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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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은 가슴언저리까지 올려놓은 이불을 조금 밀어놓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였다.
《나는 지금 이 문을 밀치고나가 저 섶나무 울바자를 넘어서면 소녀적에 갓난동생 등에 업고 걷는 동생 손목 잡고서 오르내리던 산언덕이 보일것만 같아요. 업은 동생은 불편하다고 걷는 동생은 못따라와 칭얼거리건만 자연의 유혹에 빠져버린 나는 띠동인 허리로 땀을 씻을 생각도 없이 가시덤불로 비탈로 헤매이며 즐겁게 돌아다녔지요. 그런데 지금 내 가슴에 애달프게 매달리는 인상은 세 자매가 같이 거닐던 그 언덕에 업고 데리고 다니던 그 아우들이 묻혀있는 까닭이예요.》
현경은 잣송이를 쥐였던 손에 턱을 고이고 창문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별로 처량한 생각이 들며 눈굽에 눈물이 고이는상싶었다.
《내게도 고향생각이 나는군요. 벌써 어머니 돌아가신지 십년이 넘고 아버지 홀로 나의 곁에 계시지만 어릴적 고향이라는것이 분명히 있었죠. 염산리 까치골 조그마한 촌 삼간초옥이 나의 고향집이예요. 재작년 서울에서 간도를 다녀갈 때는 산허리에 남포질을 하던곳이 이번에 오면서보니 그 고개에 돈넬이라는것이 뚫려 기차는 평지같이 내달리고 대추나무 우거진 우리 집과 터전은 물에 밀려 없어지고 지금은 모래밭 언덕이 되고말았더군요. 어릴적에 보던 산은 평지되고 놀이터는 강이 되였으나 기억이야 어찌 영원히 스러질수 있겠나요. 영원히 잊지 못할 고국을 아주 떠나온 지금에는 가슴속에 밀려드는 향수가 참을길이 없어요. 진옥언니, 이왕 내친김에 고향 계신 어머니 이야기 좀 해요. 나는 어머니 없이 자랐기에 누구든 어머니 이야기만 해주면 기뻐요.》
《어머니 이야기?…》
진옥은 현경의 손을 잡아 가슴우에 끌어다놓고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그러지 않아도 부상당한 몸으로 누워있는 지금에 가끔 떠오르는것이 어머니 생각이다. 진옥이를 위해 그리도 힘을 바치시고 사랑을 베푸시던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
진옥은 언젠가 어머니가 음악공부하는 딸을 보고싶어 기숙사에 찾아오셨다가 발뒤꿈치가 고무신에 닳아서 보선우로 피를 흘리시면서도 자기에게 안보이고 손을 가리우고 앉아계시던 모습이 눈에 삼삼하였다.
《우리 어머니 얘기하자면 끝이 없어요. 별로 잘살지도 못하는 살림에 딸의 학비를 대주고 시중을 들기에 너무도 일찍 허리가 굽으셨어요. 내가 학교에 들어가 첫 설을 맞게 되는 그때에 어머니는 딸이 남의 축에 빠질세라 분홍 모본단저고리와 새까만 우단치마를 해보내시지 않았겠나요. 나는 그걸 남들처럼 막 입지 못하겠기에 그대로 개여놓고 어머니에게는 섭섭해하실가봐 동무들과 같이 입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다음해 설날에는 내가 좋아하는 조선명주에다 은근한 수박색물을 들여 치마를 해서 소포로 보내주셨더군요. 나는 그것도 입을 생각을 못했어요. 다리미로 꼭꼭 눌러주신 주름그대로를 곽속에 넣어두고 가끔가끔 들여다보는것이 내게는 더없는 기쁨이였어요. 그해 여름방학에야 그 치마를 꺼내 입고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겠나요. 그 어머니, 참말 이 딸때문에도 고생이 많으시고 오빠때문에도 속많이 타신 우리 어머니!… 내 손목 잡고 마루끝에 나앉아 달을 보며 〈멀리 가서 공부하는 오빠가 보는 달이니 잘 보아두라〉고 하시던 어머니 그 말씀마저 귀가에 쟁쟁히 울리는것 같아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 오빠가 편지에 써보낸 시구절마저 이런 때는 너무도 생생히 눈에 밟혀온답니다.
