다.
《네가 임금의 신임받는 신하로서 평시에는 만사람앞에서 곧잘 충군충의에 대하여 떠들더니 순간에 왜놈의 개로 변했구나. 그게 세속에 밝아서 그렇게 되였다는것이냐?》
이제는 김규식도 참지 못했다. 복한이만 잘 리용하면 의병대의 해산을 용이하게 할수 있으리라고 타산했던것인데 어림도 없었다.
《무엇이? 이놈, 내가 임금의 신임을 저바렸다구? 저런 고현 놈 보았나?》
《개소리 말아. 너는 임금이 보낸 〈애통소〉를 보지 못했느냐. 개도 설사 자기 주인이 빌어먹는 거지라 할지언정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자기 국모를 죽이고 임금까지 죽이려 하는 저따위 오랑캐놈의 사타구니에 붙어?! 야, 이 천하에 개보다도 못한 놈아.》
옆에서 통역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듣고있던 이다찌가 김규식에게 뭐라고 했다. 이윽하여 통인아이가 종이장과 붓 하나를 들고 복한의 앞으로 뛰여내려왔다.
《더 여러말 할게 없으니 네가 거기에 써라. 어느날 어느때까지 너의 대장 류린석이라는 놈과 여러 두목들이 여기 도착하도록 하겠다고 말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는 물론 같이 온 다섯놈도 모두 살려줄수 있다.》
규식이 이렇게 말하고 여유라도 주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때에도 복한은 두려움을 몰랐다. 물론 그는 자기뿐아니라 지금 어디엔가 갇혀있을 다섯사람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은건 아니다. 그럼에도 생각은 자기를 거짓말로 유혹하고 또 뒤에서 조종해온 김규식과 이다찌놈에 대한 분노로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통인아이가 내미는 종이장을 버럭 당겨 두손으로 박박 찢어던졌다.
《이다찌놈아, 우리 조선사람이 다 저 규식이와 같을줄 아느냐. 봐라. 나는 개밑구멍을 핥으면 핥았지 더러운 왜놈과는 입을 맞추지 않는다. 설사 우리 의병대전체가 다 죽을지언정 네놈의 말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을것이다.》
하얀 종이장이 눈덩이처럼 흩어졌다가 그의 발밑에 짓이겨졌다.
바로 그 순간 이다찌놈의 허리에서 시뻘건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대로 빨래줄처럼 길게 뻗으며 복한에게로 날아갔다. 한번, 두번, 세번…
그러나 복한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소리도 듣지 못했다. 머리속에 떠오른것은 류린석대장이 빨리 와야 하겠는데, 그에게 이다찌놈의 본심을 알려줘야지 하는 막연하고 애매몽롱한 생각뿐이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와 함께 같이 왔던 다섯사람들의 시체가 성문밖에 주런이 매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