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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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송로는 딸의 상해출발을 명년봄쯤으로 미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것은 진옥의 병구완을 위해서 우선 현경이의 손이 필요한데다가 마록구의 누이가 이 추운 동삼에 슬하에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내놓고 어찌겠느냐고 야단을 때리는바람에 당초의 계획을 조금 밀리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렇던 백송로가 이즘 갑자기 딸의 상해출발을 서둘렀다. 진옥이의 간호나 누이의 말림이 문제로 되지 않았다. 백송로는 이즘 확실히 이전과 같지 않게 날마다 변해가는 딸의 움직임을 커다란 공포속에 주시하고있었다. 아버지의 말이면 어기지 못하는것으로 알고 아버지의 견해면 세상의 가장 옳은 뜻으로 받들었으며 아버지의 고민을 자기의 슬픔으로 여기고 그 아버지에게 온갖 효성을 바쳐오던 현경이가 이제는 제법 아버지의 견해에 의혹을 품고 아버지의 주장에 엇서나가는 말도 하였으며 아버지의 우울과 심중의 번민을 공연한것으로 치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진옥의 영향때문이였다. 진옥이가 밤마다 현경이에게 유격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 돌아가는 소란한 사변들을 주입하더니 어느새 순진하던 딸이 별난모양으로 달라져갔던것이다.

그래서 백송로는 하루속히 딸을 진옥이로부터 떼내려고 작정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상해출발을 서둘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날씨가 갑자기 나빠져서 딸을 문밖에 내놓을수가 없었다. 상해로 가려면 철도연선에 나가 기차를 타야 할텐데 이 혹한속을 헤치고 그 먼길을 고이 실어다주겠다는 마차군이 없었다. 할수없이 하루하루 날씨가 좀 수그러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느라니 백송로의 신경은 예민할대로 예민해졌다. 진옥이와의 상종을 끊게 하려고 부상처를 간호하는 일도 누이에게 맡기고 현경이의 잠자리마저도 안방으로 옮겨왔으나 짬만 나면 두 녀자는 한데 붙어앉아 소곤거렸다.

가만 주시해보니 진옥이가 늙은것의 눈을 속이고 현경이를 끌어당기는것이 아니라 딸이 아비의 눈을 피해 골방으로 기여들고있는것이다. 백송로는 딸의 행위에 마음을 놓을수 없었으나 아직 어떤 격노한 일에도 목청을 높여본 일이 없는 로인인지라 현경이를 불러 좋게만 타이르고 안방 미닫이뒤에 잠자리를 펴고 노상 《파수》를 서다싶이하였다.

그런데 이날밤에도 현경이가 또다시 뒤골방에 기여들어 소곤거리기 시작하였다. 가만히 숨을 죽여가며 들어보려니까 현경이가 동만의 유격근거지며 인민혁명정부며 소왕청방어전투며 하는것에 흥미를 느끼고 이것저것 캐물으면 진옥이가 아픔을 무릅쓰고 도간도간 신음소리를 섞어가면서 대답해주고있는것이였다.

현경이 가만가만 말하는 소리를 들어봐도 그새 혁명이니 유격대니 하는것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얻어들인 소식도 상당하며 그리고 상당한것에 공감과 지지를 나타내고있는것이 틀림이 없다.

백송로는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로인은 안방에서 미닫이를 쾅쾅 두드리며 현경이더러 당장 건너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후 안방 사이문 저쪽에서 현경이의 목소리가 간신히 울렸다.

《아버지, 왜 부르셔요?》

《이애, 건너오라면 올게지 무슨 군소리냐?》

늙은이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현경이가 냉큼 사이문을 지치고 들어왔다.

《거기 앉거라!》

백송로는 목침으로 방바닥을 울리면서 한모양으로 노발대발했다.

《나는 지금까지 너를 싫은소리 한마디없이 고이 키워온 늙은이다. 하지만 오늘은 종아리를 후려치면서라도 법도를 가르치고 정신이 들게 해야 할가부다. 너는 도대체 이 늙은 독립운동자의 권고를 제껴놓고 만날 앓는 녀성한테 붙어앉아서 무슨 쑥덕공론이냐?》

《아버지, 너무 목청을 높이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주세요. 제가 어찌 딸자식의 성장에 바치신 아버지의 수고를 모르며 이 딸자식에게 향한 아버지의 꿈과 소원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는 좀더 세상을 넓은 시야로 공정히 굽어보아야 하실줄로 믿습니다.》