떠나온 고향은 삼천리 금수강산
딛고선 이 땅은 이방의 거친 산야…
오빠는 떠나온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기어이 독립의 뜻을 이루기전에는 고향에 가지 않겠노라 굳은 맹세를 다지군했어요.
오대나 내려오며 살던 고향이건만
괴나리 보짐지고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 부둥켜안고
눈물이나 지으려고 찾아간단말이요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이대로는 안가오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가벼이 신을 벗기전에는…
오빠는 자기 말과 같이 그렇게 모두들 안타까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어머니곁으로 와보지 못했어요.
룡정동흥중학에서 공부하고있었더랬는데 비밀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여 왜놈류치장에서 돌아가셨어요.》
쓸쓸히 동정에 넘친 표정을 짓고 하염없이 진옥이를 바라보고있던 현경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진옥이의 슬픔과 진옥의 그리움은 어느덧 현경이의 슬픔과 그리움으로 되였으며 사랑하는 자식들을 슬하에서 떠나보내고 저저히 눈물에 잠겨있을 머나먼 진옥의 고향촌 늙으신 어머니는 그대로 현경의 어머니로도 생각되는것이였다.
건넌방에서는 백송로의 기침소리가 쿨럭쿨럭 들려왔다. 진옥이가 이 방에 몸을 뉘인후로 그렇게는 시름겹게 들어보지 못했던 기침소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똑똑한 정신으로 듣게 되는 그 기침소리는 한 방에서 무릎을 마주대고 깇어대는 기침소리처럼 그렇게 또렷하였다.
진옥이는 그제사 자기가 자리를 깔고 누운쪽 벽이 산자를 엮고 앙트를 붙인 벽이 아니라 두폭 미닫이를 마주대고 종이를 발라놓은 너렁청한 큰 방의 한쪽 구석막이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백송로는 맞은쪽 방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현경이와 진옥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낱낱이 새겨듣고있었던것이다.
현경은 금시 떨어지려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고 진옥이의 가슴우에서 흘러내린 이불을 당겨주었다.
《그런데 이것보세요. 고향집 늙으신 그
진옥은 살포시 눈을 내리깔고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실로 그것을 헤쳐놓는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음악이상 숭고한것이 없다고 생각할 지경으로 순진하던 처녀가 조국광복의 성전에 총들고 나서기까지 놀라운 전변을 가져온 자기의 생활, 슬픔도 있고 후회도 있고 번민도 있었으며 그 한시기를 뛰여넘어서는 인생의 광명한 다른 한 봄을 맞고 조국과 인민이라는 크나큰 감정에 항시 가슴을 맞대이고 성장의 한구간을 줄기차게 살아온 고귀한 추억도 있으며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 누워있는 때에조차 그리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귀중한 사람도 만나게 된 갖가지 회억이 다같이 깃들어있는 그 비상하고 아름다운 사연들을 쉽사리야 어떻게 헤쳐놓는단말인가?
《아마 나의 생활에 호기심이 동했나보지요?》
《글쎄 뭐라고 할가요? 아무튼 음악에 취미를 두셨던이가 유격대가 되셨다는 이 기이한 사실을 공손히는 믿게 되지 않는구만요. 혹시 음악에 무슨 환멸을 느꼈거나 아니면 그만한 정도의 어떤 모진 타격을 받으시고…》
《그렇지는 않어요.》
진옥은 현경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음악에 대한 나의 리상은 대단했어요. 나는 늘 이런 공상을 하고있었댔어요. 어떻게 하면 세상에 범람하는 모든 명곡을 작자의 기분처럼 능숙하게 표현할수 있을가, 어떻게 하면 내 가슴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가장 고결하게 조화시켜 아름다운 선률로 표현해볼수 있을가, 어떻게 하면 우주에 사무친 천지의 신비한 리듬을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담아 불러볼수 있을가 하고요. 이것이 그때 나의 리상이라면 리상이였어요. 나는 음악애호의 이 심정을 취미라거나 오락이라는 말로 모독하고싶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숭배라는 말외에는 만족을 줄 말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댔어요.》
《아이참, 그렇게 음악에 흠뻑 빠져있었나요. 그런데도 음악을 떠나 유격대생활을 하시게 되던가요?》
《그럼요. 왜놈의 류치장에 묶이여있는 오빠의 소식을 듣고 룡정바닥에 찾아들어가 동흥중학생들의 눅거리 하숙방에 묵고있던 시절의 이 진옥이만 해도 세상에 성스러운것이 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할 지경이였어요. 오빠가 왜놈들의 손에서 풀려날 가망이 바이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로비마저 떨어져 오빠의 학우들이 정거장에 나가 짐군노릇을 하던 그때에조차 손에 오선지를 감아쥐고 해란강가에 나가 성악훈련에 여념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오빠의 학우들이 나를 어떤 녀자로 보았겠나요. 오빠에 대한 비감한 생각으로 눈에는 가랑가랑 눈물을 담아가지고 목청을 티우느라 애쓰는
그 순진한 처녀를 두고말예요. 그래서 그랬던지 어느날 오빠의 친한 동무 한분이 장마비에 눅눅히 젖어든 마루에 걸터앉아 음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차근차근 물으며 세상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나는 그때 비로소 세상에 음악보다 귀중한것은 나라와 인민이며 나라가 있고 인민이 있어야 진정한 음악도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되였어요. 후에
《아니 세상에 이런 일두 있어요. 이건 막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닌가요?》
현경은 너무도 희한한 생각에 손벽을 막 치며 기뻐하다가 진옥이를 꼭 껴안았다.
《언니, 그분하고 어떤 사이예요. 서로 사랑하고계시죠?》
《그래.》
《몹씨?》
《몹씨!》
《보고싶겠구만요?》
《더 말해 무엇하겠나요.》
진옥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슴새여나와 베개모서리로 굴러내렸다.
《언니, 진정하세요.》
현경은 눈물을 머금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나는 언니같은 녀성이 유격대에 있다는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언니는 어쩌면 이렇게도 진실하고 마음이 아릿다운 녀성이겠나요. 나는 언니를 더없이 믿고 사랑할것 같아요.》
《고마와요. 나도 현경이를 그렇게 믿고 사랑할테예요.》
두 녀자는 서로 힘껏 포옹하고 가슴들을 들먹거렸다.
《언니, 이제부터 밤마다 유격대 이야기를 조금씩 해주어요.》
《그러자요. 그게 현경이의 소원이라면?》
《소원이예요. 나는 언니네 세계를 알고싶어요. 유격대를 알아야겠어요. 세상을 좀더 넓게 알고나서 내 운명의 길에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가봐요!》
현경이의 흥분한 목소리가 두 녀자의 열띤 체온으로 덥혀진 방안에 챙챙히 쇠소리를 내며 울려퍼졌다.
《현경아!》
안방에서 백송로의 거쉰듯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무슨 일이예요, 아버지?》
현경이는 시치미를 떼고 천연스레 물었다.
《몸이 편찮은이를 대하고 무슨 말을 그렇게 내처 하는거냐. 똑똑히 병구완을 할려면 그 일이나 착실히 할게지.》
평상시 별로 말없는 백송로의 입에서 그만한 어조의 음성이면 대단히 노했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현경은 냉큼 일어나 진옥이에게 한눈을 꼭 감아보이고 안방으로 뛰여나갔다.