《허, 이런 기막힌노릇도 있느냐? 네가 이 아비를 감히 가르치려느냐? 일생을 고스란히 내 나라의 독립운동에 바친 늙은 지사를… 어디 다시한번 말해봐라. 이 늙은 아비가 슬하에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상해에 보내려고 작정했을적에는 이곳의 독립운동에 대한 환멸이 얼마나 컸는지 그걸 네가 아느냐!》

《아버지, 어쩌면 그렇게도 엄혹하신 말씀을… 주야로 병고에 시달려 깜박깜박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저의 성장에 힘을 바쳐주려고 애쓰는 진옥언니의 막심한 수고를 생각해서도 어찌 그렇게야 신랄히 말씀을 하실수 있어요.》

현경은 아버지의 무릎우에 푹 꼬꾸라져 가슴을 저미는듯한 설분을 토로하였다.

《아무리 철없어도 이제는 아버지에게 이딸 하나밖에 없지 않아요? 전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오는 아버지의 뜻을 지킬수만 있다면 말년의 인생에 지팽이가 되여드려도 한이 없을 몸이예요. 그래도 진옥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속에 우리의 앞길이 있고 륙십평생 고난속에 흘러보낸 아버님의 슬픈 생애를 빛내일 언덕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밤마다 아버지 몰래 진옥언니를 괴롭히는 저의 심정이야 알아주셔야 할게 아니나요.》

《듣기 싫다. 도대체 누가 나한테 말년의 광명을 빛내여준단말이냐. 내 눈엔 이 시각도 무참한 희생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내 나라 동포의 구슬픈 모습이 있을뿐이다. 똑똑히 명심해 듣거라. 오늘 이후엔 그런 소린 그만두거라.》

진옥은 조용히 숨을 가누고 누워 안방에서 울리는 백송로의 말소리를 똑똑히 새겨듣고있었다. 진옥은 천만뜻밖으로 놀랐다. 백송로가 그렇게까지 완고하게 엇나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한것이다.

진옥은 백송로가 자기의 병구완에 힘쓰는 그만치 유격대를 동정하고 성원하는줄 알았으며 현경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로인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줄 알았을뿐이였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시중이 날을 따라 더 극진해간다고도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오늘 보니 그런것이 아니였다.

로인은 유격대를 경원하고 유격대의 힘을 믿지 않을뿐더러 딸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기울어질가봐 막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있는것이다.

진옥은 이제는 현경이만이 아니라 백송로를 향해 자기가 해야 할바를 다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진옥은 자기의 부상처가 날마다 심해가고 온몸의 저항력이 푹푹 꺼져가는것을 의식하고있었다. 자기가 백송로부녀의 손에 구원되였을 때만 해도 추위에 몸이 가드라들어 쓰러졌을뿐이지 부상처에 화농이 심하지는 않았었다.

부대를 떠난 이후에 한마을에 찾아들어가 뜨뜻한 귀틀집아래목에서 몸을 지지고나서는 기분이 거뜬하여 며칠 몸건사를 잘하면 부대가 액목땅에 내려갔다가 돌아설쯤엔 다시 행군대오에 끼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있을정도였다. 그 마을이 밤새 놈들의 《토벌》을 당해 다시 한지에 나서지 않았던들 부상처를 얼구어놓고 이 지경으로 되였을것인가?

그러나 백송로앞에서 자기 할바 의무를 생각하자 진옥은 온몸의 긴장이 고무줄처럼 헹기우며 머리속이 맑아지는것을 느꼈다. 자기의 육체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유격대원의 똑똑한 거동으로 로인을 대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속다짐하였다.

진옥은 이불속에서 천천히 팔을 뽑았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신음소리를 지를가봐 약사발에 덮은 식지를 집어다가 뭉그려 입에 물었다. 그다음 베개를 밀어놓고 머리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봉당냄새가 훅하고 코에 날아들었다. 문득 (내가 이렇게 쓰러지고마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눈굽에 이슬이 맺혔다. 별로 쓸쓸한 생각, 억울한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진옥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씻을념도 않고 그대로 혼신의 힘을 모아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말할수 없는 아픔이 온몸의 신경을 가닥가닥 몰고 전류처럼 퍼져갔다. 금시에 팥알같은 구슬땀이 얼굴에서 줄을 그으며 후둑후둑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용케도 몸을 일으켜세웠다.

진옥은 상반신을 벽에 기대고 헛갈려지는 의식을 가다듬으려고 눈뿌리에 힘을 주며 앞을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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